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서준식 - 운동가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운동가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 서준식

이 책은 사실상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산문집이다. 나는 그 흔한 ‘평론가’도 아니고 ‘칼럼니스트’도 ‘자유기고가’도 아니다. 1988년에 감옥에서 나온 후로 나는 인권운동밖에 모르고 세상을 살아왔고 나에게 ‘인권운동가’말고는 다른 직함이 없었다. 운동가가 자신의 산문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을 좀처럼 보기 힘든 우리 사회에서 나는 이렇게 책을 냄으로써 자칫 운동가가 아닌 ‘글쟁이’로 오해받지나 않을까 마음이 불편하다.

어렸을 때 나는 거의 만능에 가까운 스포츠맨이었다. 일찍부터 땀흘리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의 고통 속에 행복을 발견했던 나는 당연히 글쓰기나 책읽기와는 무관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느새 나는 확실히 단련된 근육이 우리에게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우직함이나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소박함을 선사해준다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가냘픈 팔과 하얀 손으로 글 쓰는 자들을 ‘문약(文弱)’으로 단정하면서 본능적으로 경멸하곤 했다. 일본에서 문필활동을 하는 아우 서경식은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한 자신의 책에서 나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편 워낙 운동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아닌 밤중에 느닷없이 나약한 나를 단련시키겠다며 왕복 4~5킬로는 족히 되는 오무로의 닌나지까지 달리기를 강요하곤 했다. 나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성질나면 곧바로 손이 올라가는 성격이었는지라 반항할 엄두도 못내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어린 시절의 나는 그를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근육 단련은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그리고 점점 뼈아프게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영세한 가내공장 직공들은 거의가 내일에 대한 희망도 인생설계도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며칠 사이에 술과 오입질에 탕진해 버렸고 월초의 일손 부족은 늘 악몽처럼 아버지를 괴롭혔다. 뼈가 다 굵은 아들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알아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형이나 아우는 잽싸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한나절을 보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정말 고마워하시고 따뜻한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진짜 기대는, 고된 육체노동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쳐 버린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 ‘근육’을 단련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지도 못한 채 나는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근육단련 대신 지성 쌓기를 시도했다. 왠지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만 같았던 그때의 쓴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근육 숭배자였던 내가 글쓰기와 친해지게 된 것은 17년의 감옥생활을 통해서였다.
국가권력의 비열한 사상전향공작 앞에서 비겁해지지 말아야 하고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는 당시 나에게 거의 인생목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그곳에서 감행했던 나의 모든 인내와 거부의 몸짓은 십중팔구 단련된 ‘근육’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을 터이다. 수개월 동안 독서 금지조치를 당해도 책을 보여 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끝까지 참았던 나를 당시 광주교도소 전향공작 전담반 요원들은 “성격이 비뚤어질 외고집”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장기간의 독서금지와 편지 쓰기 금지, 그 후에 거의 일상화되었던 차입도서의 마구잡이 불허와 서신 불허는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나의 목마름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쇠창살과 시멘트 담 안에 갇혀 실의의 날들을 보냈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우리들 시대에 바치는 나의 고난의 의미를 확인했고,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편지를 쓰면서 절망적인 고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편지를 쓰는 일은 나의 논쟁행위였으며 고해성사였으며 절절한 기도였으며 또한 즐거운 놀이였다. 곱은 손에 호호 입김을 불면서, 혹은 봉함엽서 위에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손바닥으로 자꾸만 훔치면서 나는 열심히 편지를 썼다.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살아남기 위하여….(<서준식 옥중서한> 야간비행. 20쪽)


그 결과 1988년에 감옥에서 나온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글쓰기’였다. 감옥에서 겪은 많은 것들, 특히 사상전향에 관한 모든 문제를 남김없이 하나의 대하소설 속에 형상화시켜 보고 싶은 나에게 있었다. 출옥 직후부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 혹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발을 들여놓은 인권운동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는 한참동안 글쓰기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어느 봄날, 나는 문득 운동과 글쓰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나의 주변을 봐도 뛰어난 운동가이자 제대로 된 필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김지하나 조영래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한 달 가량 고민한 끝에 아는 얼마간의 아쉬움을 품은 채 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전망을 잃은 운동판에서 ‘운동가’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고 운동을 떠난 상당수 사람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자유기고가’라는 직함을 달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10년 남짓 인권운동에 파묻혀 살아온 나는 이따금 이런저런 매체에 글을 기고하기는 했어도 언제나 나의 본분은 인권운동이라고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인권운동가로 남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글쓰기’라는 외도에 빠져들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따라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대체로 한 가지뿐이었다. 즉 난관에 부딪친 나의 인권운동을 살리기 위하여, 혹은 꺼져 가는 우리 운동에 힘을 불어넣기 위하여…. 물론 쓰고 싶은 여러 가지 주제는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쓰고 싶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모니터 앞에서 끙끙거려야 했고 때로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놓고도 ‘운동적 고려’ 때문에 무참히 도려내야 했다. 때로는 ‘전술적으로’ 내키지 않는 엄살도 떨어야 했으며 때로는 필화(筆禍)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밤중에 글을 쓰다 말고 ‘신변을 정리’한 적도 있었다. 나의 글쓰기는 그저 ‘글쓰기’가 아니라 엄격하나게 나의 인권운동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곧 나의 인권운동이었다. 이것을 고집스럽게 강조하는 까닭은 실제로 내가 운동가로서 운동의 절박한 필요에 따라 글을 써 왔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그릇된 세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운동가(더 정확하게는 ‘활동가’)나 노동자에 비해 일반적으로 지식인, 그리고 그 하나의 형태로 인정되는 ‘글쟁이’들이 부당하게 높은 대접을 받는 병든 사회이다. 험한 밥을 먹고 몸을 소진시켜 가면서 간신히 ‘근육’으로 이 사회의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고 있는 운동가가 글줄이나 하는 지식인이나 글쟁이 앞에서 한결같이 주눅들어야 하는 것이 비뚤어진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새로운 운동가 인구의 보충은 바라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기존의 운동가마저 덜 험한 밥과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기 위해 운동판을 떠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한 4-5년 동안 눈 딱 감고 사법시험 공부나 작가수업에 열중한 후 시험에 합격하거나 ‘등단’할 수 있으면 그들은 하루아침에 그 4-5년 동안을 배고픔과 핍박을 견디며 이 사회의 암흑과 싸워 온 운동가들보다 월등한 사회적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그들의 존재는 지적으로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열등인간’만이 운동판에 남는다는 그릇된 편견을 사회에 만연시키는데 다시 일조를 하면서 운동가들을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로 몰고 간다. 나는 젊은 인권운동가들의 선배로서 이런 세태에 앞장서서 저항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글쟁이’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글을 쓰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권운동으로서의 글쓰기로 일관하고 싶다.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글이 과잉하고 행동이 과소한 시대이다. 범람하는 가지각색의 매체들을 꽉 메우는 글, 글, 글 …. 우리 사회의 글에 대한, 혹은 글 쓰는 자에 대한 동경은 말 그대로 비정상적이다. 상업적인 이유로 계속 부추겨지는 이런 세태 속에서 글쟁이들은 당연히 오만하다. 그들의 글에서 행동하지 않는 부끄러움, 고난 받지 않는 자의 죄책감, 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자의 슬픔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의 글을 무심코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십중팔구 ‘근육’을 경멸하고 ‘입’을 숭상하게 되어 있다. 물론 그들이 현란하게 펼치는 주장 속에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담겨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온갖 레토릭과 해박한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글의 알맹이는 의외로 단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그들이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대충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글로써 주장하는 바를 몰라서가 아니라 행동이 과소하기 때문인 것이다.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글쟁이들은 가끔 이런 주장을 한다. “글쓰기도 운동의 한 형태다. 우리도 운동가다” 그들의 이런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해주고 싶지 않다. 그것을 고스란히 인정해버린다면 누가 고달픈 운동판에 남아 있으려 할 것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운동가(혹은 활동가)가 운동을 하는데 절박하게 필요해서 쓴 글은 운동의 일부이지만 글쟁이의 글은 그저 글일 따름이다. 기껏해야 좋은 글일 따름이다. 좋은 글을 쓰고 호평을 받으면 그것으로 행복해 해야 한다. ‘근육’으로 하는 행동 없이 운동가의 명예까지도 깡그리 차지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고문과 가혹행위의 공포가 가득한 감옥에 몸을 둔 운동가는 말할 것도 없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운동을 조직하고 다니면서도 차비를 걱정해야 하는 운동가, 항상 감옥에 갈 준비를 해놓고 집회에 나가야 하는 운동가, 국회의사당을 멀리 바라보면서 자신이 조직한 고작 2~30명의 시위대와 함께 “악법 철폐!”를 외치다 닭장차에 실려 가는 실의에서 언제나 다시 일어서야 하는 운동가 …. 글쟁이가 자신의 글쓰기와 그들의 삶이 운동이라는 점에서 ‘같다’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오만의 극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글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지나칠 때 그것은 미신이 된다. 즉, 글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위험한 미신일 수 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이나 글쟁이들이 만들어내는 미신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글로써 사회가 변할 만큼 이 사회는 아직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땅 위에 그어놓은 금 안에서만 놀아라!’ 이것이 이 사회의 ‘룰’이며 그 금을 넘어가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진보적’ 글쟁이들의 글이란 ‘금 안에서만 노는’ 글이다.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데는 많은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은 나의 오래된 믿음이다. 나는 체계적인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도 아니고 치밀한 논리를 갖춘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는 현실에 대한 운동가의 고통과 운동에 대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나의 글은 운동가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이상의 가치를 바라는 것은 분명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 번 권유가 있었음에도 책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일상의 활동이 바쁜 까닭도 있었지만 이런 나의 글들이 왠지 초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2001년 8월에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사임하고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적어도 일상의 활동이 바빠서 책을 못 낸다는 핑계는 써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권운동 10년의 결산을 할 필요도 나름대로 느꼈다. 그리하여 결국 농담처럼 오래가던 책을 낸다는 이야기가 진담이 되고 현실화되어 여기까지 와 버렸다.

과거에 모아두었던 원고들을 검토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사과 박스를 뒤졌을 때 나는 ‘참 쓰기도 많이 썼다’는 감개를 금할 수가 없었다. 칼럼은 물론이고 성명서, 진정서, 보고서, 토론 기록, 강연 원고에다 논문 흉내를 낸 것까지…. 나는 내가 과거에 쓴 글들을 정리하면서 세상에 상품으로 내놓을 이런 책 따위에 실을 글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인 활동의 결과물인 글들이, 운동가의 땀과 눈물 어린 고된 활동의 결과물인 글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물론 나는 그런 글들을 이 책에 싣지 않는다. 실어봤자 ‘재미’있는 글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상품’으로 다가가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활동가의 글들은 단지 상품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재미’없다는 이유로 햇빛을 보지 못한다. 이는 사회가 경박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나는 나의 후배활동가들이 만들어낸 그 훌륭한 운동의 결과물 대신 나의 잡문들이 책으로 출판되는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 책이 나의 후배 활동가들이 진보주의와 인권운동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심화시키는 디딤돌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이 이 사악한 사회에서 일상의 삶에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이 책을 보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곧 나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게 될 내 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03년 1월 30일
명륜동 작업실에서
서준식


사랑하는 보슬이, 혜수에게 아빠의 세 번째 편지

잘 있었니? 너희들이 아빠에게 쓴 편지는 다 받아보았다. 얼마동안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던 것은 너무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날씨가 너무 추울 때, 손을 내놓고 있으면 손이 금방 차가워지고 손가락이 굳어져 말을 안 듣게 된다.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면 편지를 쓸수가 없잖니? 오늘은 조금 덜 추워서 이렇게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는 거란다.

너희들은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는지? 언니가 기침도 하고 많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무척 걱정했다. 이젠 괜찮은지? 자전거도 못 타고 놀이터에서 놀지도 못 하고 집안에 들어박혀서 지내겠지만, 가끔은 엄마께 말씀드려서 용감하게 밖에 나가 뛰어놀기도 해야한다. 추위에지지 않는 씩씩한 아이가 되는 연습을 많이 하면 너희는 나중에 커서도 어려움에지지 않는 씩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빠는 너희들이 예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씩씩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다.

아빠는 추위를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있다. 아침에, 아직 캄캄한 아침에 복도에서 아빠를 지키는 무서운 아저씨가 “기상!”하고 소리를 지르면 아빠처럼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은 따뜻한 이불에서 나와야 한다.(‘기상’이라는 말은 ‘일어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춥다. 온돌이 아니라 마루니까 춥다. 난로도 없고 창문에서는 바람이 쌩쌩 들어오니까 되게 춥다. 그래도 아빠는 추위를 이기는 씩씩한 사람이고 싶으니까 일어난다. 이불을 개고 발가벗고 변소에 들어가 차디찬 물로 세수하고 그 물을(이빨 악물고) 몸에 끼얹는다! 몸을 닦고 방에 들어와 운동을 한다. 한참 운동을 하면 몸이 조금씩 따뜻해져 온다. 이렇게 아빠는 아침추위를 이기는 것이다.

제일 싫은 것은 아침 똥누기다. 왜 그러냐 하면 추운데 엉덩이를 내놓고 있으면 엉덩이가 금방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고 아프거든. 그래서 똥을 눌 때는 바지를 내리고 앉자마자 ‘뿌지직!’하고 얼른 한 덩어리 쏟아 버리고 잽싸게 닦고는 바로 바지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아빠는 이 일을 이제 퍽 잘하게 되었다.
하루 중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물론 너희들 편지를 받을 때지만, 편지가 안 오는 날에는 더운 물을 받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마시는 물이라고 해서 플라스틱 병에 더운 물을 담아주는데,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담아 준다. 아빠는 이 물을 마시기도 하지만 이 물이 담긴 플라스틱 병을 계속 끌어안고 있다. 배에다 대면 배가 따뜻하고 볼에다 대면 마치 너희들과 볼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고 행복해진다. 아픈 허리에다 대고 있으면 허리가 덜 아픈 것 같고, 양말 벗고 발가락에다 대면 얼었던 발가락이 살살 녹는다. 정말 물병은 아빠의 사랑스런 친구다.

보슬아!
이제 편지도 너무너무 잘 쓰는 언니가 되었구나! 너의 편지를 아빠는 자꾸만 꺼내 보고 또 보고 한다. 편지를 읽어 보니까 엄마를 도와드리고 동생에게 양보하는 착한 보슬이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책을 많이 본다는 편지를 읽고 놀랐다. <김구>, <선덕여왕>, <아사달과 아사녀>, <온달과 평강공주> …. 아빠가 여기에 다 못 쓸 만큼 많이 읽었구나! 아빠가 못 읽은 책도 있었구나! <나라를 사랑한 박제상>, <김현과 호랑이>, <김유신과 상자 속의 쥐>는 아빠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 보슬아,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아빠에게 들려주려면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어야겠지? 어떤 내용인지, 그걸 읽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언젠가 아빠에게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 생각을 하면 책이 더 재미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책 속 이야기도 오래오래 너의 머리 속에 남게 되고 너는 생각이 깊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밥을 먹을 때 잘 씹으면 밥이 맛있고, 너의 몸이 건강해지고 그리고 몸도 얼굴도 예뻐지는 것과 같다.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100점을 못 받고 두 개 틀렸다는 이야기 들었다. 100점 받고 아빠에게 자랑하려 했는데, 얼마나 실망했을까? 하지만 괜찮아! 두 개만 틀린 것도 아주 잘한 거니까. 아빠는 100점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건 착한 마음을 가진 서보슬이니까!

