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언론 10년 경향]“생명·자연·평화의 사회주의적 가치 받들 때”
입력: 2008년 03월 27일 17:41:10
 
ㆍ리영희 선생, 입을 열다

대담=김봉선 국제부장

지난 20일 오후 경기 군포의 산본에 있는 리영희 선생 댁을 찾았다. 2006년 9월 “이제는 지적(知的) 활동을 마감한다”고 선언한 뒤 1년6개월여 만의 인터뷰였다.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건강을 많이 회복하긴 했으나 팔과 다리가 크게 불편해 보였다. ‘선언’ 뒤 집필활동은 접었고, 산책이나 독서로 부부의 ‘건강한 삶’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리선생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러나 화제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영어 몰입 교육에 이르자 어조가 높아졌다. 한 평생 ‘고독한 소수자’로 살아온 그는 여전히 외로워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리선생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라며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댁 주변의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최고예요. 건강할 땐 아침마다 식전에 (수리산) 산 꼭대기까지 갔다 왔어요. 지금은 수직운동은 못하고 수평운동으로 산책만 하는데 오전에도 두시간 산책했어. 산길을 걷다보면 그 정도 돼. 요즘 재미있는 건 (TV에서) 동물의 왕국, 환경 스페셜 이런 것 보는 거야. 동물의 왕국 보고 있으면 맘이 편해. 생명 중에서 인간이 제일 못나고 악하다는 걸 깨닫게 돼.”

-4월1일로 경향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재탄생한 지 10년을 맞습니다.

“경향신문 내용이 좋다는 말은 의식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들어요. 나도 그렇고, 기획을 잘하더라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고, 참신해요. 몇 해 보는 동안 경향이 한결 나아졌구나 하는 것을 나도 느꼈지. 난 덕담 같은 것 잘 모르지만 사명감을 갖고,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문이라는 긍지를 갖고, 왜곡하지 않고,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통해 내일을 여는 국민들의 길잡이가 됐으면 해.”

-지금, 언론의 역할은 뭘까요.

“그런 종합적인 얘기는 못하겠어. 요즘은 오로지 (나와 아내) 두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서로 도우면서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해요. 이제 몇 해 살지 모르는 병든 세대인데, 정치가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생각할 여지가 있나. 그건 다 할 사람이 하는 거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준비만 하는 거예요.”

-오늘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지 만 5년이 됐습니다.

“한국의 지식인은 전혀 지식인이 아니야.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때 침략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사랑하고, 마치 미국인들을 세계를 구제하는 평화의 사도로 착각하는 인간들이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할 때 얼마나 요란하게 떠들었나. 돈 가진 자들은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후에 무슨 이권을 놓친다는 식으로, 국가의 이권을 위해서 가야 한다고…. 그래서 한국이 무슨 이권을 얻었나.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렇고,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학살을…. 미국 제국주의의 본 목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끌려 들어가서, 뭔가 그것을 하는 게 도의적이나 당위적으로 실리가 되고 국익이 된다는 한심한 소리를 했잖아요. 지난 대통령 선거를 이겼다는 당사자나 정당, 지지세력은 전부 그런 식으로 미국의 종 노릇을 자원한 사람들이 아닌가. 난 50년 동안 국제관계를 보면서 꽤나 노력해왔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 동남아나 중남미를 봐도 주체적인 주장이 나오는데, 남한 같은 곳은 내가 알기론 없어요. 반공주의는 그 자체가 창조적 사상을 갖는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 사고의 명석함이나 건전한 세계관, 인류의 평화 등을 전부 거부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돈 많은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힘 있는 깡패나 군대, 폭력지배집단이 지배하는 국가예요. 난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눈을 뜨게 되지 않았나 싶은데 어림 없는 것 같아. 거대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신문, 수구가 지배하는 신문이 사회의 평화적 생존에 역행하고 있어. 그건 선전 ‘삐라’(유인물)야.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 피지배자들의 두뇌를 마비시키는….”

-CNN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76%는 이라크 군비가 미국 경제난 중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답했습니다.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임하면서 (취임하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조언했어. 미국이라는 국가는 군대를 지탱하면서 돈을 버는 군수산업체들의 합작품이라고.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을 했지. 미국은 전쟁을 안 하면 못 사는 나라야. 그 전쟁을 위해 상시적으로 세계 유수 국가들의 군사비를 합한 규모와 맞먹는 지출을 하니 국내 경제시설, 하드웨어는 다 망가지지. 금융 제도도 저렇게 됐고. 군사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금융적으로 채무국가가 아닌가. 빚투성이 국가야. 말하자면 덩치는 크고 막강한데 실제 이것을 움직일 만한 건전한 정신적·육체적 기능은 다 무너진 거지.”

