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 늘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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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york Bronx의 한 식당에서 Sollozzo를 쏴 죽이는  Michael의 눈빛을 잊을 수 가 없다. 이처럼 영화가 준 강렬한 이미지가 지배적인 상태에서 '대부'란 책을 다시 볼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영화 속의 각 장면들이 글로써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책을 다 읽었다. 아주 재미있게... '대부'는 잘 쓰여진 상업소설이었다. 소설의 목적 중의 하나가 흥미있는 이야기 전달이라면, 이 소설은 그 목적에 충실한 책이다.

마치 영화가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 이 소설이 쓰여진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장면들을 염두해 두고 읽다보면 시나리오를 풀어 놓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영화가 이 소설에 충실했다는 뜻이겠다.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영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라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즐기고 있다는 흔치 않은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단, 소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Johnny Fontane의 Hollywood 이야기가 영화 속에는 거의 포함되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여담을 말하자면,  Johnny Fontane은 대부인  Vito Corleone의 대자(代子)이자 유명 가수이다. 후에 Corleone 패밀리의 도움으로 영화 제작자로 대성공을 거두는 인물로 나오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Frank Sinatra가 Johnny Fontane이라는 인물을 두고서 저자인 Mario Puzo에게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작품 후기에 실려 있는데, 그러고 보니 Johnny Fontane과 Frank Sinatra는 비슷한 점이 많네.

영화에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소설을 통해 더 잘 알게 된 것들이 있다. 패밀리의 고문(Consiglierie,콘실리에리)을 맡고 있는 Tom Hagen이 Corleone 패밀리에 들어오게 된 사연과, 자신의 능력이 전임 고문인 Genco Abbandando보다 못함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속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마피아 패밀리의 중간보스라고 할 수 있는 카포레짐(Caporegimes)에 대한 개념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인 Vito Corleone가 젊은시절, 이탈리아산 올리브유 수입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동업 친구들이 후에 패밀리 고문이 되는 Genco Abbandando, 마찬가지로 후에 카포레짐이 되는 Clemenza, Tessio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게다가 영화에서, Tattaglia 패밀리를 찾아 갔다가 그 일당들과 Sollozzo에 의해 죽게되는  Luca Brasi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물인지 소설에서는 아주 잘 표현되고 있다. 소설을 읽고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이  Luca Brasi라는 인물의 잔인함과 그의 대부를 향한 확고부동한 충성심이 가장 흥미로웠다.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Luca Brasi가 죽는 것만 나오지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좀 세부적인 것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큰 재미를 느꼈던 점이 있다. 소설을 본 후 다시 한번 꼼꼼히 영화를 보고서 알게 된 사실을 소개하겠다. 대부는 앞서 밝혔듯이 청년시절 이탈리아산 올리브유 수입업을 하여 성장기반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 올리브유 수입회사 이름이 다름 아닌 'Genco'다. Genco라는 이름은 그의 동업자이자 자본을 대 주었던 Genco Abbandando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소설적 배경을 알고서 이젠 영화를 보자. 영화 초반부다. 마약 사업을 같이 하자고 Corleone 패밀리와 협상하기 위해, 터키 출신인 Sollozzo는 한 허름한 건물 앞에서 택시를 내린다. 이 때 그 건물의 간판을 봐야 한다. 글자만 벽에 붙어 있는 형태의 간판인데, 거기에는 'Genco'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배경 지식이 없이는 이 간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도 전에는 그냥 지나친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서  Corleone 패밀리가 아직도 이탈리아산 올리브유 수입을 하고 있고, 이 수입업이 그들 패밀리의 합법적이고 표면적인 사업인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영화를 감동적이게 본 분들이라면 다시 한번 책을 읽어 보아도 그 시간이 그리 아깝지는 않다고 느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탈리아 이름이 꽤 멋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위 글을 쓰면서 그 느낌이 나도록 이름들을 알파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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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2003년 4월 12일  조선일보

“선생님, ‘인생성공 단십백’이 뭔지 아세요?” 학생이 물었다. 모른다고 답하자 학생이 말한다. “한 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래요. ”

나는 재빨리 내 삶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따져 보았다. 한 명뿐 아니라 운 좋게도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까지 훌륭한 스승들을 여럿 만났고, 책읽는 게 업이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백 권 아니라 이백 권도 더 댈 수 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열 명의 진정한 친구’는 좀 무리이다.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함석헌 옹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말한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 사람,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오,’ 하고 머리를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니오, 가지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적이 없고,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를 내놓기는커녕 더욱 움켜쥐고 남보다 조금 더 앞서기 위해 죽기살기로 뛰면서 주위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 없이 살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아동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1885’은 헤밍웨이가 “모든 미국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나왔다”라고 단언할만큼 19세기 미국문학의 최대걸작 중 하나이다. 집도 절도 없는 13세 소년 헉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행실이 천한 악동으로 여겨져서 동네 어머니들에게는 눈엣가시요, 아무런 구속없이 자유로우니 동네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주정뱅이 폭력꾼 아버지를 피해 미시시피강의 섬으로 도망간 헉은 그곳에서 가족을 찾기 위해 도망친 이웃집 노예 짐을 만난다. 짐의 추적자들이 닥쳐들자 둘은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노예제도가 없는 주로 도망가기로 한다.

