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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4월 8일자

최윤재의 [대입논술 가이드]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른바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교과서 포럼’이 얼마 전 ‘대안교과서-한국근현대사’를 출간하였다. 때마침 대한상의에서는 ‘초·중·고 교과서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교육과학기술부에 건의했다. 두 사안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몇 년 전부터 이미 기존 교과서에 대해 폐쇄적 민족주의, 자학사관, 반시장·반기업적 내용 등의 개념으로 비판해온 터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의 인식이나 현재를 있게 한 과거 역사의 인식 문제를 국가 혹은 정권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던 데에서 벗어난 지 길게 잡아야 20년 남짓이다. 그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거나 억눌렸던 시각과 관점들이 점차 빛을 보게 되었고, 교과서 역시 이런 변화를 반영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변화를 이념적 틀로 보는 시각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든지, 친북좌파의 시대라는 비판, 뉴라이트 운동 등이 그렇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시각을 가졌거나 그 지지를 받은 세력이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앞의 두 사안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전보다 더 큰 관심을 끌고 그 파장이 우려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안교과서의 저자들은 근현대사를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실증적으로 역사를 기술했다고 주장한다. 그 출발점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현재’이다. 바로 이 현재를 있게 한 원인으로서 ‘과거’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돌이켜보니 5·16과 박정희가 있고,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이 있으며, 구한말 개화파와 일제 식민지배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바로 오늘을 있게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흔히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보는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들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고 해서 모두가 후일의 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대안교과서처럼 앞에서 언급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조차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사건들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면, 같은 논리로 앞의 사건들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이 현재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 만약 역사를 물질적 혹은 경제적 발전이라는 기준으로만 본다면 거의 모든 과거의 사건 혹은 역사적 사실은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실증적 맥락에서 볼 때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를수록 인류는 점점 더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중국의 통일제국 형성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면서도 그 폭압적 만행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역사를 한 가지 기준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가치의 발견과 이를 구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제각각 시시의 이름과 늦음은 있을지언정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여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근현대는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추구했으며, 이것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 중의 척도로 자리잡아왔다. 물질은 눈에 보이고 민주주의나 인권의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향유해야 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짓밟았다는 데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물질적 토대가 해방 후 우리의 근대화와 발전에 필연적 연관관계가 있는지 불분명함에도,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사건이라 해서 합리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방 이후 역사적 사건들도 같은 맥락에서 보고 해석해야 한다. 현재의 결과만을 가지고 과거의 일들을 가능한 한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결과적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새 정부와 결합하게 되면, 역사에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무화될 가능성마저 있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주제로 하여 인식의 대립과 갈등에 직면하여 있다.

1 대안교과서를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논의해보라.
2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나 척도에 대해 논의해보라.
3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는 얼마든지 혁명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명제를 비판적으로 논의해보라.

〈 최윤재|서울디지털대학 문창학부 교수·한국논리논술연구소장 klogic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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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4월 4일자

[책읽는 경향]경북에서-들꽃을 엿듣다

시가 읽을거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느낌이 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독자와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소통이 어려운 것은 난해하기 때문이다. 복잡 미묘한 정서를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으리라. 어쨌든 독자 없는 시는 불구다. 독자가 다가갈 수 있는 시가 아쉬운 참에 김윤현의 시집 ‘들꽃을 엿듣다’(시와에세이)를 읽는다. 가슴에 찡한 울림이 전해온다. 야생화를 제재로 하고 있는 60여 편의 시에서 맑은 영혼과 은은한 향기가 묻어난다.

야생화는 오염되고 건조한 우리 마음에 수많은 언어의 빛깔과 향기를 보낸다. 시인은 그것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담아낸다. 거의 마술에 가깝다.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 야생화의 순수한 몸짓과 영혼을 엿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시인은 꽃잔디를 두고 “자신을 위해서는 작게 가지려 하고 /남을 위해서는 크게 하려는 삶이다”. 그래서 “꽃을 피우지 않아도 꽃이다”라고 말한다. 경지에 오른 시심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진지하고 깨끗한 말이 화려하고 힘센 말에 묻혀버리는 수가 종종 있다. 김윤현의 시가 그렇다. 그는 야생화 같다. 시의 향기를 담으려고 묵묵히 애쓰는 시인이다. 눈길 많이 가지 않는 지방 어느 시인의 시에서 삶의 무한한 의미를 발견한다. 시가 아직도 유효함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 신재기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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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송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
 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메마르고 시든 일상에서 돌아와 그대
 마음 환하게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

출처 : <들꽃을 엿듣다>(김윤현,시와에세이) p.11에서

 

* 개망초

가뭄에도 몸을 낮추어 견디고
목이 타는 햇볕에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이제 삶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외진 곳이나 바로 서기 불편한 곳에서도
말없이 아름답게 피는 개망초를 보며
인생을 더 긍정하기로 했다

보아라, 비탈진 산하에서도
고개 끄덕이며 사는 것들은 다 아름답지 않은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며
낮은 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편편한 들판이 아니라 해도
가지런한 논둑이 아니라 해도
다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출처 : <들꽃을 엿듣다>(김윤현,시와에세이) p.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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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년 3월 4일자

[책읽는 경향]경남에서-우리들의 하느님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 심해질 듯하지만, 세상은 어디까지 내달릴 수 있는지 한번 보자는 듯한 양상이다. 스승의 존재는 이럴 때 더욱 그립다. 나는 작년에 작고한 권정생 선생이 만년에 남긴 산문을 모은 ‘우리들의 하느님’을 권한다. 내가 가진 책은 마분지 재질의 표지가 너덜너덜해지고 본문은 누렇게 변색돼 볼품 없지만, 지난 10여년간 때때로 이 책을 들춰볼 때마다 받았던 가르침과 위로는 작지 않다.