-한국 신문이 ‘신문다운 신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울 거예요. 미국의 노예 상태로 있는 한. 지금 이라크 상황도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네오콘들의 계획에 따라 남한의 언론 지식인, 사회적 지도층을 미국식 처리 방향으로 세뇌하고 있어. 남북 문제도 마찬가지야. 그 예산을 ‘데모크라틱 펀드’라고 하지. 의회 승인을 얻어 3~4년 전 300만달러를 남한에 들여왔어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국이 전세계 약소국가들의 노동운동, 좌파 단체, 혁신세력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그런 돈을 썼어. 그때 미국 대사가 공언했지. 그 결과로 가장 폭력적인, 다시 말해 미국의 식민지 제국주의 정책에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그런 세력들을 내부에 만들어 낸 거지. 미국에 유학한 많은 지식인들,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최상에 있는 부류들이 미국 숭배의 기본적 체험에 마취당하고 있는 거지. 이명박 정부의 주요 세력, 각료, 인수위원회를 지휘했던 숙명여대 총장…. 전 국민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한다니 큰 문젯거리야. 미국의 사회, 문화, 교육, 돈, 경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을 전부 미국화하기 위한 노력이지. 뉴스에 무슨 영어교육 광란증 같은 문제를 놓고 이명박이라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정부 주요 인사, 매스컴, 지식인, 학부형 자신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 것을 보면서 맹자의 말이 생각나. 무릇 남이 나를 업신여길 때는 내가 먼저 나를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나를 업신여긴다. 어느 가문이 기울 때에는 그 가문의 형제들이 밖에서의 업신여김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이 스스로 그런 후에 남이 자기 가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먼저 그 백성이 스스로의 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그 연후 남이 그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뼈아프게 반성하고 자기는 어떤가 스스로 뼈아프게 비판해야 내일이 있지 않나 싶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사회적 책임)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때입니다.

“난 영어 몰입교육 논란을 보면서 꼭 영어를 다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요. 난 1960년대에 5개 국어를 했어요.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한국어. 언어라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를 지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언어는 그 인간의 철학, 사상, 문화, 심리, 정서 이런 것들을 지배하게 돼. 언어는 단순히 수단이 아니지. 의사 표시와 회의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에 지배 당하는 것이니까. 언어라는 것은 음의 발성학적 구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 언어를 만들어내고 사용한 민족의 역사적 배경, 그 언어가 지금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의 사회·인간 경험의 총체, 내포하고 있는 철학, 심리 이런 게 언어 속에 들어가 있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언어를 실용주의의 도구로 착각하는데, 그게 자기에게 돌아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정하지. 재미나는 건 한국 사람이 미국 가서 노동을 하고 아르바이트할 때 영어를 모르면, 영어 하는 미국인들을 뭔가 우수하고 탁월한 족속으로 생각한다 말이야. 노동판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들에게 지배받는 거지. 그러다보면 ‘아, 난 이들에게 지배당하는 민족이구나’라고 생각해. 그 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절박한 욕구와 이런 것이 패배의식, 자기모멸 이런 걸 만들어 버리지. 우리 사회를 보세요. 전부 미국 미국 하면서 미국인을 보면 뭔가 우리 한국인보다 월등한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고 그 밑에서 어쩔 줄 몰라해요. 그것이 커지면 자기 민족, 문화, 국가, 국민적 자존심을 다 버리게 되지. 지금 우리에게 뭐가 있나. 군사력이 막강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데 우리 군대는 우리 군대가 아니야. 이제 북한이 전쟁할 상대가 되나. 우리가 자꾸 미국 무기를 사고 군대를 늘리고 하는 것은 미국과의 공개 조약이나 비밀 협정을 통해 한국의 군사력이 미군의 용병으로 쓰이게 돼 있기 때문이야. 남한의 군사력을 마치 남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무력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 목적으로 쓸 데가 없어. 앞으로 미국이 동북아에서 중국과 싸워야 하는데, 그 때 남한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지요. 미국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안됐지만 거의 절망적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슨 기능적인 지식인을 지식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어떤 보편적 인류·사회에 대한 생존적 가치를 위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언론인이라고 하는 신문 만들고 방송하고 그런 사람도 지식인이지. 그런 걸 생각하면 퍽 실망스러워.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을 보기 힘들다는 게 더 문제지.”