혜수야.
엄마는 혼자서 아빠 만나러 와서 뭐든지 다 이야기 해 준다. 그래서 어저께는 혜수가 받아쓰기대회에 나가 너무 잘해서 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는 봄에 일기를 잘 쓴다고 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네가 언니처럼 상을 받는구나! 아빠에게 쓰는 편지, 하나도 틀린 데 없이 잘 쓰는 걸 보고 아빠는 네 가상을 받을 줄 알았다.
편지에 퀴즈를 썼지? 그런데 너무 어려워서 아빠는 한 개밖에 못 맞췄다. 아빠가 맞힌 것은 2. 무왕의 어렸을 적 이름 - 서동이고 나머지는 하나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걱정이다. 혜수가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하면 아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말이다.
옛날에 있었던 일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는데, 옛날 일이 생각날 때마다 일기장에 써 보면 어떨까? 일기장에 쓰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일기장에 쓴 것을 나중에 읽으면 다시 옛날 일이 쉽게 생각나서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빠가 여기서 나가면 아빠에게도 옛날에 있었던 일을 많이 이야기해 다오.
아빠 편지를 볼 때마다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아빠 보고 싶어서? 아빠가 불쌍해서? 아빠랑 헤어져 있는 것이 슬퍼서? 하지만 혜수야, 조금도 울 것 없다. 아빠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씩씩한 사람이다. 너도 아빠처럼 씩씩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는 곧 같이 살게 될 거다. 슬픈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보슬아, 혜수야.
편지란 참 고마운 거다. 아빠는 이렇게 멀리 있어도 너희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편지에 감사하고 싶다. 옛날 아빠와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편지를 무척 좋아했다. 그 무렵 아빠는 아빠 동생들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는데, 쓴 편지를 봉투에 넣기 전에 꼭 그 친구에게 보여 주었다. 그 친구는 아빠가 편지를 너무너무 잘 쓴다고 칭찬해주었고, 그런 편지를 자기도 받아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 친구보다 아빠의 동생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는 편지 쓰지 않고 동생들에게만 편지를 썼다.
하루는 그 친구가 아빠에게 헤어지는 인사를 하러왔다. 편지를 하도 좋아해서 우체부가 되어 아주 먼 시골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먼 시골에서 사람들에게 편지를 갖다 주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메모쪽지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자기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말했다. “너의 편지를 받아보고 싶어. 언제 한 번 편지를 쓰고 이 주소고 부쳐 줘.” 그런데 아빠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아빠는 너희들 엄마를 처음 만나 사랑하게 되어 너희들 엄마 생각만 하느라고 그 친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는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빠는 너희들 엄마랑 결혼했고 보슬이가 태어나고 혜수도 태어나고 정신없이 바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아빠는 동생에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편지를 무척 좋아했던 그 친구 생각이 났다. ‘지금도 시골에서 우체부를 하고 있을까.’ 옛날 그 메모쪽지를 찾아내어 아빠는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니까 아빠는 그 친구에게 그때 처음 편지를 쓴 것이다. 며칠 지나 답장이 왔다. 그런데 그 답장은 아빠 친구가 쓴 것이 아니라 그 친구 부인이 쓴 것이었다. 그 답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편지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주셨어요. 저의 남편은 큰 병을 얻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편지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저의 남편은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매일같이 서준식 씨 이야기를 했습니다. 편지를 너무 잘 쓰는 서준식 씨, 그 사람 편지를 한 번 받고 싶다, 라고요.”

보슬아, 혜수야.
편지는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편지로 아주 멀리 있는 사람하고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 친구에게 사과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쑥스러워 못할 때 우리는 편지지에 “미안해!”, “널 사랑해.”라고만 써서 부치면 된다. 그리고 어쩌면 편지는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힘과 희망을 줄 수도 있고 힘들어 울어 버리고 싶은 사람을 편안하게 웃겨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아빠는 너희들 편지 받을 때 행복하고 힘이 난다.
편지를 잘 쓰는 것은 쉽다. 편지 쓰기 전에 한번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서 그 자기 생각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다 써버리는 것이다. 또 학교나 집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이나 좋았던 일을 자세히 쓰면 되는 것이다. 아빠는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기지 말고 솔직히 그리고 자세히 쓰려고 하다 보니까 똥 누는 이야기나 죽은 친구 이야기까지 해 버렸다.
그리고 책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은 편지도 잘 쓰게 된다. 책을 많이 읽어라. 뭐가 쓰여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어라. 때로는 책에 멋있는 말이 있으면 그대로 편지지에 옮겨 써도 된다.
문방구에서 예쁜 편지지랑 편지 봉투도 사고, 우표 파는 데가 어딘지, 얼마짜리 우표를 붙여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가 쓰고 싶을 때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범준이나 이경이에게도 미국에 있는 찬제, 신영이에게도 편지를 써 보자!
편지 만세!

1997년 12월 6일
항상 너희들을 생각하는 아빠가 씀


*1997년, 제2회 인권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상영작에 대한 모든 국가검열을 거부했다. 검찰은 상영작 <레드 헌트>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하는 한편 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준식을 국가보안법 위반을 비롯한 다섯 가지 죄명으로 기소했다.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서준식은 두 딸에게 여덟 통의 편지로 아빠의 마음을 전했다. 이 편지는 그 중 세 번째 것이다.

서준식

1948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조선놈’이 되기 위하여 한국에 유학해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형 서승과 북한을 방문하였다가 1971년 이른바 ‘유학생 간첩단’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쳤지만 ‘사람의 생각은 누구도 규제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10년 동안 보안감호처분을 받았다. 1988년 5월 비전향 좌익수로는 처음으로 석방되었다. 도시 빈민들과 어울려 살며 글쓰기를 하려 했으나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과 만나면서 인권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꾸려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운동단체로 이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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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특별기획/ 알뛰세르와 해후의 미스테리

진보평론 제11호
다니엘 벤사이드 Daniel Bensaid (파리 제8대학교 철학과 교수)


* 홍태영(서울대강사, 정치학)역

이론적인 면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면에서 루이 알뛰세르의 비장한 궤적은 한 시대의 격랑을 잘 보여준다. 구조주의의 압제에 굴복했다는 의심을 받는 그는 사후의 텍스트들 속에서 “해후의 내밀한 유물론”의 사상가로 나타난다. 갱도의 막장까지 깊숙이 파헤친 천재적인 후기의 알뛰세르는 봉쇄된 미래와 희망의 소멸에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1985년, 그의 죽음은 빈번히 당혹감과 경외심이 혼재되어 표출되는 계기였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와 「공산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주)이란 글과 더불어 단절로 마감된 갈등의 세월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변절로 굴절되었으며 일부는 차별화 내지 흔히 정반대 노선을 추구해갔다. “알뛰세르주의자였던” 사람들에게는 분파적 이기주의에 대한 의심과 “알뛰세르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폄하하는 조롱으로 과거에 일컬어졌던 “알뛰세르주의자”는 솔직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주){{ Louis Althusser, Le 22ème Congrès, Paris, Maspero, 1977. 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 Paris, Maspero, 1979.}}

1965년과 1966년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 읽기』의 출간 당시 이 글에 쏟아졌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양극적 반향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끄 데리다의 증언은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 그의 검열 및 장악력을 잘 설명한다*주). 60년대에 공산당의 무게와 알뛰세르의 개성은 데리다와 공산주의 사이에 막을 형성케 했을 것이다. 비당원으로서, “나의 문제제기가 반공산주의 담론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비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의미심장했던, “늑대의 장단에 맞춘 맞장구”로 이용되는데 대한 우려와 반대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진영의 선택”을 독촉하는데 활용되었던 이러한 우려에 이론적 위협의 효과가 첨가되었다. “나는 일종의 이론주의와 흡사한 어떤 것 앞에서 마비되었다.”

*주){{ Jacques Derrida, "Friendship and politics", in Althusserian Legacy, Verso, Londres, 1989}}

정치적 마비와 지적 마비, 즉 이중의 마비인 것이다.
오늘날 데리다는 이러한 마비를 부재로서 의미를 창출했던 정치적 제스처로 설명한다. “옳건 그르건, 정치적 확신에 의해, 또한 아마도 위협에 의해서도, 나는 맑스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을 포기했다.” 배신의 유령이 기관과 논쟁에 출몰하는 “헤게모니를 위한 그러한 전쟁, 엄청난 위협의 공작과 투쟁이 있었다.” 약간은 테러적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위협을 느꼈고, 편안하지 못하였다.”. “나는 반스탈린주의자였다. 내가 지니고 있는 공산당과 소련의 이미지는 내가 항상 충실하고자 했던 민주적 좌파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보수주의적 망설임과 혼동될 수 있는 정치적 이견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망설임은 루이 알뛰세르의 가부장적 위상과 그리고 윌름(Ulm) 가의 지적 성역을 장악한 공산당의 영향력 근저를 맴돌았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실제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데리다는 회고한다. 소련의 헝거리 개입 이후, 몇몇 분명 적지 않은 수가 공산당을 떠났다. 그러나 “알뛰세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주) 만약 그가 결코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을 떠나는 것이리라. 비록 그가 당기구에 의해 이단자로 의심을 받았었지만, 알뛰세르의 담론은 맑스주의 지식인 집단 내에서 여전히 권위를 행사하였다. 1968년까지, “나는 이러한 담론은 축출된 것이 아니라 당 내에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고 데리다는 밝히고 있다.

*주){{ Ibid, p. 199}}

『『『맑스의 유령들(「꺽쇠기호가 삽입되어야 함)』』의 저자의 소리 없는 망설임은 맑스주의 이전의 이념적 맑스와 맑스가 된 과학적 맑스 사이의 경계를 형성한 것으로 주장되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데리다는 이러한 두 맑스의 테제를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그에게 과학의 개념은 맑스의 이질성과 맑스 사상의 다의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 힘이 되지 못하였다.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알뛰세르와 그 추종자들의 담론들은 그에게 하나의 “새로운 과학주의” 혹은 “새로운 실증주의”로 비춰졌다. 이들의 담론에는 “객체란 무엇인가?”와 같은 결정적인 문제들은 가차없이 삭제되어 있었다.

데리다는, 그를 공산주의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던, 알뛰세르 사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것들 속에서, 많은 문제들 “특히 역사의 역사성 혹은 역사 개념에 관한 문제들”이 회피되는 듯 했다고 강조한다. “나는 알뛰세르가,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너무 빨리 몇 가지를 역사에서 배제시켰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역사를 포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의 파괴는 나에게 역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주) 오히려 데리다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용어 - 결과적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할 - 가 역사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주){{ Ibid, p. 193}}

마비와 위협으로 이러한 이견들이 침묵에 묻힌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명성이 높아가던 철학자에 의한 공개적인 이견의 제시는 적당히 지나가는 모호한 논의의 구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데리다가 당과 거리를 두었던 저항이 단순하게 논증적이거나 이론적이 아니었던 것인 만큼. “이러한 저항들 역시 정치적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30년 후 “나는 그들보다 더 맑스주의자임을 느낀다”라고 희화화한다. 그가 확신하는 것처럼, 60년대부터 예견된 당의 붕괴를 그가 본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미 당이 자멸 논리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알뛰세르주의의 패러독스는 당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당을 개조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알뛰세르 현상은 “지극히 프랑스적인” 특이한 이론적 산물이며, 그 이론의 기초자는 자신의 당보다 더 자멸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둘 모두는 68운동의 최대 패배자가 되었다."*주)

*주){{ Ibid, p. 120}}

맑스주의에 과학성 개념을 부여하려 노력하고 인식론적 단절에 각성제를 투여하면서, 알뛰세르는 당의 편협한 후견으로부터 이론을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맑스주의 지식인들 - “보장된 철학자”, “저서는 없지만 모든 작업을 정치로 아는 철학자들”*주) - 을 시간, 특히 가깝게는 냉전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스탈린주의의 본격적인 위기사태와 거리를 둔 “이론적 실천”은 “그 스스로 자신의 기준이 되었다.” 이론적 실천은 “그 스스로 자기 산물의 질을 평가하는 규정, 즉 과학적 실천물의 과학성의 기준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당의 후견적 틀에 알력을 보였던 공산주의자 학생들은 이러한 이론의 해방을 다시 찾은 사상의 자유의 징표로 이해하는 듯했다.

*주){{ 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Maspero, 1965, p. 12}}

동시에 알뛰세르는 맑스주의에 새로운 과학적 위상을 부여한 것처럼 보였다. 신생대학의 강단에 봉쇄된 채, 전통적 대학들이 기피하는 투쟁적 지식인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맑스를 위하여』(꺽쇠기호) 서론에서 알뛰세르는 그 시기 공산주의자 지식인의 이 같은 오랜 욕구불만을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에게 이런 지식인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지식인이 당의 의도에 따라 철학을 말하고 썼다하더라도, 유명한 인용구에 대해 내부용으로 미미한 재해석과 논평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적 백병전으로부터 과학적 법칙의 고매함으로 넘어가면서 전투적 맑스주의는 학술원의 고결한 승인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학 붐으로 배출되고, 막연하게 정치참여와 경력의 양립을 고심하던 미래 세대에게 이것은 뜻밖의 횡재였다. “진리”이기 때문에 전능한 과학의 봉사자로서, 현장 활동가와 “노동자계급 당”에 대해 죄의식을 벗어버린 지식인들은 스스로 생산자가 된 것이었다. 왜냐면 스승의 말처럼, 이제부터 “지식을 세계관이 아닌 생산”으로 인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과학의 실천적인 힘과 명분의 떳떳함을 동시에 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알뛰세르의 행동은 해방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대가를 치렀다. 정치로부터 해방된 이론? 자기 자신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밀실 속에 갇혀 실천적 실천과는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면 이론적 개혁의 혁명적 주장과 1968년 당의 실질적인 정치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론과 실천 사이의 이러한 보장된 평화 속에서, 정치는 당과 당의 관료주의적 기구의 권위주의적 손에 맡겨져 있었다.

동료들의 인정 속에서 학문적 위상을 가진 맑시즘을 꿈꾸며 알뛰세르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 교조적 “디아마(diamat)”에 식상한 학생들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화두에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구조주의 인류학을 도입하였다. 그는 학문간 열정적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동시에 (그람시가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혹평하고,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불멸의 팜플렛*주1)에서 신성화한) 부하린의 『맑스주의 사회학의 대중 교과서』*주2)에 의해 유명해진 저주받은 한 쌍의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학의 이름으로 점점 더 악화되던 과거를 계속 정당화하였다.

*주1){{ Staline, Matérialisme historique et matérialisme dialectique.}}

*주2){{ Nicolas Boukharine, Manuel populaire de sociologie marxiste, Paris, EDI, 1967}}

한편에 역사과학, 또 한편에는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분별의 과학” (메타논리와 메타과학)인가? 정치에 관한 한, 결정적 판단은 당과 그 지도자들의 혜안에 맡겨졌다.

