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8년 02월 13일 자에서 퍼옴

[김우창 칼럼]자기가 선택하는 삶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시 ‘외면적 삶의 노래’는 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 인생에 대하여 심금에 닿을 만한 관찰을 담고 있다. 사람의 삶에는 방황과 고독과 고통 또 기쁨과 열매가 있으나,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저런 많은 것을 보아서 의미가 있나?” 하는 물음들이 일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대로 깊은 느낌의 어떤 순간이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래도 ‘저녁이군’ 하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호프만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하나의 말-깊은 뜻과 눈물이 흐르는 이 하나의 말”로부터 “마치 벌집 구멍으로부터 진한 꿀 흘러 내리듯” 감미로움이 흐를 수 있다.

저녁은 해의 밝음이 가고 밤의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명암의 교체만으로도 저녁은 특별한 감흥을 준다. 또 이 감흥에는 더욱 지적인 인식이 스며 있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끝이다.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감흥과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외면화된 삶에서 귀중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내면성의 깨달음을 분명히하는 것이다.

외적인 순응만 강요된 사회
‘외면적 삶의 노래’는 노년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호프만스탈이 이 시를 쓴 것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였다.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빈의 심미주의적 시풍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감흥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마음 깊이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겠다는 그의 젊은 시절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법학 공부를 하던 호프만스탈은 이 시를 쓸 무렵 문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시에서의 내면성의 강조는 그럴싸하게 들리다가도, 시인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현실 삶의 도피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내면이 없는 외면이 맹목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외면이 없는 내면도 공허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외면적 삶에 중요성을 두는 경향이 있는 만큼 내면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동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삶은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바깥세상에서 살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개인의 삶의 문제를 떠나서,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도 창조성의 근거를 잃고 무엇보다도 안정의 바탕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과 밖이 맞아 들어가는 삶이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젊은 시절은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의미를 실현해줄 삶을 추구하다가도 대개는 사회의 요구에 타협하면서 안착점을 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젊은 시절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교육제도 그리고 대학 입시제도의 혼란도-사실 또 많은 사회 문제도--깊은 근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외면화된 우리의 삶의 방식에 연유하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로 오랫동안 계속되던 대학 선발 절차가 마감된다. 말할 것도 없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입학은 되었지만 원하지 않는 대학에 입학이 된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새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할 사람도 있다. 원하는 대로 된 사람에게는 축하의 말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입시제도의 난관을 겪는 모든 젊은이들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제도에서, 대학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데에는 수문장이 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문장이 내놓는 물음과 지원자의 답이 맞아들어 가야 한다. “열려라, 참깨!”라는 암호를 발견하는 데에 학생들은 수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원서를 내기 전의 1년 또는 2~3년일 수도 있고, 요즘 추세로 보면 유치원을 들어갈 무렵부터 수문장이 내어놓을 법한 암호들을 익히는 데에 긴긴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은 얼른 생각하기에는 일류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류대학의 교육이 참으로 이류와 다른가? 교육의 내용의 높고 낮음은 교수와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시설에 달린 것일 터인데, 참으로 이러한 항목들에서 일류와 이류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일류, 이류, 삼류 하는 말들이 시사하는 차이가 크다고 상정하더라도, 대학 지망생이나 그 부모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고 난 결과 일류대학을 선택하는 것일까? 대학을 가까이 돌아본 사람이면, 차별화해서 이야기되는 대학들에서 받는 교육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일류, 이류에 따라서 학문이나 사회봉사 활동에서 교수들의 수준이 반드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난다고 하여도 학부 학생들의 수용 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대학의 선택이 참으로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는 대학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다. 전공이나 학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싶은가는 중요치 않다. 어느 단과대학, 어느 학과가 나를 받아주고, 나중에 어느 이름 난 직장에서 나를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직장서 선택 당하는 현실
내가 원하는 공부가 어떤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바른 판단의 한 요소는,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게,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서 절실하게 느끼는가-이에 관련하여 마음 속에 들려오는 부름을 아는 일이다. 심증이 생길 때까지는 방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시험하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하는 방황을 허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인생에서 값진 것은 모두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고름에는, 무엇이 내 마음에 드느냐보다는 무엇이 명품이냐가 중요하다. 아파트를 구하는 데에도 기준은 편의나 보금자리로서의 느낌보다 부동산 시장의 전망이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지위의 명품 가치에 의하여 정해진다. 물론 외면적 사회에서, 이름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준다. 그것은 취직이나 존경이나 사회적 지위와 교환할 수 있는 고가의 어음이다. 그러나 실질과 허상이 교차되는 명품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나는 참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작은 순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하루가 끝난 다음, “저녁이군”하고 저녁의 감흥에 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극히 희귀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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