이 땅에서 70년을 살다간 선생의 주업은 ‘앓는 일’이었고 부업은 책읽기와 글쓰기였다. 선생은 방대한 분량의 독서를 하셨지만, 당신의 글은 가장 기초적인 어휘로 이루어져 있고, 담백한 입말이 살아 있을 뿐 문채(文彩)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의 글에는 힘 없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진한 슬픔이 있다. 종교와 권력의 이름으로 군림하는 것들에 대한 노여움이 있고, 이 허망한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기 위한 고통이 배어 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의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출판사로부터는 ‘우리 책이 그런 방식으로 팔리길 원치 않는다’며 퇴짜를 맞았고, 선생으로부터는 ‘아이들에게 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몇십만 부의 판매량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저자와 출판사의 ‘바보 같은 선택’은, 돌이켜보면 지난 십수년 동안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이 책의 정신적 가치를 지켜낸 혜안이었다.

〈 이계삼 밀양 밀성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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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년 3월 15일자

[책동네 산책]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얼마전 인사동에서 대학 동창 둘을 만났다. 때늦은 눈이 내리는 밤. 우리들은 자꾸만 과거로 떠밀려갔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에는 1980~90년대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다. 지난날의 추억이란 씹기 좋은 안주였다.

‘아차’ 하는 사이 대화가 이 ‘책동네 산책’으로 옮겨져 있었다. 신문을 잘 안 읽는 줄 알았던 친구 A 왈. “사실 네가 감수성이 없다는 건 아니까 지금 쓰는 방식을 더 다듬는 게 낫지 않을까.” 맞습니다. 오늘 술값은 그대가 내세요.

대화의 주제는 다시 과거로 흘러갔다. 소싯적 읽던 책. 뭐가 있었더라. ‘그림동화전집’-아마 계몽사판이었을 거다-과 ‘삼국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 꽂혔다. 친구 B는 ‘정글북’과 ‘괴도 루팡’ 시리즈를 댄다. 괴도 루팡이라니. 모리스 르블랑이라는 작가는 우리의 명탐정 홈즈까지 제 멋대로 등장시켜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않았던가.

셜록 홈즈냐 루팡이냐, 옥신각신하는 걸 듣고 있던 A가 “성격대로 읽네”라고 한 마디 한다. 그러면서 제 얘기를 꺼낸다. “조숙해서 초등학교 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고. 세로쓰기로 된 양장본까지 모두 독파했다고 덧붙였다. 사춘기 소녀의 초경을 오미자 빛깔로 묘사한 소설의 한 장면을 방금 읽은 것처럼 기억해내기까지 했다. 이런….

‘추억의 책’이란 그런 마력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세 살배기 아이의 아빠와 노총각, ‘돌아온 싱글’이 뭘 알까. 그런데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뭔가 할 말이 생길 것도 같다. 이번 교보문고 아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권에는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 ‘어린이를 위한 경제습관’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자율’ ‘리더:성공한 위인들의 리더 방법’ 등 자기계발서가 7종이나 올랐다. 대부분이 성인출판물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책들을 ‘어린이를 위한’ 수준으로 맞춘 책들이다. 아동용 자기계발서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고 찬탄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이 책은 결국 부모들이 구입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성 세대가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책들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도 씁쓸하다. 아이들이 먼 훗날 ‘추억의 책’을 안주 삼아 얘기할 때 이런 책들을 거론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다.

평생 어린이 문학을 일궈온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유고 평론집 ‘어린이를 살리는 문학’(청년사)이 이번주 출간됐다. 그는 책에서 “어린이책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면서도 “재미는 그 책 속에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절실한 문제가 들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어린이들이 읽는 좋은 책을 골라내는 일은 “정신의 긴장”을 요구하며, 부모들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이 오늘날 어린이 책에 얽힌 ‘세태’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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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일책소개 코너가 이 책을 다루어 무척 반가왔습니다. 이 시집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묻혀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신문에 소개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래는 바로 그 책소개를 퍼온 글입니다.  

*경향신문 2008년 3월 31일자

[책읽는 경향]경남에서-아흐레 민박집

이 세상 속으로 달랑 한 권 시집을 내놓은 시인의 시집이 있다. ‘아흐레 민박집’(박흥식·창비)이다. 시인이 되면 곧바로 몇 권씩의 시집을 내놓는 경향으로 보자면 참 드문 시인의 일이다.


나는 이 시집을 1년에 스무 번 정도는 읽었지 싶다. 시집이 나온 지 딱 10년이 되었으니, 이백 번도 더 읽은 셈이다. 읽을수록 시집 속의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것 같고, 그 깊은 체험들의 간결 압축미가 빛나고 있다. 형식의 가치 추구는 여백에서 독특하게 번득이고 있다. 시에 대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고 인색했던 과작의 시인일까?

요즘 사람들은 상상력은 풍부하고 언어적 기교도 세련되었지만 보편성과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김규동 선생이 지적한 바 있다. 정지용, 이육사, 한용운도 단 한 권씩의 시집밖에 없다. 한때 반짝 주목받기보다는 오래 읽히는 시집이 간절한 지금이다.

나는 이 시집의 배경이 되었던 민박집을 실제로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자고 일어나면 뜰이 함초롬히 젖어 있는 곳, 강변의 자잘한 자갈들이 마음을 밟던 그 민박집에서 마냥 오래 머물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정지용, 백석 닮은 시인들이 함께 거닐고 있는 듯한, 이 완벽한 서정으로 완성된 시편들은 시를 쓰는 나를 기죽게 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좋은 시집을 골라 읽기 힘든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텍스트로서도 손색이 없는, 오히려 독서 편식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시집이다.

〈 박구경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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