지식인들의 죄의식 탈피는 공산주의자 학생 연맹의 위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제시된 「학생 문제」*주)에 대한 1964년 1월의 텍스트에 드러난다. 다시 읽어보면, 이 글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모든 토론은 항상 과학적 토론이다. 비판과 자아비판의 맑스-레닌주의적 개념들은 이러한 과학적 토대에 기반한다; 비판의 권리와 자아비판의 의무는 맑스-레닌주의 과학과 그 결과에 대한 현실적 인정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을 갖는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에 대한 구별은 교육관계를 넘어서 특정한 대학적 관료 질서를 정당화한다. 교육의 내용 속에서 “노동의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 사이의 영구적인 분할의 선”, “진정한 과학”과 “순수한 이데올로기” 사이의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깊숙한 계급 분할의 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진정한 과학의 평결 앞에서 속죄하는 복종으로, 또한 위선적 부르주아 과학에 맞서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저항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

*주){{ Louis Althusser, “Problèmes étudiants,” in "a novelle critique, janvier 1964}}

자그 랑시에르는 1975년, “우리가 알뛰세르 학파로부터 익힌 맑스주의는 그 모든 원칙들이 우리들을 부르주아 질서를 뒤흔드는 저항운동으로부터 격리시킨 질서의 철학이었다”고 기술했다. “(....) 1964년, 알뛰세르는 대학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을 찾아냈다. 이로써 공장에서의 모든 위계질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교수의 권위가 ‘이론적으로’ 보장되었다. .... 맑스는 잘못할 수도 있고, 알뛰세르가 그것을 정정하는 것은 옳을 수 있다. 다만, 진정으로 맑스와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맑스를 조용하게 놔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맑스와 맞선다면, 그것이 초래할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오도된 길로 빠져들었다. 맑스보다는 그람시를, 그람시보다는 루카치를, 루카치보다는 가로디를, 가로디보다는 존 루이스를 말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오도된 길로 더욱 나아갔고 문제로부터 더 멀어져갔다. 맑스는 어찌되었는가? 다시 말해 종국에는. 혁명은 어찌되어 가는가?”*주)

*주){{ Jacques Rancière, La Leçon d'Althusser, Paris, Gallimard, coll. Idées, 1974}}

1980년 알뛰세르는 침묵을 지켰다. 과학이라는 가공할 메스로 무장한 그는 역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역사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사상의 역사관은 붕괴되었다”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초기 이론활동은 오늘날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더 이상 그가 이해했던 방식으로 『자본』을 읽지 않는다. 지난 세기의 참담한 결말은 또 다른 시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알뛰세르 식으로 또 반 알뛰세르 식으로 『자본』을 다시 읽는 것은 우리의 논리적 저항의 강제된 통과의례인 것이다.

1972-1974년의 「자아비판」 이전의 텍스트들은 “알뛰세르주의”를 하나의 사상적 학파로 만드는 것인 동시에 낡은 세계에 맞서 일어선 전후 지식인 세대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적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주) 알뛰세르의 정치는 자신의 이론적 작업들보다 더 낡은 병폐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와 이론 사이의 관계는 밝혀져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주){{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Paris, Hachette, 1974}}

알뛰세르의 정치사상은 채집된 곤충처럼 스탈린주의의 벽에 부딪혔다. 그의 관심사는 숙청과 수용소와 같은 비개념적 무게에 눌린 가공할 관료주의적 반혁명이 아니라 “이론적 일탈”이라는 곤혹스런 결과에 있었다. 「존 루이스에의 답변」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전체적으로) 긍정이 부정을 압도한다. “명백하고 강력한 이유들 때문에 스탈린은 우리가 그의 이름에 연결시키는 편향으로 환원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역사 앞에 보일 다른 치적들을 갖고 있다. 그는 세계혁명이라는 즉각적인 기적을 포기해야 함을, 그리고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부터 모든 결론들을 이끌어 냈다. 세계 사회주의의 배후와 토대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국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이를 제국주의의 포위공략에 맞서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로 일국 사회주의는 나찌즘으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킨 전쟁에서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주의에 기여했던 스탈린그라드의 탱크를 생산한 중공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비극과 굴절을 통하여 수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은 비록 스탈린이 교조적으로 교육했다 하더라도 레닌주의 원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

*주){{ Louis Althusser, Réponse à J. Lewis, Paris, Maspero, 1973. 이 텍스트는 1972년 자아비판 이후에 쓴 글이다.}}

스탈린의 전차들이 프라하, 부다페스트를 짓밟은 것, 독-소 조약, 루비앙카의 지하 매장지, 콜리마의 수용소, 이 모든 것들이 단지 도그마에 의해 굳어버린 원칙의 압제에 약간 삐꺽거린 사소한 일들인가? 알뛰세르는 - 뒤늦게 - 역사에 대한 이론적 숙정과 그의 유감스런 오류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스탈린적 일탈”을 공격한다. 그에게 이러한 일탈에 대한 “좌파의 유일한 비판”은 “조용한 그러나 중국혁명에 의해 완결된 행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판”이다. 사실 1949년 중국혁명은 스탈린의 의지와 지침에 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3년 문화혁명과 수백만의 죽음 이후 대체 어떻게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조국과 마오에게서 수정된 스탈린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미리 대비했던 알뛰세르는 이러한 집요한 맹목성의 정당성을 사전에 표명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대실패로 귀결된 “이론적 일탈”들을 경제주의, 경험주의, 교조주의 등으로 불렀다. “심층에 있어서 이러한 일탈은 철학적이며, 엥겔스와 레닌을 필두로 초기 노동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미 이러한 일탈을 비난했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일탈들이 그것을 비난했던 초기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함몰시켰는지 아주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일탈들은 맑스주의 철학의 당연한 지체를 고려해보면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심한 정치, 보잘 것 없는 실천을 온종일 선혈이 낭자한 진흙탕에 나뒹굴게 방치한 후, 황폐해진 들판에 퇴행적 시선을 보내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행복한 철학!

한 시대는 동시대인들에게 결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손쉬운 철학적 변명을 갖고 있다. 실현된 역사가 유일한 가능성이 아니었다는 것 - 결코 아니라는 것 - 을 주장하며 제거된 수많은 이설자와 반대파들 역시 존재한다. 스탈린은 강제된 조물주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알뛰세르가 찬양한 바대로 “변증법 법칙”*주)들로부터 부정의 부정을 제거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는 아니었다. 사실 스탈린은 반복도 미사여구도 없는 간단명료한 부정을 선호하였다.

*주){{ Louis Althusser, "La querelle de l'humanisme"(1967),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 1997, p. 453.}}

1978년, 「「공산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꺽쇠기호)이라는 글은 약간 뒤늦게 나왔다. 2년 전, 알뛰세르는 22차 당대회를 “공산당과 프랑스 노동운동 역사에서 결정적 사건이자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경의를 표했었다.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버렸다.

너무 늦었다! 한번 더 부엉이는 황혼에 눈을 크게 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비에트가 해체되기 10년 전에, 알뛰세르는 고르바초프의 기적을 끝까지 기대하면서 자신의 “파괴된 우주”와 함께 무너져갔다.

관료주의적 위계질서에의 복종과 수도자적 신중함으로 완화된 고집스런 이단 사이를 갈팡질팡하였으나 그는 개탄스런 구조를 뒤흔드는데 기여하였다. 한편으로는 배회하는 당원들을 당의 품안으로 끌어 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진정한 마오주의적 좌파주의를 활성화시켰다. “1968년 5월 이후 알뛰세르의 이중 진리는 두 축으로 분할되었다. 전능한 이데올로기 기구의 사변적 좌파주의와 자신의 계급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사변적 주다노프주의 ..... 바로 이것이 역설적 정통의 미로가 몰고 간 것이다. 마오를 맑스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철학의 중재가 있어야 했다.”*주)

*주){{ Jacques Rancière, op. cit.}}

68 이전에 알뛰세르는 전술적 탈정치주의라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68 이후 그의 진리는 마오주의적 (미시) 기구들의 좌파주의와 이론 속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주다노프주의로 갈라져 나갔다. 1973년 그의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은 “좌파주의의 상속재산이었던 테제들의 공산주의 정통성에의 부착”*주)이었다. 적어도 어떤 좌파주의는, 마오주의에서 갑자기 로타리 클럽으로, 나아가 반전체주의의 신 철학, 신자유주의의 십자군, 그리고 재탕된 영생신학의 부활로 이행하기 위해, 머지않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스탈린주의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주){{ Ibid., p. 183}}

이러한 서글픈 평가에 비추어, 라자뤼스(S. Lazarus)의 글에서 알뛰세르가 처음으로 “정치의 사고가능성을 열었다”고 읽는 것은 놀랍다. 사실, 에꼴 노르말의 엘리트 주변에서 거둔 알뛰세르의 성공은 알튀세르가 이들에게 기회주의적 처신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맑스주의에 관한 권위를 내세워 당의 숨막히는 후견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미래의, 사민주의의 우직한 학자들인, 대사상가 후보들은 지식의 권위가 약간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계급투쟁에서 과학적 전문가를 자처했다. 이렇게 당과 에꼴 노르말의 이중의 무대에서 이론의 명성과 정치의 빈곤이 결합했던 것이다.

60년대 말 알뛰세르주의의 자산이었던 문제설정은 세 가지 문제에 걸쳐 있다. 인식론적 단절, 역사주의 비판 그리고 이론적 반인간주의.

알뛰세르는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분리시키면서 맑스에 적용하기 위해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자아비판과 수정의 맥락에서, 그는 결코 이 테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단절은 발명도 환상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주1) 그는 또한 “나의 초기 글들의 중심적 범주들을 그로부터 만들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은 나를 상대로 (...) 자신들이 지배하는 역사의 연속성에 목숨을 건 부르주아들에서부터 전치된 몇몇 과학적 개념 때문에 정치적 동맹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주아적 개념들(과학과 단절)을 도입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신성동맹을 결성하게 했다.”*주2)

*주1){{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Paris, Hachette, 1974, p. 18}}

*주2){{ Ibid., p. 32.}}

그에게, 단절의 상처는 봉합될 수 없었다. 그 상처는 진리와 오류, 지식과 무지가 아닌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할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단절은 나의 모든 예비적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비과학의 합리주의적 개념 속에서 구상되었고 정의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지옥에 떨어진 부르주아 과학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만들어진 용법을 생각해 볼 때, 관료주의적 이성은 이러한 냉혹한 합리주의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는 가공할 만한 논거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알뛰세르의 맑스 읽기는 찾을 수 없는 단절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는 사변적 유산에 대한 이론적 단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작하였다. “나는 경솔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의식 속에서 자신들의 대학교육으로부터 받은 이론적 원칙들을 부정하고 지형을 변화시킬 필요성이 발생하는 그 순간을 단절이라고 불렀다.”*주1) 그에 따르면 이 순간은 「1844년 수고」이후에 발생한다. 날짜 역시 명시된다. 1845년. 다음해 『독일 이데올로기』는 철학의 종말과 동일한 것들로의 회귀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끝이 없는 장기지속 사건의 시작에 불과하였다.”*주2)

*주1){{ Louis Althusser, "Marx dans ses limites",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aris, Stock, 1994, p. 381.}}

*주2){{ Louis Althusser,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88}}

맑스는 도착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여기로부터 그 개념을 지키기 위해 “과정으로서의 단절” 혹은 지속된 단절 등으로 재검토되고 정정된 개념이 나타난다. “모든 과학이 장차 내적 단절들(coupures)에 정확히 맞추어진 지속된 단절(Coupure)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속과 불연속의 변증법이 문제되는 것이라면, 단절(Coupure)과 단절들(coupures) 사이의 문제는 쓸데없이 혼란스럽게 된 것 같다. 정치에서는 단절과 연속성, 사건과 역사, 행위와 과정을 모순적 통일 속에서 총체적으로 사고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알뛰세르가 단절이 야기하는 연대기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단절을 고집했다면, 그것은 단절이 자신의 개념적 장치 속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절은 맑스의 독해를 막다른 길목으로 몰아넣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형성 중인 모든 사상들처럼 그의 사상 역시 전환을 겪고 도약을 맞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굴곡을 알고 강조한다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얽혀진 실타래를 따라간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그러한 것 없이는 항상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단절은 끊임없이 작업의 극단적인 한계에 몰리게 된다.

알뛰세르가 잘못된 신념을 지키며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든, 소외와 부정의 부정 개념들은 『그룬트리쎄』와 『자본』에서 재출현하면서 1845년의 단절에서 살아 남았다. 물러서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잘못된 싸움에 말려들어 그는 “과학적” 맑스주의의 단절을 1880년 바그너에 대한 죽음직전의 노트에까지 몰고 가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하마터면 그랬다. 겨우 몇 달 후, 신성 맑스는 이데올로기의 암흑상태를 우리에게 남겨둔 채 떠났다.

이러한 집요함의 요체는 명백하다. 맑스의 저작들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정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를 떠나지 않는 수많은 악마들(인간주의, 역사주의, 진화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그의 저작 속에서 들러리가 아니다. 문화 개념에 의한 그의 은밀한 대체(분명 아라공Aragon이 표적이었다)는 더 이상 계급투쟁의 여지가 없는 엘리트주의적 통합운동으로 즉각 이르게 된다. 이러한 타협 없는 경계획정은 과학적 기술적 이성의 물신적 실체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의 기술적, 사회적 분업의 영원한 분리선, 가장 지속적이고 깊은 이 분할선이 용인되는 곳은 바로 대학에서 교육되는 지식 속에서이다. 배분된 지식은 진정한 과학인가? 그래서 이러한 분배는 기술적 필요성에 진정으로 조응하는 것이다. 분배된 지식은 순수한 이데올로기인가? 비록 교육의 형태가 매우 근대적일지라도, 교육적 기능이 이데올로기 그리고 계급 정치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Problèmes étudiants, op. cit..}}

그러므로 교육학은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주체들에게 여과된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지니며” 교육적 관계는 “지식과 비지식 사이의 불평등”을 반영한다. 결국 “스승과 제자,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적 관계의 기술적 표현이다.” 서기장의 권위와 같이 스승의 권위 등 모든 이러한 형태의 권위는 부분적 지식이 아닌 비지식의 절대적 무지와 대립되는 절대지식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마오주의의 대중주의적 “인민 봉사”와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선동적인 우상화는 이러한 통제 담론의 전도된 형상이자 지적 속죄로 나타난다.

지식과 비지식의 상호배제는 언어와 유사하다. 배제는 들리지만 표현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인식이 이데올로기로서 내재적이라는 단정”이 곧 무의식이라고 알뛰세르는 강조하면서도 이를 전파한다.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표면의 위상학적인 중첩은 이러한 얽힘을 형상화한다. 따라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항상 회고 혹은 회귀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의 선사(prehistoire)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선언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단절을 이론들의 역사 속에 세우는 것은 바로 과학 자체의 존재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Sur Feuerbach"(1967), in Ecrits phlosophiques et politiques, II, op. cit., P. 225 et p. 487.}}

이러한 미해결의 난점들은 뿌리 깊은 모순을 증명한다. 때론 필요로 하고 때론 반박되면서 그를 떠나지 않는 과학적 이상과 실증주의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알뛰세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드 이론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묶여 있다. 포퍼의 인식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허풍을 떠는 “비과학”의 두 가지 예이다. 하나는 고전 심리학(폴리쩌가 20년대에 그것을 훌륭하게 만들어 냈다)을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타락과 최악의 혼동” 현장으로서 비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에 적극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대립시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프로이드가 우리에게 준 것은 하나의 과학 구조이다.”; 그러나 “아직은 비과학인 것의 과학으로 이행”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단일성에 적합한 합리성과 인과성이라는 다른 개념들이 요구된다.