뗏목 여행 중 강가의 마을에 들르며 헉이 경험하는 바깥세상은 위선과 타락,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위험을 겪으며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과정에서 헉은 동물처럼 취급받는 노예 짐으로부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가족애를 느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늘 노예가 도주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죄의식이 있다. 사회인습으로부터 얻어진 편견과 자신의 순수한 동정심과 정의감 사이에서 헉은 괴로워한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책의 후반부에서 사기꾼들이 짐을 몰래 팔아 넘긴 것을 알고 헉이 짐을 구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짐의 소재를 짐의 소유주에게 알릴 것인가 하는 지독한 고뇌에 빠지는 데 있다. 주위로부터 위선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강요받은 헉에게 짐을 구한다는 것은 아주 사악한 일이요, 문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질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헉은 짐의 주인 왓슨 양에게 편지를 쓰지만, 친구 짐이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고 분연히 편지를 찢으며 말한다.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는 게 나아!” 결국 헉은 자신이 금방이라도 지옥불에 빠질 것을 각오하고 짐을 구하러 나선다.

사회인습과 기성도덕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주제로 하지만, 이 책의 진수는 짐에게서 참으로 소중한 ‘그 사람’을 발견한 헉의 도덕적 승리이다.

이제 내 삶의 중턱을 훌쩍 넘어버렸는데, 나는 “마음이 외로울 때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한 사람”을 가지는 게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높고 편한 자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여지껏 모르고 살아왔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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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오만과 편견

2004년 4월 24일  조선일보

미국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집에 오면 늘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자니라는 아이에 대해 말했다. 친구는 자니가 어떤 애인지 궁금했다. 어느 날 함께 산책을 하는데 아이가 외쳤다. “엄마, 저기 자니가 오네요, 저 애가 자니예요!”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오고 있었다. 친구가 “어느 쪽 아이? 흑인 아이, 아니면 백인 아이?” 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아이가 흑인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빨간색 자전거 탄 아이요, 걔가 자니예요. ”

친구는 말했다. 아이 눈에는 흰 얼굴, 검은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빨간색 자전거가 더 신기하고 눈에 띈 모양이라고. 피부 색깔로 사람을 구별하고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른들이 갖는 편견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편견’이라는 말은 내 개인적 소견이나 편의대로 남의 겉모습, 첫인상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경우이다.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1813)도 사실은 그녀가 젊었을 때 ‘첫인상’이란 제목으로 습작했던 작품을 후에 개작한 것이다.

영국 하트포드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가에는 다섯 자매가 있는데, 그중 위의 두 명이 혼인 적령기를 맞고 있다. 아름답고 온순한 맏딸 제인에 비해,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지적이고 총명하다. 자칭 ‘성격연구가’인 엘리자베스는 근처에 새로 이사온 젊은 신사 빙리의 친구 다아씨의 첫인상만 보고 신분만을 내세우는 오만한 남자로 생각한다. 다아씨는 활달하고 재기발랄한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엘리자베스는 편견으로 다아씨에게 반감을 갖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과 집안 문제에 부딪히면서 엘리자베스는 결국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다아씨가 너그럽고 사려 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아씨는 빙리와 제인의 결혼을 주선하고, 이어 다아씨와 엘리자베스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두 자매의 결혼 성공담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 작품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전개하는 절묘한 구성과 함께 정교한 문체,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성격묘사로 영문학의 백미에 속한다. 그러나 결국 ‘오만과 편견’에서 오스틴이 다루는 주제는 어떻게 한 사람의 편견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고, 그 편견이 사라질 때에야 진정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편견’이라는 말은 으레 ‘장애인’에 연결되는 적이 많다. 장애인주간을 맞아 언론에서 서로 질세라 떠드는 ‘장애인에 관한 편견 타파!’라는 홍보성 슬로건 뒤에 숨은, 작지만 의미 있는 선거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전교어린이회장선거 이야기이다. 청각장애 2급의 태민이가 후보로 나설 때 어머니는 혹시나 태민이의 장애가 놀림거리가 될까봐 반대했지만, 반 친구들이 찾아가 “태민이가 못하는 것은 저희들이 도울 테니 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설득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달변으로 말할 수 없는 태민이는 단지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겠습니다’라는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당선이 됐다. 다른 네 명의 후보자들도 선거운동 기간 내내 태민이의 장애를 약점으로 거론하는 등의 치사한 일은 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자꾸 ‘오만과 편견’의 표피만 키워 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나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사는 어른들에게, 얼굴 색깔보다는 자전거 색깔을 보고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마음을 들을 줄 아는 아이들의 반듯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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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이 세상의 파수꾼

2003년 8월 30일  조선일보 

어느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새 자전거를 닦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했다. 아이는 자전거 주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아저씨, 이 자전거 비싸요?” 그러자 자전거 주인이 대답해 주었다. “아니, 이 자전거는 우리 형님이 주신 거란다. ”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부럽다는 눈치로 “나도…”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자전거 주인은 당연히 아이가 자신도 그런 형이 있어서 이런 자전거를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도 그런 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동생은 심장병이 있는데,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여요. 나도 내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주고 싶은데요. ”

동생을 사랑하는 그 아이의 착함도 착함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른과 아이의 생각의 차이를 본다. 자전거 주인이 아이의 생각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것은 늘 무엇인가를 남으로부터 획득해서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어른들 생각의 자기투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이런 어린아이의 열린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나만의 성을 쌓아가며 하나씩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과정인 듯하다.