-‘폴리페서’(정치에 뛰어든 대학교수), ‘폴리널리스트’(정치에 뛰어든 언론인)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포괄되는 개인이 여러가지 기능에 종사할 수는 있지요. 자기의 지식을 이용해서. 다만 그때의 지식인이라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닌 기능적 지식인일 뿐이야. 시장경제와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적 생활양식, 미국적 가치관에 푹 젖어버린 지식인에게 (올바른) 행동양식을 기대할 수 있나. 무한경쟁에서 이긴 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로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이나 상호 부조, 평화와 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가 가능하겠나.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형태의 사회 규범 속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이 미국식 지식인이 되고 말아요. 지식인을 기대하려면 미국식 개인주의·물질주의·이기주의 등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 있어야 해요. 미국식 자본주의의 물질 생산에 치중하는 환경 파괴나 비인간적 생존 양식, 이런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거든. 지식인들이 자기희생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늘 10개 먹는 것을 5개만 먹고 오늘 10가지 즐기는 것을 5가지만 즐기고, 이렇게 해야 그에 필요한 물품 생산이 줄어들고, 자연을 덜 파괴하게 되지. 자전거를 타는 풍습을 일반화하면 휘발유 수입을 덜하고 공기 오염도 덜하지. 모든 문화에서 그래요. 점점 사치화하고,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거, 더 예쁜 거, 더 편한 거 이런 물질주의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경제가 돌아간다는 사회 자체가 문제인 거지. 북유럽만 해도 안 그래요. 거기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있었거든. 북유럽에는 100년 넘는 사회주의 전통이 있어요. 물질도 소중하지만 인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자연을 생각하고, 조화의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이 오랜 사회주의적 사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얼마나 잘 이뤄지나요…. 세계에서 보건, 의료 등 복지·행복을 위한 지출과 정책이 제일 뒤떨어진 게 미국이라고 했지만 이제 우리 의료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 아니에요? 우리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교육, 가치관과 정당, 이것이 떳떳하게 우리 국민 생활의 당연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때 변화가 올 겁니다. 제도적·사회적·사상적으로 물질주의와 균형을 이루게 될 때 훨씬 나아지겠지요.”

-언론인으로서 무엇을 가장 갖춰야 할까요.

“첫째,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외무부에 출입하던 시절 무슨 정책이 나오면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먼저 빌렸지. 둘째로는, 인간적인 성실성을 갖춰야 해요. 기자라고 거들먹거리고 그러면 안돼요. 그리고 검소하게, 가난하게 사는 데 만족해야 돼. 돈이 흔해지면 권력에 붙게 마련이니까.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법권력… 이런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해요.”

-티베트의 독립·자치 요구가 높습니다. 티베트와 중국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요.

“내가 국제부장 할 때처럼 소상한 움직임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달라이 라마의 제안이 좋은 것 같아요. 일정기간 동안 자치를 하면서 새로운 방법이 창출될 수도 있지.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를 연상케 해. 이번에 달라이 라마를 보고 간디를 연상하면서 비폭력 평화, 이 도덕주의적인 평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티베트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중국에 대항하라고 선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게 좋은 해법이겠나.”

-리 선생님의 저서 가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우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영향이지. 자꾸 오른쪽으로만 날개를 펴려고 하는 거지. 노동자 시위를 엄단한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사회 모순이 커져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올 거야.”

-저서에 대한 인세는 계속 들어오는지요.

“내 인지세는 이제 다 끝났어. 지금은 거의 없고. 내 인세가 제로가 될 때가 내가 기쁠 때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이 사회가 리영희의 주장을 다 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험이 없다, 그게 내 삶의 신조야. 감투 쓰고 나서 자기 아니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학계·정치·언론계 모두, 그런 인간들이 멈출 줄 모르는 것이거든. 우리 동양철학이 중요한 점은, 삶의 지혜 즉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가르침을 준다는 거야. 노자의 가르침이 얼마나 좋아. 내가 할 것은 이 정도면 됐다, 스스로 자기 역할과 능력에 대해 이제 그만하면 됐다, 더이상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청산과 무릉도원에 사는 것 아닌가.”

〈 글 | 오동근·사진 |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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