알뛰세르는 그것을 명확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표현적 인과성이라는 라이프니쯔의 개념이나 헤겔의 목적론적 인과성에 빠지지 않고, 스피노자에게서 기계적 인과성과 그의 이행적 효율성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것으로부터 “환유적 인과성”과 “과잉결정된 모순”이라는 제안이 나온다. 이러한 모색은 당의 자기방어적 담론에서 통용되는 헤겔 변증법의 옹호론적 해석을 피하려는 당연한 고민을 나타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꺽쇠기호)』에서 알뛰세르는 맑스로부터 “유물론적 원칙과 양립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맑스로 지속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변증법의 옹호론적 범주들, 더욱이 그 유명한 ‘법칙들’ 속에서 당 지도부의 결정을 위해 역사의 변화무쌍한 진전을 완수한 사실에 대한 옹호(정당화)에만 이용되는 것 같은 변증법 그 자체”를 제거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주) 변증법이 만능이라는 스탈린의 전통을 겪었던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알뛰세르의 집착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주){{ Louis Althusser, L'avenir dur longtemps, Paris, Stock, 1992, p. 214}}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 다른 전복적인 난제를 제기했던 이러한 피곤한 논쟁을 심화시키기보다는 알뛰세르는 생물학과 정신분석학 속에서 다른 양식의 합리성들을 추구하면서 비껴나간다. 그는 프로이드가 라깡처럼 항상 수학자나 논리학자에 비교되기보다는 자연과학자에 비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전적으로 옳았다.” 다만 자연과학을, 물리학이나 정밀과학으로서가 아니라 생명과학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이다. 사실 맑스에게 자본논리는 기계적 논리가 아니라 유기체적 논리였다. 자본 자체가 죽은 노동을 삼키는 흡혈귀인 것이다.

과학적 이상이 더 이상 고전적 물리학의 배타적 이상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에 대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라자뤼스처럼 알뛰세르가 그것을 위협하는 과학주의에 저항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의 모순들은 맑스가 이미 표현했던 것처럼 다르게 과학을 할 필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상과 당으로부터”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사상 자체 속에서”라는 “이중의 틈새”*주)를 통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스탈린적 합성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순환적으로 이중의 어려움에 부딪친다. 한편으로 자신의 대상(역사 혹은 무의식)에 고유한 서술적 논리. 다른 한편으로 “단절” 이후에 역사가 있다는 역설.

*주){{ Sylvain Lazarus, Politique et philosophie dans l'oeuvre de Louis Althusser, Paris, PUF, 1993, p. 10}}

결론적으로 진리는 역사를 만든다!
과학이 “멈추지 않는다면”, “모든 과학이 시작한다”고 단정하는 교묘한 해결책이 여기서 나온다. 하나의 해결책 이상으로 이 답변은 알뛰세르가 의식하고 있었던 어려움의 지표이다. 그는 과학과 혁명적인 것의 개념을 하나의 동일한 표현으로 결합하려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증명된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간단히 말해 과학적인”*주) 객관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덧붙인다. 물리학과 수학은 계급의 결정을 초월함에 따라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생산과 적용의 조건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주){{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27}}

모순은 현실적이나 적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모순은 맑스주의에 기존 과학성 모델의 적용과 과학 개념의 근본적인 재정립 사이의 망설임, 즉 『맑스를 위하여(꺽쇠기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망설임을 초래했다고 발리바르는 1996년의 서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과학만능주의적 의도를 의식한 우리는 알뛰세르의 사상이 기초한 스피노자적 근거에 내재하는 비경험적 진리의 개념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고전과학에서 결정적인 실험은 진실의 유효성을 보장하는 판단 기능을 수행한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스스로 나타내는” 진실에 대해 말한다. 왜냐면 “지식이 드러나는 것은 그것의 생산과정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류에 대한 인식이 진실의 반복인 것”*주)은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레닌과 철학(꺽쇠)」에서 알뛰세르가 회의적 상대주의와 과학만능적 교조주의라는 이중의 장애물에 대항하여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쟁점을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구별은 모호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과학이 가장 나쁜 의미의 도그마가 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고, 신념론, 불가지론, 궤변론에 대해 “결정적이고 지울 수 없는 선을 긋기에는 충분히 명확하며”, “모든 형식의 관념론에 대항하는 집요한 투쟁을 가능하게 할만큼 아주 확고하다.”

*주){{ Ibid., p. 47 et 75}}

따라서 알뛰세르가 자신에게 퍼붓는 실증주의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78년 1월 16일 므랍(Merab)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 대학에서 배태된 꽁트적 유산에 대한 실질적인 경도를 인정한다. “15년 전에 내가 했던 것은, 몇 가지 근거(까바이에스Cavaillès, 바슐라르, 깡귈렘 그리고 그들 이전에 스피노자-헤겔의 전통)로부터 영향을 받은 명백한 합리주의 전통 속에서 과학으로 정립하려는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 주장에 대한 아주 프랑스적인 평범한 정당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절반 정도 그것을 믿었고, 이러한 절반의 불신은 나머지 반의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주1) 그러나 「철학적 정세」에 대한 1966년의 텍스트 속에서 그는 여전히 꽁트를 “격렬한 유심론적 반동”으로부터 “프랑스 철학의 명예를 구한” “19세기 유일의 위대한 철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베르그송, 페귀, 메를로-뽕티가 포함된 유심론적 계보와 전쟁을 선언하였다. 그에게는 심리주의 전통의 희생자들을 부활시킬 시점이 온 것으로 보였다. 생시몽, 푸리에, 꽁트, 쿠르노, 뒤르껭. 유심론과 유물론 사이의 이러한 명확한 경계선은 아주 이상한 동맹과 위험한 혼선을 가져왔다. 우리는 메를로-뽕티에게 뒤늦게 경의를 표한 그의 자전적 고백 속에서 적절히 시인한 가책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철학자적 소설가”였던 사르트르와 달리, 그는 “진정 위대한 철학자”였고 “데리다 이전에 프랑스의 마지막 거인”이었다.*주2)

*주1){{ Lettre à Merap,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op. cit., p. 527.}}

*주2){{ Louis Althusser, L'avnir dure longtemps, op. cit., p. 170}}

알뛰세르는 맑스가 “우리의 위대한 철학자” 꽁트에게 보인 경멸을 오랫동안 고집스레 무시했다! 앞서 인용한 꽁트적 신념을 고백한 지 겨우 일년만에 「철학의 편에 서서」에서 그는 실증주의를 “경험주의의 현실적 대표자”로 비난한다. “지배적 경험론과 피지배적 형식주의 사이의 타협”으로서 실증주의에서 그는 “최대의 적”을 발견한 것이다.

후기의 저술에서까지 알뛰세르는 그가 대상으로 했던 60년대의 구조주의와의 아말감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문제를 발생시키는 (추상적인) 결합관계(combinatoire)과 (구체적인) 결합(combinaison) 사이의 구조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였다. 아무도 이러한 차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도처에서 구조주의를 통해 기존질서 속에서 구조의 부동성과 혁명적 실천의 불가능성을 정당화한다고 나를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레닌에 대하여 정세이론이 묘사하는 것 이상을 그려냈다.”*주) 생산양식에 대한 서투른 구조적 해석이 실질적으로 그것의 혁명적 전복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1972년 자아비판에서 알뛰세르는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이 어설프게 유사 구조주의에 근접했음을 인정하였다. “결여된 원인” 혹은 부분에 대한 전체의 특수한 효능을 생각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주){{ Ibid., p. 177}}

“사람들이 우리를 구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알뛰세르는 항변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논쟁의 단순화이다. 그러나 결합은 결합관계가 아니다. 발리바르가 역사의 냉혹한 의미를 사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우연의 필연성”*주)을 사고하기 위해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에 대립하는 절합된 구조를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반면에 그는 어떻게 반인간주의적, 반역사주의적 관심이 논리적으로 그 시기의 구조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교차하고 타협해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주){{ Etienne Balibar, Préface à la réédition de Pour Marx, Paris, La Découverte, 1996}}

“모든 값싼 인간주의적 요소”를 맑스주의 철학에서 제거하겠다고 선언한 과제는 1967년 정통 맑스주의 진영을 동요시키고 약간의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과제는 알뛰세르가 맑스의 “인간주의의 결여”로 명명한 것을 사변적인 인류학의 유혹과 대립시키는 것임에 따라 명백한 정당성의 몫을 지니고 있다. 『신성가족』(1845)과 『독일이데올로기』(1846)는 사실상 고전적 역사철학에 대한 명백한 단절을 의미했다. 이러한 단절이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변적인 인류학의 유산과 명백한 정리를 해야 했다. 그 때까지 모든 것은 잘 되었다.

따라서 알뛰세르는 철학적 프로그램의 거대한 획을 그었다. 소외, 주체, 인간은 이러한 장치의 포로가 된 유일한 긍정적 개념, 즉 “(주체와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주체 없는 과정이 되는) 과정의 개념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주1) 세 가지 인류학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식론적 단절에 걸맞게 시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독일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루어진 단절은 그에게 이미 더 이상 명료하지 않은 듯했다. 칼날이 미끄러졌다. 우리는 맑스처럼 “장황한 헤겔주의” 속에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야유 섞인 비판을 받은 인간(Homme)은 “이론의 뒤곁에” 잠복한 채로 남아 있었고, 여전히 역사화된 개인을 철저하게 짓누르고 있었다.*주2)

*주1){{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68}}

*주2){{ Ibid., p. 481.}}

칼(Karl), 맑스(Marx)가 되기 위해 또 한번의 노력을!
알뛰세르는 오점도 재발도 없는 완벽한 단절을 추구하며 저작의 흐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인류학적 개념들과 『자본』의 기나긴 생성과정 속에서 정립된 새로운 개념적 장치에 따른 이들의 변화에 대한 정밀한 비판 대신에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고자 했다. 간단히 그렇게 단정하고 싶었으리라.*주1)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남아있는 “잔재”를 증거로 내세우며 이론적 인간주의의 구성적 범주들이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부터 사라졌음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외개념이 물신주의와 사물화에 결합되어 있는) 『그륀트리쎄』와 『자본』에서 소외개념의 재출현은 의미심장하다.*주2) 문제설정의 변화가 인류학적 개념에서 비판적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주체 및 인간 개념들은 인류학적 인간주의와 구별되는 역사적 인간주의의 의미 속에서 재정립된다. 이러한 결정적 전환을 포착하지 못하면, 떳떳하게 내세운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스탈린적인 냉정한 관료적 이성뿐만 아니라 마오주의적 근본주의의 뒤늦은 폭발과도 양립할 수 있는 아주 실천적인 반인간주의로 환원될 위험이 있을 것이다.

*주1){{ 참조. Voir Roman Rosdolsxy, Genèse du Capital, Edition de la Passion에서 출간 예정.}}

*주2){{ 1968년부터 『자본』 뿐 아니라 『그룬드리쎄』와 로드돌스키를 읽었던 만델(E. Mandel)은 그 중요성을 『맑스의 경제사상 형성』(Paris, Maspero, 1968) 속에 잘 표현했다. 세브(L. Sève)는 알뛰세르가 소외나 부정의 부정 개념들이 맑스의 후기 저작에서는 사라졌다고 판단한 잘못된 신념을 상기시킨다.(in "Althusser et la dialectique", Althusser philosophe, Paris, PUF, coll. Actuel Marx, 1997) }}

하지만, 이러한 우려되는 일방성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적 반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은 맑스를 넘어 “맑스주의”를 떠나지 않았던 사변적 역사철학의 비판에 풍부한 전망을 열어 주었다. 『자본읽기(꺽쇠)』의 서론에서, 알뛰세르는 “이성에 대한 모든 목적론을 포기하고 조건들에 대한 결과의 역사적 관계를 표현관계가 아닌 생산관계로서 인식하는 책무를 정의한다. 즉 고전적 범주 체계와 어울리지 않으며 이러한 범주들의 대체를 요구하는 경구, 우연의 필연성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주) 이 프로그램은 매개작용과 시간성의 차이를 수용하는 “지배적인 것에 절합된 총체성”을 위해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왜냐면, 변증법적 과정으로서 헤겔의 역사개념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킨 것은 바로 “기원에서부터 이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목적론인, 구조 자체 내에 존재하는 변증법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 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I, Paris, Maspéro, 1965, p. 55}}

이미 『신성가족』에서부터 묘사된 역사에 대한 세속적인 개념화는 반대로 이러한 사전에 세워진 목적성의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화는 더 이상 경험적이지 않은 “즉 평범한 의미에서 역사적”이지 않은 역사에 대한 개념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험적 시간성 및 “시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념”과의 모든 타협으로부터 역사이론을 해방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면, 거기에 바로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대상과 인식대상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현대 역사주의의 기저”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이론은 “우연을 통하여 길을 여는 필연성”과 같은 경구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

이러한 이론적 프로그램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낡은 철학적 의식들을 정리한 후 맑스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글쓰기”의 기초를 세우는 정치경제학 비판에 집중하기 위해 더 이상 역사 개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한 체계적 개념화의 결여로 최후의 심판의 대리인처럼 참혹한 기억의 심판과 함께 불순한 역사적 이데올로기가 세속화 과정에서 스며들었다.*주)

*주){{ Daniel Bensaid, Qui est le Juge ? Pour en finir avec le Tribunal de l'Histoire, Fayard, 1999 }}

그러나 알뛰세르는 역사이성의 비판을 위한 귀중한 지표들을 제공하였다. “나는 기원과 발생의 쌍에 의해 형성된 엄밀한 의미를 수용한 기원과 발생의 개념들은 그 근본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주) 모든 발생이 발육된 개인은 생성과정의 기원부터 프로그램화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발생의 변증법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출현의 변증법이라는 특수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교조적 구조주의라는 비난과 명백한 모순을 이루는 이러한 비판은 역사에서처럼 정신분석학에서 사실사건적 돌출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발생의 사상은 우리가 사전에 확인한 동일인의 발전 속에서 변동과 불연속성으로서 변동과 불연속성을 적시할 수 있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 변동과 불연속성의 사고를 아주 잘 지탱한다.”

*주){{ Louis Althusser, "Lettre à D..."(1966), in Ecrit sur la Psychanalyse, Paris, Stock, 1993, p. 65}}

일반적으로 맑스에게 부여하던 발생적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그리고 “인식의 발전 과정을 현실적 발전과정”*주1)으로 착각하는 회고적 환상과는 반대로, 알뛰세르는 “봉건적 생산양식이 자신의 친자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발생시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주 정확한 특정 요소들의 만남과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여기서 “역사적 출현의 (혹은 사건의) 비발생론적 이론”*주2)을 정립해야할 필요성이 나온다. 특히 그것의 종교적 함의가 창조를 연상시키는 기원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억압처럼 자본주의의) 기원의 문제들은 천박한 유물론이 발생의 범주에서 역사를 사고하는 것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더욱 더 중요하다. 이 개념은 “가장 커다란 인식론적 장애물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그것은 역사학에서처럼 심리학에서도 커다란 폐해를 가져왔다.

*주1){{ Ibid., p. 87}}

*주2){{ Louis Althusser, "Sur Feuerbach", op. cit., p. 217}}

따라서 구조주의적 유희는 무엇보다도 생성에 대한 이러한 강박관념을 어설프게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구조에서 생성을 제거했다; 나는 이 끊임없는 비판을 감수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답변하지 않을 것이다.”*주1) 진화론적 혹은 발생론적 환상에 반하여, “생산양식은 그 자체에 잠재적으로 그를 계승할 생산양식을 배아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발생의 형태를 갖지 않은 과정의 결과”이다. 발생은 구약성서의 “genuit”를 연상시킨다. 계승은 계보(filiation)가 아니다. 이러한 결정적인 구별을 행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잃는 것이 아니라 “분명 생성을 잃는 것이며 그것은 바람직한 상실이다.”*주2)

*주1){{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517}}

*주2){{ Ibid., p. 519}}

이러한 근본적인 비판은 기원과 종말에 대한 모든 의존을 봉쇄한다. 반대로 헤겔에게 있어 내재성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종말은 숨겨진 초월성으로 존재한다. 자기자신의 급진성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신학적 경험론을 거부하는 알뛰세르는 “관념의 발전과정의 변증법적 연속성이 드러나는 연속”*주1)으로 인식된 시간과의 단절로서 역사적 시간성을 묘사한다. 그는 현재성과 역사적 현재라는 또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헤겔철학에서, “전체의 모든 요소들은 동일한 현재에 항상 공존하며 따라서 동일한 현재 속에서 각각은 동시대적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본질의 단층들”에 의해 작동된다. 이러한 현재는 모든 지식의 절대적 지평을 구성한다. 현재는 현재적 현상들의 미래효과에 관련된 모든 전략적 지식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알뛰세르에게 “가능한 헤겔적인 정치”*주2)가 없는 이유이다.