지난 26일자 어느 일간지에는 “장애인 학교의 직업교육 시설 이전 계획에 반발한 서울 Y초등학교 학부모들이 개학 첫날인 25일부터 다시 학생들의 무기한 등교거부에 나섰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서울 맹학교 시설이 낡은 데다 그 지역이 건물을 증축할 수 없는 풍치지구여서, 맹학교의 직업교육 시설을 Y초등학교 안 일부 부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던 바 있다”는 짤막한 기사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등교하는 학생들까지도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서 가로막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니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무조건 싫은 것이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무심히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어른들의 닫힌 마음으로 아이들의 열린 마음까지 꽁꽁 걸어 잠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J D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소위 ‘문제청소년’인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세 번째로 옮겨간 고등학교에서 다시 퇴학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흘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1인칭 소설이다. 홀든은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오염된 현실세계를 경험하고 지독한 상실감을 맛본다. 사흘 동안 만난 사람들도 한결같이 위선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기성세대이다. 홀든은 인간 불신의 원인은 언어 자체라고 생각,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한적한 숲 속에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여동생 피비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에서 구원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은 대답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재미있게 노는 꼬마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고 어른은 나밖에 없는.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그러나 결국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 끝에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을 지켜주는 것은 피비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보지 못하는 학생들 가까이에서 공부할 수 없으니 학교에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을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이 세상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누구나 조금씩의 모자람, 불편함을 갖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곳이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까. 사랑과 친절은 부메랑 같아서 베풀면 언젠가는 꼭 내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 살아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장영희·서강대 영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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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진정한 위대함

2002년 1월 5일  조선일보

20세기 미국문학 시간에 단골로 읽히는 소설 중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있는 작품은 단연 스콧 피츠제랄드 (F Scott Fir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이다. 주제가 무겁지 않고 영어 문체가 비교적 쉬운데다가 무엇보다 학생들이 동감할 수 있는 ‘연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히기 전에 나는 학생들에게 제목에 있는 ‘위대한’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은 어떤 속성을 말하는가? 그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해 학생들은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부, 명예, 권력에 개의치 않고 이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 등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작가 피츠제랄드가 생각하는 개츠비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작품의 화자 닉은 중서부에서 뉴욕으로 와서, 롱아일랜드 교외에 자그마한 집을 빌려 산다. 그의 이웃에는 거부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개츠비의 저택이 있고,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개츠비는 군인시절 만났던 부잣집 딸 데이지와 결혼을 약속하나 그가 떠나간 동안에 그녀는 톰 뷰캐넌이라는 재벌과 결혼한다. 개츠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에 확실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밀주업으로)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 그녀의 집 가까이에 저택을 사들이고는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언젠가 데이지가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꿈꾼다.

우연히 닉이 데이지와 육촌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 개츠비의 부탁으로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재회를 주선한다. 5년 만에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는 그녀가 이제 부자가 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뉴욕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운전하던 개츠비의 차가 톰의 정부(情婦)를 치어 죽이고 달아나자, 개츠비가 차를 몰았다고 생각한 그 여자의 남편은 개츠비를 찾아가 사살한다. 데이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과 여행을 떠난다. 성황을 이루었던 개츠비의 파티와 달리 닉 외에 겨우 한 명의 손님만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 끝나고 닉은 환멸을 느끼고 다시 중서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를 사랑한 개츠비의 삶은 결국 가엾고 허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속성을 개츠비에게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떠나간 사랑을 돈으로 찾겠다는 단세포적 발상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불법축재자였으며, 이미 흘러간 과거를 되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 비현실적 몽상가였고, 사랑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아적 낭만주의가였을 뿐, 결코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피츠제랄드는 책의 첫부분에서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아무리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삶 속의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사랑에 실패해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삶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20년대 혼돈의 시대, 미래에 대한 이상을 찾는 ‘아메리칸 드림’이 꿈과 낭만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와 퇴폐주의로 타락해가는 시대에 개츠비의 순수한 꿈, 순진무구한 희망은 하나의 ‘위대함’이었던 것이다.

2002년… 우리에게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새 해이다. 삶의 횡포, 혼돈의 시대에 이리저리 채이고 휘둘려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한 번 희망을 꿈꾸는 개츠비의 위대함이 새삼스럽다. 젊고 순수한 우리 학생들이 꿈꾸는 ‘돈과 권력, 영웅심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진정한 위대함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새해였으면 좋겠다.

/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미 보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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