*주1){{ 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tome II, Paris, Maspéro, 1965, p. 39}}

*주2){{ 베르나 부르좌(Bernard Bourgeois)가 알뛰세르와 헤겔(in Althuser philosophe, op. cit.)이란 글에서 반박하는 것.}}

그는 역사 속에 작동중인 시간성의 중복과 교차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구조화된 전체의 개념으로서 역사의 개념을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적 동시대 속에서 전체의 상이한 수준의 발전과정을 사고”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각각의 수준에는 “특정한 방식으로 분할된 고유한 시간”이 조응하며, 이러한 시간과 역사의 특수성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자본』을 “상이한 시간들의 얽힘”으로 읽을 수 있으며, 위기들을 그것들의 부조화의 효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주)

*주){{ Lire le Capital, II, op. cit., p. 47 }}

『독일 이데올로기』가 주체의 범주를 유지하고 “주체의 역사주의” (역사에는 하나 또는 여러 주체들이 있다)에 의존하고 있는데, 인류학적 철학적 역사비판은 결정적인 개념적 정복으로 귀결된다. 이 점이 알뛰세르가 헤겔에 대한 맑스의 부채를 인정한 유일한 것이다. 맑스는 헤겔에게 “과정에 대한 결정적인 철학적 범주”를 빚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상의 빚이 있다”.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주)

*주){{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53 et 474.}}

기원에 대한 “출현”의 대립처럼, 주권적 주체의 고전적 표상에 대한 비판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나에게 주체 개념은 점점 그것이 구성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말장난이나 심각한 이론적 동어반복 없이는 과학의 주체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리라 믿는다.”*주)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역사를 “만드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알뛰세르는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주){{ "Trois notes sur la théorie des discours", in Ecrits sur la psychanalyse, op. cit., p. 165}}

우리가 여전히 말할 수 있는 주체는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주체이다. 따라서 그 단어를 포기하고 그보다는 심리학적 의미를 덜 내포한 행위자(agent) 혹은 담지자(support, Träger)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968년 (「맑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하여」)과 1973년(「헤겔 이전의 레닌」)의 텍스트에서 형성된 “주체도 종말도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은 기원도 최후의 심판도 없는 역사의 세속적 개념과 맥이 통한다. 반면에 “과정”은 “동력”과 비의도적인 역학, 즉 계급투쟁의 역학을 지닌다.

따라서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는 중심이 된다. 알뛰세르에게 이 범주는 아주 단순하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규정한다. 이 범주는 “과학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개념의 철학을 위해 의식의 철학과 단절한다. “발생론적인 필연성은 활동의 필연성이 아닌 변증법의 필연성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Sur la logique et la théorie de la science}}

작업은 훌륭하지만 갑자기 끝난다. 그 벽은 헤겔적 정치의 불가능성 못지 않게 알뛰세르 정치의 불가능성과도 무관하지 아니다. 역사주의와 인간주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논쟁의 도약에 의해 승리한 알뛰세르는 마침내 “설탕의 인식이 달지 않은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인식은 결코 역사적이지 않다”*주)는 기이한 실증주의적 정리에 도달한다. 만약 그것이 짖는 개와 짖지 않는 개라는 개념의 스피노자적 구별을 문제삼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부한 것이다. 만약 역사인식에 정밀과학의 객관성이라는 이상을 적용시키는 문제라면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역사인식은 모든 “인문과학”들처럼 분명 역사적이다.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에 기반한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역사인식에 아주 본질적이다.

*주){{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1972-1986), in Ecrits ph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55}}

우리는 쉽게 주체 문제를 떠날 수 없다. 알뛰세르는 이 점에 관해 프로이드의 발견을 참조한다. “프로이드는 단일한 본질 속에서 개인인 현실적 주체는 자신과 의식 또는 존재에 집중된 에고(ego)의 형상을 갖지 않으며, 인간적 주체는 자신의 상상적 인식, 즉 그가 인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조직 속에서만 중심을 가질 뿐인 구조에 의해 구성되고 분산된다는 것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주1) 만약 주체 개념이 분석을 견디지 못한다면, “모든 담론은 주체성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모든 담론이 필연적인 파생물로서 “효과들 중의 하나 아니면 그 기능의 주요한 효과인 주체”*주2)를 갖는 것이다. 만약 담론이 주권적 주체의 언표가 아니라 주체화의 장소라면, 왜 그것은 동일한 역사를 갖지 않는가? 그리고 왜 개인들은 이 “과정” 속에서, 모로(P.-F. Moreau)의 표현에 따른다면*주3), “주체가 될 것을 요청받지” 않는가?

*주1){{ 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 in Positions, Paris, Editions sociales, 1982, p. 21 et 26}}

*주2){{ "Trois notes...", in Ecrits sur la psychanalyse, op. cit..}}

*주3){{ Pierre-François Moreau, "Althusser et Spinoza", in Althusser philosophe, op. cit., p. 86}}

이것은 바로 루쎄(B. Rousset)가 주장하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이성의 주인이자 자기 역사의 창조자인 주권적 주체라는 인류학적 개념의 포기는 스피노자적 내재성으로서 주체-생성, 즉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유에서 아주 현실적인 주체의 출현인 주체 없는 과정”*주1)의 포기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반드시 행위를 위한 담론으로서 역사적 인간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와 보편성은 더 이상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발생시키는 투쟁을 통한 구체적인 생성들이다.*주2)

*주1){{ Bernard Rousset, "La question de l'humanisme", ibid., p. 151}}

*주2){{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알뛰세르의 선언에 루세(B. Rousset)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윤리』(Ethique)의 독해에서 그가 환상으로서 신비화를 인간주의의 뿌리로 간주하는 이러한 주체-생성의 확인 또는 오히려 수용하기까지 하면서 그가 스피노자주의 그 이상이 아니었던 것이 무엇이 있는가 ... 그가 자제하지 못한 것은 주체를 다르게 사고하는, 즉 주체를 해방활동으로서 사고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

1972년의 자아비판은 알뛰세르의 작업에서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은 연속성의 대부분을 배제하지 않은 부분적 “단절”일 뿐이다. 그 역시 이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신중하게 “자아비판의 요소들”에 대해 말하며 엄격한 제한으로 시작한다. “나는 나의 글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할 곳은 없다.” 그는 단지 이러한 글들이 이후 “이론주의”로 인정되고 명명된 “잘못된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을 인정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위협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를 옹호하기”를 너무 바랬기 때문에, “그의 혁명적 독창성”을 너무나 보여주고 - 요컨대 용서할만한 죄 - 싶었기 때문에, 그는 “일반적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사변적 대립 형태로 진리를 오류와 대립시키는 단절의 합리주의적 해석”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실제 계급투쟁은 없었다.”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은 그것들을 치유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이론주의적 경향의 부산물, 구조주의의 애숭이가 우리에게서 빠져나갔다”*주1)는 것은 전력을 다해 구상한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1972년 알뛰세르는 “구조주의 용어와의 모호한 유희”를 인정한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맑스주의 과학이 다른 것들처럼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면서, 우리는 결국 맑스주의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주의의 위험에 다시 빠지며, 과학으로서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가 구조주의자는 아니었다.”*주2)

*주1){{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15 et 53}}

*주2){{ Ibid., p. 64}}

그러나 이러한 자아비판의 “요소”는 즉각 부채의 인정 형식으로 고백하는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유달리 강한 집념을 가진 죄인들이었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 그것도 이단적인 스피노자주의자였지만 “이단적 스피노자주의자는 거의 스피노자주의에 속하고”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는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이단의 교훈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알뛰세르는 스피노자로부터 특이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로부터 “정세”라는 되풀이되는 주제가 도출된다), 원칙으로서 인간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스스로에 대한 불투명성의 문제(이로부터 이데올로기라는 주제가 도출된다)를 취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언급을 세 번이나 고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이러한 유산의 목록을 작성한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탁월한 이론”; 자생적 이데올로기의 장르인 첫 번째 장르의 인식; 개별적, 보편적 객체의 인식으로서 세 번째 장르의 인식; 기원도 종말도 없는 “주체 없는 사상”이 나타나는 인식 이론; 마지막으로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놀라운 예견”으로서 육체의 주체. 따라서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헤겔적 초월성에 대항하는 맑스의 가장 강한 원조자로서 등장한다. 자연의 과정적, 생산적 역능 속에서 존재-주체를 제거하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로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피노자주의는 약점들을 갖는다. 그에게는 항상 헤겔이 맑스에게 물려준 것, 바로 모순이 결여되어 있다고 알뛰세르는 인정한다. 이러한 부재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 속에서 “효력을 나타냈다.” 모순의 결여는 그의 사상 속에 명백하고 또 다른 결여를 설명한다. “나의 초기의 글들에서 본질적으로 결여된 것은 계급투쟁과 이론 속에서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경미한 이론적 죄가 결정적인 정치적 죄가 된 것이다. 알뛰세르는 본질적인 것, 즉 그가 지속시키고자 했던 그 유명한 단절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 “핵심을 바꾸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자서전은 망설임을 털어 버린 자아비판에 새로운 견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한 더미의 새로운 “고백”. “나는 1964-1965년의 세미나에서 『자본』을 읽었을 뿐이다.” 아롱(Aron)이 “나를 ‘상상적 맑시즘’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알뛰세르는 “예를 들어 「새로운 비판」(Nouvelle Critique)의 글에서 1964년의 학생들을 거만하게 질책하면서” 아버지의 가부장적 역할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당에 대한 복종보다 이론에 대한 의무가 (내밀하게)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정상을 참작할만한 환경에 공감한다. 그는 이 텍스트가 자신을 “전율케 했으며” “1965년 『맑스를 위하여(꺽쇠)』에 포함되지 않도록 조심”*주1)했음을 인정하였다. 적어도 바로 이것이 부인된 글이다. 그는 1965년의 출판 이후 “극심한 정신쇠약”에까지 이르는 극도의 불안을 보였다. “내가 정치로부터 한 일이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하나의 순수한 사상.”*주2)

*주1){{ L'Avenir dure longtemps, op. cit., p. 189}}

*주2){{ Ibid., p. 162}}

당시에 우리가 그를 이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알뛰세르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던 이유이다.

자서전의 자아비판인 두 번째 자아비판은 때때로 굴욕적인 모습을 취한다. 우리는 그의 심리적 맥락을 이해하며, 여기서 발현된 비극적인 감정에 진심으로 동정을 갖고 있다. 발리바르는 거기에서 보다 심도 있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해체 나아가 파괴시키기 위해, 자아로 되돌아오는 경향”을 발견한다. 후회하는 죄인의 모멸감 속에서, 자기정당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60년대의 “이론주의”는 당내에 이론적 개입을 가능하게 했던 필요한 간지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맑스로의 회귀와 단절의 추구는 정통에 정통을 대립시키는 정교한 전략인 것이다. 요컨대 마키아벨리적 술수였다! 측근중의 측근이었던 발리바르는 이러한 음모론적인 설명 앞에 자신의 당혹감을 토로한다.

알뛰세르의 이론적 여정을 실패한 하나의 작업 - 자신에게는 고통이 따르는 - 으로 읽는 것이 보다 그럴듯하고 아마도 보다 풍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해후의 유물론”에 대한 그의 후기 글들은 이러한 실패한 노력의 값진 열매처럼 보인다. 이 글들은 회고적으로 여정, 자신의 “오류들”, 자신의 미 발표문과 삭제분분들을 밝히고 있다.

거기에서 알뛰세르는 “거의 전부 알려지지 않은” 유물론적 전통을 주장하고 있다. “비, 일탈, 해후, 포착의 유물론”, 즉 아주 오랫동안 자유의 관념론으로 배척되고 왜곡된 “불확정성과 우연”의 유물론.*주) 화석이 된 구조는 태산을 침식하는 미세한 일탈, 클리나멘의 사실사건적 효과로 산산 조각난다. 바닥은 잔재들로 뒤덮였다.

*주){{ Louis Althusser, "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1982),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op. cit., p. 540}}

이 사건은 기원이 아니라 분출이다. 알뛰세르는 여기에서 기원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 충실하다. “태초에 ... 있었다”가 아니라 단순하게 “.... 있다”. 그는 완강하게 우리가 나뒹구는 세계의 우연성을 수용하는 “있다”의 철학을 내세운다; 거기에서 역사는, “그 파기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 채, 이행하기에 난해한 다른 사실에 의해 이미 이행된 사실의 지속적인 파기”*주)일 뿐이다.

*주){{ Ibid., p. 547}}

“정세”라는 해후의 정치적 개념을 마키아벨리에 의존하듯이, 우리는 해후의 숨겨진 유물론의 분출을 루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결정들의 통일성으로서 정세이론의 묘사는 알뛰세르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사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고이다. “정세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세의 범주 하에서 정치적 문제를 사고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선 모든 결정들, 모든 구체적인 상황들을 불리한 점을 미리 참작하고 비교하여 고려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상은 에피쿠르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루소에 공통된 것이다. 그리고 맑스에게도 물론이다! “해후의 불확정성과 혁명의 필연성 사이에 찢겨진 지평 속에서 사고하도록 강요된” 하나의 맑스(un Marx)에게 공통적이다.

따라서 후기 알뛰세르에게 해후와 정세의 개념은 역사의 현실뿐만 아니라 정치의 현실과 투쟁 속에서 이들의 절합을 사고하는데 이용되었다. 여기서는 그가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정치와 역사 관계의 반전의 방향. 그는 벤야민처럼 역사적 논리의 추상에 대한 정치적 계기의 우위를 확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는 유물론자를 “기차가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달리는 기차를 타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자신의 개념으로 다시 돌아온다. 문구가 채플린식 절망적 유머의 강조법이다. 결국 알뛰세르는 그가 맑스의 것이라고 했던 모순, 해후의 불확정과 혁명의 필연성 사이의 균열을 그들 용어 중 하나를 단순히 제거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이전의 몇몇 텍스트에서 그는 맑스의 이론 속에서 필연성의 개념이 내세운 독창적인 내용을 강조하였다(그렇지만 맑스가 헤겔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인정함이 없이). 『맑스를 위하여(꺽쇠)』에서, 그는 엥겔스가 쿠르노의 방식대로 무수한 우연들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여는 우연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운동으로서 필연성을 표현할 때, 엥겔스가 굴복했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추상적 관계를 비판하였다. 왜냐면, “우리는 이러한 필연성이 그 우연들의 필연성인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왜 그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주1) 반면에, “맑스의 사상은 역사적 필연성의 문제에 있어 목적성이나 운명의 목적성 혹은 생산양식의 위계적 질서의 메커니즘과는 무관한 매우 독창적인 지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필연성을 방해하는 원인들 가운데 포착된 경향의 변증법”*주2) 속에서 필연성을 사고하였다.

*주1){{ Louis Althusser, Pour Marx, op. cit., p. 119}}

*주2){{ "Marx dans ses limites", op. cit., p. 452}}

알뛰세르는 우연과 필연성의 모순적인 통일성에 독창적 답변을 가져오는 “경향적 법칙”과 『자본』의 독창적 논리를 엿보고 있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그는 맑스가 “법칙의 내적 모순들”에 관한 장에서 개진한 개념의 낯설음에 대해 말한다. “경향(경향적 법칙, 경향적 과정의 법칙 등)이라는 맑스주의 이론의 결정적 개념의 특이한 위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주1) 이 문제는 구조주의의 피상적인 비난에 맞선 자신의 항변을 정당화한다. 실제 그의 맑시즘은 경향 속에서 모순이 과정을 압도함에 따라 이 문제를 벗어난다. “필연성의 양식 혹은 예외로서 우연성을 사고하는 대신에, 필연성을 우연의 만남의 필연적인 형성으로서 사고해야 한다.”*주2)

*주1){{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63}}

*주2){{ "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op. cit., p. 566}}

“해후의 유물론”에 대한 텍스트들은 작업과정 내내 거의 억제된 산만한 문제설정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뿌리 깊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알뛰세르는 역사와 사건의 모순적 갈등을 더 이상 잘 지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 불확정성은 극복되고 사실적 사건은, 알뛰세르의 본능적인 표현에 따르자면, “일탈(clinamen)의 기적”처럼 순수 우연이 돌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적 결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주의적 비관주의가 의지의 순수한 낙관주의, 달리 말하면 주체의 의지주의로 전환되는 극적인 반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사상에 대한 저항은 1978년 실패인 동시에 해방으로서 알뛰세르 개인적 비극의 직전에 덮친 맑스주의의 위기의 일환이다. “결국 맑스주의의 위기가 터졌다. 드디어 맑스주의의 위기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드디어 정정과 수정의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알뛰세르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위기의 폭발은 이론과 정치를 뒤엉키게 했다. 『수용소 군도』 이후, 가장 완강하던 부정은 “스탈린적 일탈”이라는 사소한 테제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맑시즘을 이론뿐만 아니라 조직과 실천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주)

*주){{ "Marx dans ses limites", op. cit., p. 362}}

그는 “맑시즘의 위기는 오늘날 맑시즘의 해방, 재탄생 그리고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단정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세브(L. Sève)가 신중하게 가정으로 제시한 “하나의 특이한 패러독스”를 드러냈다. “금세기 가장 강력한 맑스주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 아주 정확하게 맑스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주1) 전제사항, 암시 나아가 청산사항이 많은 이러한 “아주 정확하게 맑스주의자인 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지적 형성과정에 의해서 알뛰세르는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상과 희망을 상실한 채 끝나버린 그의 미완의 여정은 정치를 “가능한 효율성 없는 불확실한 정치라는 막다른 길”*주2)로 이끌었다.

*주1){{ Lucien Sève, "Althusser et la Dialectique", in Althuser philosophe, op. cit., p. 134}}

*주2){{ Pierre Raymond, "Althusser et le matérialisme", ibid., p. 175 -178}}

알뛰세르의 자발적인 고독과 동의된 칩거는 그를 레이몽(P. Raymond)이 “바깥”이라는 부른 모든 것들, 즉 계급투쟁, 사회적 실천, 현실적 프롤레타리아, “철학의 바깥일뿐만 아니라 이론의 바깥”과의 접합과 만남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가 철학의 조건하에서 정치를 접근하고 철학에 직접적으로 정치적 기능을 서로 부여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구별짓는 것은 정치와 맺는 철학의 유기적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철학은 정치투쟁 내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일반이론 혹은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주1)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이론에 의해 내세워진 실천은 “이론적 실천”으로 남았으며, 『아미앙에서의 주장(꺽쇠)』에서 요구된 “특정한 정세 속에의” 개입은 이론적 정세 속에서의 철학적 개입으로 남았다. “만약 내가 오늘 새로운 주장을 제안한다면. 철학은 결국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며 그것은 바로 이들의 정확한 위치, 계급투쟁(최종심급)과 다른 사회적 실천(과학적 실천)을 철학과의 관계 속에 놓는 것이다.”*주2)

*주1){{ Louis Althusser, "Notes sur la philsophie"(1967 - 1968),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op. cit., pp. 301-302}}

*주2){{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따라서 철학은 최고의 우군이다.
철학은 사실상 알뛰세르의 이론적, 정치적 벽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스피노자주의자였던가?” 문제는 맑스에 의해 진행된 전환들을 담보함이 없이 남겨진 존재의 문제이다. “스피노자와 또 다른 이단자들?”*주) 알뛰세르는 이러한 이단의 점화선을 포착하였다. 「프로이드와 라깡」에서부터 그는 19세기의 세 사생아들의 탄생을 반겼다. 맑스, 니이체, 프로이드. 그는 서구적 이성이 이들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주){{ 참조. Yirmyiahou Yovel, Spinoza et autres hérétiques, Paris, Seuil, 1993. 이 이단자들 가운데 프로이드와 맑스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물론 그는 자신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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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대중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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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모(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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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에서 [소렐/그람시와 달리]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이러한 우위 덕분에 지성은 대중운동들과 함께 하며……어쨌든 대중운동들이 역사의 진행방향을 바꾸는 것을 지성이 돕는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이는 이 때문, 오직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 1985.

"맑스는 '계급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하지 않고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한다." ; "공산주의는 복수의 의미들로, 즉 잉여노동의 제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의 종언, 시민성과 민족성의 구별의 종언으로 이해된다."―발리바르, 1989.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구분을 통해 새로운 시기[포스트포디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오늘날 공산주의의 구성은 성숙해 있다."―네그리, 1992.

"(창립적) 수학소, (추방된) 시, (재구성된) 정치와 (사유된) 사랑의 反궤변론적 짜임새는 내가 제기하는 철학적 몸짓이며 플라톤적 몸짓이다."―바디우, 1989.



1.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의 종언

오늘날 맑스주의를 1) 당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조직형태로 승인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2) 당에 부여되어 온 이러한 지위를 부정하는 맑스주의 또는 오히려 맑스주의 개조 시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예컨대, 발리바르, 네그리, 바디우: 편의상 맑스주의 Ⅱ). 양자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 있다.

고전적 맑스주의의 입장에서라면 맑스주의 Ⅱ를 맑스주의로 인정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운동과 따라서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실존은 당 형태 안에 자신을 한정할 수도 없었지만 또한 당 형태 외부에서 자신을 구성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인 이유만으로도 그러하다. 이 입장에서 보면 맑스주의 Ⅱ 내부의 변이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Ⅱ의 입장에서 보면 고전적 맑스주의 내부의 변이(맑스 자신, 레닌, 트로츠키, 마오,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기타)는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의 총체화에, 따라서 '당의 목적론'에 매여 있었다. 알튀세르 식으로 말한다면, 맑스는 역사의 '과잉결정'을 예감했지만 진정으로 고찰하지는 못했고 그의 후예들 역시 이 점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이야 달리 생각하겠지만, 맑스주의 Ⅰ, 한 세기동안 조직의 교의로서 작용해 온 맑스주의는 사실상 죽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은 아직 남아 있고 심지어 새로운 창건 시도조차 부분적으로 있지만, 거기서 맑스주의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의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은 불가역적으로 시효만료하였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당 형태는, 맑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육체노동과 지적노동의" 부르주아적 "분할"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 형태라는 제도는 '지적 차이'라는 '인간학적 차이'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되는 모순들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들의 발전의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의 전화이다. 당 형태가 루소 이래의 꿈인 인민의 자기통치를 위한 조직형태가 아님을 입증해 준 것은 이론이라기보다 역사이다.



2. 맑스주의의 개조의 방향

그렇다면 맑스주의는 비판적으로 개조되어야 한다. 문제는 맑스주의의 개조의 합당한 방향이다. 맑스주의는 맑스의 사상의 반역적 측면과 그의 이론의 과학적 측면을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서 양 측면 모두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반역의 측면에서 '대중의 정치'의 관점과 과학의 측면에서 '사회적 관계' 개념의 보존을 전제로 한다. 이 반역과 과학의 관계는 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맑스주의는 반역을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경향과 과학을 반역으로 환원시키는 경향, 과학주의와 의지주의(행동의 철학) 사이에서 동요해 왔다.

맑스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은 물질성 속에서 역사성을 사고하는 (또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사회적 관계의 전화의 과학으로서의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과, 모순 또는 적대의 역사성에 기반하여 역사를 파악한다. 사회적 관계를 공동체적 유대로 파악하는 지배적 관념에 대립하여 맑스는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사회적 관계가 물질성과 역사성의 준거인 이상, 예컨대 (바디우나 네그리의 경우처럼) 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을 떠나서 맑스주의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대가는 맑스주의의 고유한 과학적 측면의 기각이다.

물질성 속에서 역사성을 사고하는 시도에는 맑스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 물질적인 것으로는 사회적 관계 외에도 육체, 욕망 등이 있으며, 물질성의 준거를 이러한 것들 각각에 두는 역사유물론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육체의 물질성 테제와 사건의 역사성 테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푸코의 '역사유물론'과, 또한 욕망의 물질성 테제와 사건의 역사성 테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들뢰즈의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푸코와 들뢰즈의 역사유물론, 그리고 맑스의 거시정치와 푸코적인 저항의 미시정치, 들뢰즈의 욕망의 미시정치는 필연적으로 "조목조목 대립하는" 이론적 체계요 정치적 실천이다.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실천이성의 이율배반"(발리바르)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미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국가의 통제를 겨냥하는,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포위하려 하는, 국가의 인정을 얻으려 하거나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대중운동들의 조직은, 하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에,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의 구성에, 그리고 사회를 적대적인 부분들로 분할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사회에 대한 표상에,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항상 지닌 그러한 표상에 굳게 매어 있다.

사회적 시민성의 거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집단들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탈영토화를 겨냥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는 '사회적 연관'을 자연화시키는 흐름들과 발본적 탈개인화의 흐름들, 교통과 소비 및 통제의 거대기계의 이면일 뿐인 이 흐름들과……공명할 위험을 항상적으로 가지고 있다."(발리바르, 1996.)


요컨대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푸코/들뢰즈의 '역사유물론', 맑스적 정치와 푸코/들뢰즈적 정치는 서로 결합될 수 있는 체계들, 실천들이 아니다. 양편은 분리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대립한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립한다. 맑스의 이론과 푸코/들뢰즈의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맑스주의를 개조 또는 '확장'할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론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일 것이다.(주1)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종합 또는 결합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주2) 그러나 무의식의 초개인적[개인횡단적] 성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초개인적인 어떤 현실을 대상으로 하며, 그리하여 양자의 질문을 서로 작용시키는 것은 유익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맑스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네그리는 대신 '주체의 구성적 역능'에 근거한다. 네그리의 이론화는 맑스주의의 주요한 경향들 중의 하나를 이루는 '행동의 철학'(또는 '결단의 철학')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의 노선에서는 맑스적인 대중의 정치의 관점은 사실상 기각된다. 그가 중시하는 multitude라는 범주는 맑스적 대중과 들뢰즈적 소수자 사이에서 동요하는 범주라 할 수 있다.(주3)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세 속에서 그가 제출하는 일종의 '지식프롤레타리아론'으로서의 '사회화된 노동자'론은 이 동요를 잘 보여준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적 기획은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유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한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의 총체화에서 벗어나 계급적대와 지적적대를 절합하는 시도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맑스주의의 진화론적, 종말론적 공산주의 상과 전통적인 혁명 노선을 기각하지만, 그러나 그의 이론화에서는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 이념은 결코 포기되지 않으며,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학적 분석능력이 보존된다.



3.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

맑스주의의 개조 작업 속에서 발리바르는 확대된 해방의 정치로서의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 이로부터 '반폭력'의 문제설정을 제출하며, '해방'과 '변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다른 정치로서의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 개념을 가공한다.(주4)

발리바르의 논의는 맑스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회적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다시 말해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고 보는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은 개인주의와 유기체주의 사이의 부르주아적 대립을 무효화시킨다. 이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론적 인간주의'와 그에 대한 보완물로서의 유기체주의 모두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맑스는 계급관계를 총체화함으로써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의 비판적 함의를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했다.

맑스의 이론화의 이러한 내재적 한계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그것을 규정하는 맑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를 전면적으로 문제삼는다. 발리바르는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단순히 기각하기보다는 그것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하려 한다.(주5) 즉 그는 노동의 인간학에 토대를 둔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내적 한계들이라는 질문, 즉 계급투쟁과 모든 곳에서 일치하지만 그것으로 절대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초개인적인 것의 형태들이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계급적대와 전혀 다른 유형의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들로서 성의 차이와 지적인 차이라는 인간학적 차이를 식별하고,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의식과 담론 밖으로 추방되어 온 이 차이들과 계급적대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한다.

정치의 개조를 위한 발리바르의 작업의 개조의 출발점은 '인권의 정치'의 새로운 정식화이다. 인권의 정치란 인간의 권리들을 부단히 확장시키고 그것들을 시민의 권리들로서 발명해 내는 정치이다. 그는 인권 일반을 무조건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보로 만드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인권이라는 관념 속에서 하나의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담론만을 발견하고 집단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 인권을 지양하려 하는 종래의 사회주의적 기획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치의 원리를 그는 평등과 자유를 동일화시키는 '평등자유(equaliberty) 명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의 차이, 지적인 차이라는 '평등의 제도화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 또는 모순의 어떤 유형'이 근대 정치 속에서 억압되어 왔다. 근대정치를 괴롭힌 이러한 모순은 '평등자유의 변증법'을 더욱 전개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화(해방)의 내용은 이제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중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의 생산으로서 전진해야 한다. 인권의 정치의 이러한 확장은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중화시키는 시민성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그러한 차이를 전화시키는 명시적 경향을 갖는, 새로운 시민성 개념을 요구한다(그에 앞서 인권의 정치는 민족성과 시민성의 구별의 종언을 요구한다).

인권의 정치는 착취, 불평등, 차별 등과 같이 보편적 권리를 부정하는 폭력 또는 압제에 대한 봉기적 행위를 항상 전제한다. 이 봉기적 행위는 불가피하게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즉 대항폭력을 수반한다. 인권의 정치는 기존 질서의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들과 대결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오늘날의 일반화한 폭력의 상황 속에서 폭력의 실천적 부정의 두 형태인 비폭력과 대항폭력 간의, 또는 혁명적 변화와 합법적 변화 간의 전통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를 다급히 발명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해방, 변혁, 시빌리테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발전시키면서 맑스주의를 개조하려는 발리바르의 최근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을 절합하는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의 제출, 그리고 그러한 도식에 입각한,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개념의 정식화이다.(주6)

발라바르는 정치는 인민 및 인민 내부의 개인들의 구성적 행동으로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위에 정초된다고 보는, 루소가 대표하는 관점을 '정치의 자율성'으로 명명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해방(emancipation)이라는 윤리적 형상'에 조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개념은 인민의 내적 갈등, 내적 분할이라는 아포리아를 내장한다.

루소적 관점의 대극에서 맑스는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념을 주창하는데, 이는 정치의 진실(진리)과 현실성은 그 자신 안에, 즉 자신의 정치적 의식 또는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밖에, 즉 외적 조건들 및 대상들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타율성, 즉 구조적 및 정세적 조건들에 결부된 정치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형상에 조응한다. 그 작동에 각종의 폭력을 요하는 생산과 착취의 구조의 변혁에는 폭력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 또는 '폭력과 대항폭력의 순환의 종언으로서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유토피아가 그려진다.

정치의 타율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스피노자가 분석한 상징적 폭력 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모든 정체에 적용가능한 민주화의 이론으로서의 정치적 교통'의 이론을 발견한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교통의 활동인데, 이 교통은 무지의 관계, 미신의 관계,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사고는 그 자신의 교통을 항상 이미 가능성의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자유화(해방)의 조건으로서의 인식을 위한 투쟁은 정치적 실천이다. 스피노자적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모두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자유로운 교통이며, 그 조건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이다.

스피노자적 정치에서 변혁의 대상은 '생산과 착취의 구조'가 아니라 '믿음과 교통의 구조'이다. 이 구조 속에서는 '공동체적 도식(schema)'이 육체·행동·가치·문화·소속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규정에 항상 투영됨으로써 교통과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자 형태로 나타나며, 이로부터 폭력이 발생한다. 요컨대 집단적 주체성의 창설에 폭력이 따르는 것이다.

맑스가 분석하는 생산과 착취의 구조와 스피노자가 분석하는 '믿음과 교통의 구조' 사이에 놀라운 평행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의 분석 사이에는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맑스가 정치의 조건인 공동체적 소속과 따라서 상징적 폭력의 영역, 즉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면, 스피노자는 '경제적' 적대의 감축불가능한 성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

정치의 조건 또는 타자로서의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의 비사고와 '일반화된 경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사고는 각각 그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발리바르가 맑스의 '생산적 노동의 인간학'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교통의 문제, 따라서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정치의 근본문제로 사고하는 스피노자가 이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사고를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학적 성찰 위에서 발리바르는 생산양식들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들('상징적 구조들의 작용 하에서의 주체의 구성 양식들)의 문제설정의 절합을 추구한다.(주7)

이 두 개의 문제설정의 절합은 역사적 인과성에 대한 맑스의 도식을 넘어섬은 물론 알튀세르의 도식에서도 더 나아감을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 새로이 구성될 도식이 "역사성의 보충물 또는 보완물처럼 작동하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합" 대신에 "서로 양립불가능하면서 동시에 분리불가능한 설명의 두 '토대들' 또는 두 결정들, 즉 주체화양식과 생산양식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양자의 결합의 필연성을, 어떠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도 상상적인 것(이데올로기)의 효과들은 현실적인 것(경제적 적대)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의 효과들은 상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발리바르는 맑스를 패러디하여,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듯이 경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는데, 이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는 각기 자기 자신의 효과들의 유효한 원인인 타자를 통해서만 역사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과성 도식 속에서는 '최종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가 정치의 타자, 즉 정치의 현실성·원인들·효과들의 장소라면, 이데올로기는 이 타자의 타자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타율성의 타율성'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에 '해방'으로도, '변혁'으로도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정치가 조응하는데, 이러한 정치의 윤리적 지평이 '시빌리테'이다. 시빌리테의 정치는 '동일성들의 폭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모든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개인은 단일한 동일성, 단일한 소속을 갖지 않으며, 반대로 불균등하게 포함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등적인 여러 동일성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동일성의 형성 즉 동일화와 관련하여 두 개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극한적인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성을 유일하고 일의적인, 집괴적(集塊的)이고 배제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이 모든 역할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부동(浮動)하도록 허용하는 상황이다. 폭력의 상황은 개인들과 집단들이 이 극한들 중의 한 쪽을 향해 내몰리게 될 때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양극 사이의 잔혹한 진동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할 때에도 산출된다.

동일화들과 소속들의 복수성, 복잡성, 갈등성이 감축되어야만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감축하는 것이 제도들의 역할이다. 제도들은 '상징적'이고 물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예방적 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반제도들의 경우에는 조직된 대항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수행한다. 발리바르는 총체적 동일화와 부동적(浮動的) 동일화라는 두 극한들 사이에서의 동일화들의 갈등을 규제하는 한에서의 정치를 '시빌리테'라 명명한다.

시빌리테로서의 정치는 '위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가능하다. 아래로부터의 시빌리테의 정치는 국가의 고유한 폭력에 대한 대안이자 동시에 국가의 무능력에 대한 치료제로서 정의된다. 인민이 국가에 대한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고타강령 비판])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보통의 시민들로, 계급들로, 대중masse의 당파들로 이루어지는) 다중(multitudes)이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도록 강제하고 공적 공간에 시빌리테의 규범들을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곧 시빌리테의 정치가 된다.

이 시빌리테의 정치는 정치의 자율성에 조응하는 해방의 정치, 정치의 타율성에 조응하는 변혁의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 개의 정치 개념은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며, 각자는 역사적 시간과 생활공간 속에서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과 시빌리테 없이는 해방이 없으며, 해방과 변혁이 없이는 시빌리테가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 가지 정치의 절합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빌리테의 정치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의는 아직 추상적이며, 그가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켜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 개념이 정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前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 개념으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맑스적인 변혁의 정치가 예컨대 푸코적인 '저항의 미시정치'나 들뢰즈 '욕망의 미시정치'와 같은 것으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각각의 한계들과 유효화의 조건들을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5.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대중의 정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맑스주의 개조를 필연화시키고 맑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을 특권화시킨다. 발리바르에게서, 계급투쟁과 같은 정도로 보편적이고 결정적인 사회적 적대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이 차이가 발생시키는 억압' 및 '지적 차이'의 재발견은 상이한 해방들의 절합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게 스피노자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중에서 지적 차이와 결부되는 지적 해방의 문제를 '대중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철학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고는 교통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따라서 지적 해방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적 분석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가 된다. 맑스와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은 대중의 관점의 전제조건이며, 맑스와 스피노자의 모순적 결합의 가능성의 토대이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로서의 교통관계를 특권화시키는 반면에, 네그리는 권력과 역능의 존재론적 구분을 특권화시킨다. 발리바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에서 전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으로 회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역과 과학을 결합시키는 맑스에게 과학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이다.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을 기각하는 네그리의 이론화에서는 목적론의 위험이 어른거리게 마련이고 과학의 희생 위에 혁명적 언사가 번성하기 쉽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론화에서는 맑스적인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대중'의 문제설정, 그리고 그 모든 위험을 포함한 '대중의 정치'의 관점이 소실된다.

반면 스피노자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보완된 맑스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유지되는 한 발리바르의 이론화에서는 적어도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 이념은 포기되지 않는다. 특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지배하는 것 같은 오늘의 홉스적 상황에서 이 점의 중요성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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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일'로서의 '신좌파와 구좌파의 수렴'을 전제하거나 제시할 정도로 순진한 연구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2) 심리를 구조화하는 결정적 힘을 욕동에 부여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상징적 질서 부여하는 라캉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는 바디우적 시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하겠다.

(주3) "이 프랑스 이론들[푸코, 들뢰즈, 과타리의 이론들]에서 존재론은 변증법에 대립하여 제기되며, 사회투쟁들과 자본주의적(사회적, 생산적, 국가적) 재구조화 사이의 관계를 지배할 가능성은 권력으로부터 제거된다. 이러한 이론들의 한계는 그것들이 권력 비판을 탈주선, 사건과 대중의 화려함으로 제기하지만, 전복적 소수자의 기관이 될 수 있는 구성권력을 확인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사실에 있다." 네그리, {맑스에 관한 20가지 테제}, 166쪽. 당연히 푸코나 들뢰즈의 입장에서라면 네그리의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용납될 수 없다.
"사회화된 노동자의 생산적 노동의 특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사회적 협조의 창시자라는 점이다.……그들은 상급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 …… 사회화된 노동자는 집단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사회화된 노동자는 일종의 공산주의의 현실화이고 그것의 발전된 조건이다. 그에 비하여 소유주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필요조건도 아니다." 네그리, {전복의 정치학}, 106-7쪽.

(주4) 난감하게도 적절한 번역이 불가능한 이 civilite는 '공동체의 창설/통치성'을 특징짓는 '문명/문화'(영어의 civility)이자 '인륜/예절'로서의 '시민적 도덕성'(독어의 Sittlichkeit)이다.

(주5) 철학적 인간학의 하나로서의 노동의 인간학의 명제는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노동의 인간학의 명제"(이진경)는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희화이다. "노동의 인간학에서 벗어나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고 변환시키고자" 하는 것은 계급 개념을 제거하고 맑스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이진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욕망의 인간학, 코나투스의 인간학, 사랑의 인간학 등과 같은) 다른 종류의 인간학으로 보완하자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사물들에는 서로 보완 가능한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주6) 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1996.

(주7) '주체화'(sujetion)는 '복종'과 '주체화'(주체로 되기)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주체화양식'은 '주체화/복종 양식'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의 양식들 또는 형상들로서 1) 고대적인 시민성에 조응하는 "일방적 말"로서의 주체화[복종]의 양식과 2) (알튀세르가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 부른 바 있는) "내면의 소리"로서의 주체화의 양식에 더하여 3) "권력관계들, 언어의 경제, 신체와 정신의 상상을 결합할" 또다른 주체화의 양식을 제시한다. 이들 주체화양식들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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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인권문헌읽기]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

 

 

[인권문헌읽기]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유엔)

 

유엔의 평화권 선언, 분쟁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증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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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잔인한 7월이었다. ‘평화로운 빗소리’라는 식의 표현을 7월의 집중호우 속에서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빗속에 생존권을 떠내려 보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고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또다른 ‘비’를 내리는 세력들이 있다. FTA와 평택미군기지의 강행, 노동자 때려잡기,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대한 학살 등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있다.

빗소리의 느낌이 맥락에 따라 다르듯이 평화의 개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그것이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실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가짜 평화에 맞서 평화를 규정하려는 노력들은 많다. 좁고 넓게 혹은 길게 가깝게 평화를 ‘이런 것’이라 규정하는 노력 속에서 바라보는 평화는 참 평화롭다.

“평화는 삶에 대한 존중”, “평화는 인간의 가장 값진 소유물”, “평화는 무장 갈등을 끝내는 그 이상의 것”, “평화는 인간과 환경의 조화로운 공존”,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빈곤과 기아 등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 “평화는 먼 훗날의 이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방식으로 창조되고 확대되는 행위양식”, “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및 인류 간 연대의 원칙에 대한 뿌리 깊은 헌신”…

“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란 말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당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이 1984년 채택한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선언’이다. 이 선언은 인류의 평화적 생존권이 모든 인권의 기초임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강조하고 있다. ‘전쟁위협의 종식’,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이란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평화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가장 좁은 의미의 평화에 대한 약속의 재확인이다.

1984년 유엔은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선언’을 발표했다.<출처; UN PHOTO>
이 선언이 채택된 것은 유엔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1985년을 ‘세계 평화의 해’로 선포하기 위한 합의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더 큰 피를 불렀다는 역사적 교훈은 넘쳐난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한 것의 결과가 어떠하지를 잘 아는 속에서 출발한 유엔은 그 헌장 첫머리에서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의 힘을 합”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 연장선에서 1949년 ‘평화의 본질에 관한 선언’은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어떤 국가에 대해서든지 그 인민의 의지를 파괴하려는 모든 직간접적 위협이나 행위를 삼갈 것”을 가장 엄숙한 평화 협정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78년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들의 준비에 대한 선언’에서는 “침략전쟁, 침략전쟁의 계획·준비·추동은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서 국제법에 의해 금지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1984년 선언은 앞서 원칙들을 반복·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력에 기념할 날짜를 채워가고 평화에 대한 선언문을 쌓아가는 것이 평화의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은 아프게 보여준다. 이 모든 국제인권법을 백지화시키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표정은 이런 선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선언이 채택되기 얼마 전인 1982년에도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침략하여 약 1만8천여 명의 생명을 학살했고, ‘세계평화의 해’에는 튀니지의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를 폭격하여 수십 명을 살해했다.

‘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라는 말이 있다. 군사적 공격에 의해 생명이 위협받는 곳에서 ‘인권’의 개념은 출발조차 힘들어 보인다.<출처; Islamic Relief>


평화에 대한 말을 실천으로 번역해 내기 위해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반평화와 반인권의 현실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기본권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위험과 실제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경제적 압력, 실업, 저발전, 기상의 변화, 사막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인간이 유발한 환경파괴 등을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알아야 한다.

평화에 대한 또 다른 선언문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전쟁을 창안한 바로 그 종(인류)이 평화도 고안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 있다.”

유엔,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1984년 11월 12일 유엔총회 결의 39/11)
유엔총회는

유엔의 주요 목적이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임을 재확인하며,

유엔헌장에 규정된 국제법의 기본적 원칙들을 상기하며,

인류의 삶에서 전쟁을 근절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핵 파멸을 막는 것이 모든 인류의 의지와 열망임을 표현하며,

전쟁 없는 삶이야말로 나라들의 물질적 복지, 발전, 진보를 위하며 유엔이 선언한 권리와 기본적 인간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제1의 국제적 필수조건임을 확신하며,

핵시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보존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조건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인류의 평화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각 국가의 신성한 의무임을 인정하며,

1.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2.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고 그 이행을 증진하는 것이 각 국가의 기본적 의무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3. 인류의 평화권 행사를 보장하는 것은 전쟁의 위협, 특히 핵전쟁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가들의 정책을 요구하며,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와 유엔헌장에 기초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4. 모든 국가와 국제 조직은 국가적 및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적절한 조치를 채택함으로써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이행을 지원하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인권오름 제 15 호 [입력] 2006년08월01일 21: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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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 아감벤 : ‘삶-정치’와 ‘예외 상태’



김상운 , 양창렬 (자율평론)




특정한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분류한다고 해서 과연 그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지오르지오 아감벤에게 어떤 꼬리표를 붙일 수 있을까? 미학 이론가, 벤야민 연구가, 정치 철학자? 설명 불가능의 지대에 있는 것은 사실 어떤 특출한 인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람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모든 영역이 구분되기 어려운 그야말로 ‘비차이의 지대’에 위치한 사람이 “지오르지오 아감벤”이라고 한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철학적 입지를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네그리-하트의 󰡔제국󰡕이나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폭과 깊이에 있어서 여느 철학자들 못지않으며, 나름의 독창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기에, 앞에서 언급한 어떤 하나로 축소되기 보다는 그의 작업 전체에 대해 직접적인 독해와 평가가 다방면에 걸쳐 이뤄져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행은 무엇보다 활공(survol), 말하자면 아감벤의 (정치!)철학에 대한 활공이다.

아감벤의 정치 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저서들로는 ‘통일 없는 단독성’에 입각한 공통성을 주장하는 선언적 저작인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tà che viene, 1990), 󰡔호모 사케르󰡕 연작

<주석 1>--------------------------------------------------------------------------------
󰡔호모 사케르󰡕 연작 중 지금까지 출간된 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권인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헐벗은 삶󰡕(Homo Sacer, 1995), 3권인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 : 문서고와 증인󰡕(Quel che resta di Auschwitz. L'archivioi e il testimone, 1998), 3권의 보론적 성격을 띤 󰡔남은 것의 시대󰡕(2000)가 있다. 한편 2003년에는 연작 시리즈의 2권 1부에 해당하는 󰡔예외상태󰡕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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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사케르󰡕 1권의 토대이자 보충이 되는 논문 모음집인 󰡔목적 없는 수단들 : 정치에 관한 노트󰡕(Moyens sans fins. Notes sur la politique, 1995) 등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사정상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 연작에서 특히 ‘삶-정치’(bio-politique)와 ‘예외 상태(l'état d'exception)’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 머물고자 한다. 활공치고는 너무 소심한 것 아니냐는 타박을 감내하면서, 그러나 속으로는 이보다 더한 활공은 없다고 자부하면서!


1. 삶-정치


󰡔호모 사케르󰡕(를 비롯한 제반의 책들)는 지금 우리가 하나로 사용하는 ‘삶’이란 단어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둘로 구분되어 쓰였음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된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zōē), 그리고 이런 저런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식이나 방식’을 가리키는 ‘비오스’(bios).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 둘은 각기 ‘오이코스’에서의 자연적 삶과 ‘폴리스’에서의 정치적 삶으로 구분되었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은 비단 고대 그리스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공’과 ‘사’를 구분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여전히 잔존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분석의 선구자는 무엇보다 푸코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생물학적 삶이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에 통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즉 국민들의 삶 자체를 관리하는 것이 통치 행위의 중심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던 것은 푸코의 위대한 작업이 아니었던가? 아감벤은 이 점을 수용하지만, 푸코에게는 집중 수용소와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의 통치 구조에 대한 연구가 공백으로 남아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점에서 아감벤의 ‘삶-정치’ 연구는 푸코의 작업을 확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주석 2>--------------------------------------------------------------------------------
한편 이 글에서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일련의 분석들이 아감벤에게 미친 영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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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감벤과 푸코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푸코가 개체들의 자연적 삶에 대한 관심을 자기 내부에 통합시킴으로써 통치하는 ‘정치 기술’과 개체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자기 기술’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일종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반면, 아감벤은 위와 같은 전체화 과정과 개체화 기술은 구분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푸코처럼 단순히 ‘폴리스 내에 조에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적인 자기 주체화가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감벤은 조에가 단순히 폴리스 내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폴리스 내에 ‘포함적으로 배제되는’ 복잡한 구조에 착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이처럼 ‘포함적으로 배제된’ 삶을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로, 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힌트를 얻은 ‘헐벗은 삶’으로 개념화한다. 부모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폴리스의 ‘경계’를 헤치거나 손님에게 부정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은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처벌’은 엄밀히 말해서 근대적 방식의 ‘처벌’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로 명명된 사람은 세속의 법질서 바깥에 존재하므로 신과 동격의 인물로 취급되며, 따라서 그를 종교적 의례를 통해 희생시킬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점(적‘법’한 살해)에서 여전히 인간 공동체에 포함되어있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그는 법 바깥에 있는 동시에 안에 있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헐벗은 삶의 단적인 예는 나찌즘 체제하에서 집중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의 삶이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 1권 3부에서 다뤄지는 ‘근대의 삶-정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목적 없는 수단들󰡕에 실린 ‘수용소란 무엇인가?’,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 등을 통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현대의 삶-정치 패러다임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우리가 오늘날 성스러운 인간에 대한 미리 결정된 형상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성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지적을 따른다면, 이제 어느 누구든 희생되지 않으면서,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삶-정치의 모델은 푸코가 말하듯이 근대 주권 권력의 새로운 특징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탄생하던 바로 그 때부터 그것이 헐벗은 삶과 맺어온 본원적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푸코와 아감벤을 나누는 근본적 항의 다른 모습이다.

󰡔호모 사케르󰡕의 서론에서부터 아감벤은 바로 ‘삶-정치’적 문제에 입각해 근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전체주의적 지배체제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조에’의 권리요구와 해방운동으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헐벗은 삶’ 그 자체를 삶의 형태로 만들어 내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근대의 민주주의가 맞서 싸워야할 예속의 장소에서 오히려 인간들의 자유와 행복의 둥지를 만들려고 했음을,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권과 시민권’에서 해방의 테제를 찾으려는 정치적 시도들은 위와 같은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선언들은 사실 국민-국가의 법-정치적 질서에 자연적 삶이 등록되었음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형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겨누는 비판의 화살은 인도주의적인 인권 운동 조직에도 마찬가지로 돌아간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의 퀭한 눈, 폭탄 파편에 사지를 잃은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서 그러한 조직은 인간의 삶을 여전히 헐벗은 삶, 성스러운 삶의 형상 속에서 이해하고 또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제반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헐벗은 삶’에 관한 결정을 최고의 정치적 기준으로 삼았던 나찌즘과 파시즘은 비참하게도 언제까지나 오늘날의 문제로서 존재할 것이다.

2. 수용소라는 문턱

‘삶-정치’와 ‘예외 상태’의 문턱 혹은 두 개념이 수렴되는 지점인 ‘수용소’를 살펴보자. 아감벤에게 수용소란,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열리는 공간이며, 현대 정치 공간의 비밀스런 모체이자 노모스이다.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던지는 아포리 중 하나는 역사적 인식에 대한 아포리이다. 우리에게 보고된 사실과 진실(진리)이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언자들의 증언의 문제를 지적하는 프리모 레비의 역설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모든 증언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공백을 포함하는데, 완전한 증언은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졌던 사람들의 증언, 또는 가스실에 끌려가기 전부터, 말하자면 신체적 죽음을 맞이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의 죽음이 시작되었던 사람들인 ‘이슬람인들’2)

<주석 3>--------------------------------------------------------------------------------
아감벤에 의해 지칭되는 ‘이슬람인들’이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실제 이슬람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스실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끼리 만들어낸 말이다. 피부는 마치 멍이 든 양 얼룩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문턱을 가리킨다. 그들의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이슬람인들이 있던 공간인 아우슈비츠는 ‘죽음 없는’ 시체들을 양산하는 곳이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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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증언뿐이기 때문이다. 생존해서 증언하지만, 진실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자들(인간, 말하는 자)과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자들(비인간, 벙어리) 중 과연 누가 증언의 주체일까?라고 아감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증언의 주체 ― 이것은 그에게 동시에 윤리적 주체이기도 하다 ― 란 탈주체화를 통해 증언을 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생존자들은 이슬람인들의 자리에 서서 대신 말함으로써, 즉 스스로를 탈주체화(désubjectivation)함으로써만 증언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증언’이란 이 두 증언의 주체가 함께 참여하고 공존하는 과정인 셈이다. 엄밀히 말해 완전한 증언은 비인간의 편에 있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동일성이 결코 완전할 수 없긴 하지만, 인간을 통째로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절대적 비인간화는 없는 셈이다), 항상 무언가는 남기 마련이고, 이 남은 것은 언제나 죽음 속에서도 생존하는(survivre) 것으로서, 인간, 즉 남은 자들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 증인이란 이 남은 것을 가리키며, 아감벤의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4)

<주석 4>--------------------------------------------------------------------------------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억압할 수 없는 최소치로 남는 것’이라는 그의 논리는 푸코의 논리(자기 주체화의 가능성으로서 남아있는 외부)와 동형적일 뿐 아니라, 그가 즐겨쓰는 ‘포함적 배제’(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결국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체계)의 논리와도 어긋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포함적 배제’라는 그의 논리는 푸코에 대한 비판, 즉 저항의 가능성을 위축한다는 비판을 똑같이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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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외 상태


예외 상태를 개념화하기 위한 아감벤의 작업은 󰡔호모 사케르 1: 주권 권력과 헐벗은 삶󰡕(1995)이나 󰡔목적 없는 수단들󰡕(1995)에서부터 이미 시작되며, 󰡔호모 사케르󰡕 2권 1부인 󰡔예외 상태󰡕(2003)를 출간하면서 그는 이 문제를 한 단계 더 심화시킨다. 그만큼, 이 개념은 그가 수년간에 걸쳐, 놓지 않고 있는 정치철학의 중요한 문제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의 여덟 번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예외 상태’라는 것이 이제 규칙[상례]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예외 상태를 도래시키기라는 과제를 우리의 눈앞에 두게 될 것이다.” 예외 상태와 관련된 아감벤의 작업은 벤야민이 우리에게 남겨준 위 과제에 대한 약속 이행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아감벤의 작업을 두 부분으로 간략하게 나누어 볼 것이다. 즉 예외 상태를 인식하기 위한 작업 그리고 진정한 예외 상태를 도래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

일반적으로 예외라는 것은 규칙의 부정 혹은 대립물로서 간주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논리 구조 속에서는 규칙이 예외에 선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외는 규칙이 아닌 것, 그것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코, 키에르케고르, 칼 슈미트 등은 이러한 통념과는 반대로 '예외가 규칙을 정초한다'라는 입장을 가진다. 이러한 테제는 기본적으로 예외가 규칙에 선행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논리가 뒤집힌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외가 규칙의 단순 대립물이 아니라는 통찰에 근거한 것이다.

즉, 예외는 규칙의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일단 이것이 아감벤이 예외 상태를 인식하는 방식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즉, 예외 상태란 법질서에 외적이지도, 내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혹은 규범이 중단된다는 것이 곧바로 규범의 폐지를 함축하지 않듯이, 예외 상태 혹은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법질서와 무관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예외 상태는 법질서에 귀속되면서도 여전히 바깥에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예외 상태의 위상적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포함적 배제'의 논리는 서구 정치에서 폴리스 안에 조에(헐벗은 삶)가 포함되는 동시에 배제된다는 󰡔호모 사케르󰡕 1권의 논리와 동형적이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에 대한 개념화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칼 슈미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주권(le souverain)의 측면에서 예외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아감벤의 중요한 참조인 중 하나이다.

반면, 세 번째로 예외 상태에 대한 다른 개념화도 가능하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의도가 돌출하는 예외들을 예외 상태에서의 주권의 '결정'을 통해 법질서 내로 포섭하려는 시도 ―이점에서 이 주권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화한 바 있는 공리계의 논리와 일치한다― 였다고 한다면, 벤야민이 <역사 개념에 대하여> 여덟 번째 테제에서 말한 '진정한 예외 상태'혹은 '실제적 예외 상태'는 예외 상태를 법과 무관한 절대적인 상태로 만들려는 기획으로서 ―이것은 역시 들뢰즈-가타리의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의 그 어떤 관계도 거부하는 인간 행위, 내전, 혁명적 폭력으로 해석된다.

이 점에서 전행성적 정치 질서의 주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원해진 예외 상태'


<주석 5>-------------------------------------------------------------------------------
현대의 전체주의 그리고 미국의 부시 정부는 예외 상태를 통한 적법한 내전 상태를 설립하는 바, 이것은 가히 영구적인 긴급 상태 혹은 비상사태를 자발적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불안을 조장-위장함으로써 과도한 안전장치를 정당화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정치 질서 내에 배제적 포함의 장소를 구축하는 데, 이것은 이전의 민족 국가적 틀 내에서는 게토 혹은 캠프였지만, 제국적 질서 내에서는 불량 국가 혹은 적국, 예를 들어 이라크를 통째로 캠프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라크 민중의 삶은 단숨에 헐벗은 삶이 되는 동시에, 가스실에 줄맞춰 들어가던 현대판'이슬람인들'(musulmans)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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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맞서 싸우기 위한 아감벤의 중요 참조인 중 한 명은 역시 벤야민이다. 아감벤과 벤야민의 이러한 친화성은 놀라운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아감벤은 이탈리아판 벤야민 전집의 편집인이며, 벤야민에 대한 여러 논문 ―Potentialities에 편집, 수록됨― 과 단행본, 󰡔유년시절과 역사󰡕를 쓴 바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법의 밀착 관계에 대해 파헤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정치한 해석은 아감벤의 정치적 대안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이것을 폭력과 법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일단, 벤야민은 위 논문에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변증법을 넘어서는 전혀 다른 폭력으로서 순수 폭력, 신의 폭력, 혁명적 폭력을 제시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아감벤은 네그리의 입헌 권력 혹은 구성 권력과 거리를 취한다. 아감벤이 보기에 구성 권력/ 구성된 권력 쌍은 법정립적 폭력/ 법보존적 폭력과 상동적이기 때문에, 구성 권력은 새로운 법을 정초하기 위한 폭력에 불과하며, 결국은 주권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성권력이 구성된 권력으로 소진되지 않는다(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이나 모택동의 중단 없는 혁명) 혹은 구성 권력은 그 창조적 역량을 잃지 않는다(네그리의 입헌 권력론)는 주장을 가지고는 주권성의 아포리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법과 무관한 폭력, 폭력과 무관한 법을 주장하는 아감벤에게는 대신 정치적'주체'의 구성에 대한 논의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의 저술 속에서는 부재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에서 언급되는 윤리적 주체, 증인, 남은 것을 제외한다면― 하게 되는 듯이 보인다.

아감벤은 이러한 폭력이 사실상 바로크적인 종말론(eschatologie)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는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 종말론이 최후의 심판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모르고, 저 너머의 것도 모르며, 반대로 세기에 내재적인 그러한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아감벤은 데리다가 󰡔법의 힘󰡕 말미에 말하는 신의 폭력의 서명자로서의 신,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줄 수 있는 오해와 오독의 가능성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 폭력에서 '순수'라는 말은 어떤 목적과 관련해서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닌 순수 수단,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적 없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순수 폭력은 타자를 지배하거나 금지를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폭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행동하고 발현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예외 상태 이후에, 계급 없는 사회에 우리에게 도래할 '법'은 어떤 모습일까? 일단, 이러한 법의 도래를 위해서는 기존의 법을 단순히 강제와 금지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법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정립하는 것도 보존하는 것도 아닌, 법을 버리고 철거시켜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폭력과 법의 밀착 관계를 해소시켜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법은 카프카가 말했던 '더 이상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되는 법', 푸코가 말했던 '새로운 법',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일 것이며, 타자를 통치하기 위한 것도,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아닌 법,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용법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법의 모습을 띌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마냥 이 법을 가지고 놀게 되리라는 것이 아감벤의 설명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목적 없는 수단들󰡕에 수록된 「삶-의-형태(Forme-de-vie)」라는 논문에서 개진된 아감벤의 전망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구 정치에서 우리의 생물학적 삶이 중요한 정치적 화두가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언제나 그 삶이 희생 불가능하지만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호모 사케르)의 헐벗은 삶으로 되어버리고, 그 삶이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되고 있음을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국가-주권에 맞서 아감벤은 역량의 삶(une vie de la puissance) -- 여기에서 역량은 󰡔호모 사케르󰡕 1권에서 언급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가능태(la puissance)/ 현실태(l'acte)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사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공통된 사유의 경험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이미 공통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다양한 다수성 혹은 다양체로서 존재하는 우리가 그저 '무리'나 '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가진 소통가능성을 통해 공통된 것을 사유하는 경험이 중요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요강󰡕에서 지나가듯 언급했으나, 현재의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겐 더 없이 요청되는 '일반 지성(general intellect)'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삶으로부터 그것의 형태를 분리시켜 내려는 국가 주권에 맞서 끊임없이 삶과 그것의 형태를 결합시키고, 무수히 다양한 새로운 삶의 형태들을 발명해내는 것. 이것이 곧 아감벤이 말하는 역량으로 흘러넘치는 삶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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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이전의 아감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베로나 대학교의 미학교수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주된 활동 무대는 미학이다. 프랑스의 󰡔국제철학학회󰡕나 미국의 각종 대학교 등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라크 전쟁 후 미국이 외국인 입국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미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는 논리정연한 글을 기고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개최된 하이데거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에게 하이데거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대에 발표한 󰡔내용 없는 인간󰡕(L’uomo senza conenuto)은 근대 예술가의 운명을 고찰한 미학서이다. 1977년 󰡔서구 문화에 있어서 말과 판타지󰡕(Stanze. La porola e il fantasma nella cultura occidentale), 1982년 󰡔유년시절과 역사󰡕(Infanzia e storia), 1982년 󰡔사유의 종언󰡕(La fine de pensiero), 󰡔언어활동과 죽음󰡕(Il linguaggio e la morte), 1985년 󰡔산문의 이념󰡕(Idea della prosa)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한편 그는 발터 벤야민의 이탈리아판 저작집의 편집에도 관여했듯이 벤야민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예외 상태’에 관한 그의 논의도 사실 벤야민의 선구적인 작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또 소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후 ‘언어활동’에 입각해 유럽적 인간의 조건에 관한 미학적 고찰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심을 ‘미학’이 아니라 ‘정치’로 옮겨가면서 이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1993년에 질 들뢰즈의 “바틀비”론(1989년)을 받아들여 󰡔바틀비―창조의 공식󰡕(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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