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대중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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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모(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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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에서 [소렐/그람시와 달리]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이러한 우위 덕분에 지성은 대중운동들과 함께 하며……어쨌든 대중운동들이 역사의 진행방향을 바꾸는 것을 지성이 돕는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이는 이 때문, 오직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 1985.

"맑스는 '계급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하지 않고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한다." ; "공산주의는 복수의 의미들로, 즉 잉여노동의 제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의 종언, 시민성과 민족성의 구별의 종언으로 이해된다."―발리바르, 1989.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구분을 통해 새로운 시기[포스트포디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오늘날 공산주의의 구성은 성숙해 있다."―네그리, 1992.

"(창립적) 수학소, (추방된) 시, (재구성된) 정치와 (사유된) 사랑의 反궤변론적 짜임새는 내가 제기하는 철학적 몸짓이며 플라톤적 몸짓이다."―바디우, 1989.



1.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의 종언

오늘날 맑스주의를 1) 당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조직형태로 승인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2) 당에 부여되어 온 이러한 지위를 부정하는 맑스주의 또는 오히려 맑스주의 개조 시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예컨대, 발리바르, 네그리, 바디우: 편의상 맑스주의 Ⅱ). 양자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 있다.

고전적 맑스주의의 입장에서라면 맑스주의 Ⅱ를 맑스주의로 인정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운동과 따라서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실존은 당 형태 안에 자신을 한정할 수도 없었지만 또한 당 형태 외부에서 자신을 구성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인 이유만으로도 그러하다. 이 입장에서 보면 맑스주의 Ⅱ 내부의 변이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Ⅱ의 입장에서 보면 고전적 맑스주의 내부의 변이(맑스 자신, 레닌, 트로츠키, 마오,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기타)는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의 총체화에, 따라서 '당의 목적론'에 매여 있었다. 알튀세르 식으로 말한다면, 맑스는 역사의 '과잉결정'을 예감했지만 진정으로 고찰하지는 못했고 그의 후예들 역시 이 점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이야 달리 생각하겠지만, 맑스주의 Ⅰ, 한 세기동안 조직의 교의로서 작용해 온 맑스주의는 사실상 죽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은 아직 남아 있고 심지어 새로운 창건 시도조차 부분적으로 있지만, 거기서 맑스주의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의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은 불가역적으로 시효만료하였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당 형태는, 맑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육체노동과 지적노동의" 부르주아적 "분할"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 형태라는 제도는 '지적 차이'라는 '인간학적 차이'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되는 모순들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들의 발전의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의 전화이다. 당 형태가 루소 이래의 꿈인 인민의 자기통치를 위한 조직형태가 아님을 입증해 준 것은 이론이라기보다 역사이다.



2. 맑스주의의 개조의 방향

그렇다면 맑스주의는 비판적으로 개조되어야 한다. 문제는 맑스주의의 개조의 합당한 방향이다. 맑스주의는 맑스의 사상의 반역적 측면과 그의 이론의 과학적 측면을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서 양 측면 모두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반역의 측면에서 '대중의 정치'의 관점과 과학의 측면에서 '사회적 관계' 개념의 보존을 전제로 한다. 이 반역과 과학의 관계는 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맑스주의는 반역을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경향과 과학을 반역으로 환원시키는 경향, 과학주의와 의지주의(행동의 철학) 사이에서 동요해 왔다.

맑스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은 물질성 속에서 역사성을 사고하는 (또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사회적 관계의 전화의 과학으로서의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과, 모순 또는 적대의 역사성에 기반하여 역사를 파악한다. 사회적 관계를 공동체적 유대로 파악하는 지배적 관념에 대립하여 맑스는 사회적 관계 일반이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파악한다. 적대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사회적 관계가 물질성과 역사성의 준거인 이상, 예컨대 (바디우나 네그리의 경우처럼) 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을 떠나서 맑스주의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대가는 맑스주의의 고유한 과학적 측면의 기각이다.

물질성 속에서 역사성을 사고하는 시도에는 맑스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 물질적인 것으로는 사회적 관계 외에도 육체, 욕망 등이 있으며, 물질성의 준거를 이러한 것들 각각에 두는 역사유물론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육체의 물질성 테제와 사건의 역사성 테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푸코의 '역사유물론'과, 또한 욕망의 물질성 테제와 사건의 역사성 테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들뢰즈의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푸코와 들뢰즈의 역사유물론, 그리고 맑스의 거시정치와 푸코적인 저항의 미시정치, 들뢰즈의 욕망의 미시정치는 필연적으로 "조목조목 대립하는" 이론적 체계요 정치적 실천이다.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실천이성의 이율배반"(발리바르)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미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국가의 통제를 겨냥하는,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포위하려 하는, 국가의 인정을 얻으려 하거나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대중운동들의 조직은, 하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에,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의 구성에, 그리고 사회를 적대적인 부분들로 분할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사회에 대한 표상에,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항상 지닌 그러한 표상에 굳게 매어 있다.

사회적 시민성의 거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집단들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탈영토화를 겨냥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는 '사회적 연관'을 자연화시키는 흐름들과 발본적 탈개인화의 흐름들, 교통과 소비 및 통제의 거대기계의 이면일 뿐인 이 흐름들과……공명할 위험을 항상적으로 가지고 있다."(발리바르, 1996.)


요컨대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푸코/들뢰즈의 '역사유물론', 맑스적 정치와 푸코/들뢰즈적 정치는 서로 결합될 수 있는 체계들, 실천들이 아니다. 양편은 분리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대립한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립한다. 맑스의 이론과 푸코/들뢰즈의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맑스주의를 개조 또는 '확장'할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론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일 것이다.(주1)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종합 또는 결합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주2) 그러나 무의식의 초개인적[개인횡단적] 성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초개인적인 어떤 현실을 대상으로 하며, 그리하여 양자의 질문을 서로 작용시키는 것은 유익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맑스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하는 네그리는 대신 '주체의 구성적 역능'에 근거한다. 네그리의 이론화는 맑스주의의 주요한 경향들 중의 하나를 이루는 '행동의 철학'(또는 '결단의 철학')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의 노선에서는 맑스적인 대중의 정치의 관점은 사실상 기각된다. 그가 중시하는 multitude라는 범주는 맑스적 대중과 들뢰즈적 소수자 사이에서 동요하는 범주라 할 수 있다.(주3)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세 속에서 그가 제출하는 일종의 '지식프롤레타리아론'으로서의 '사회화된 노동자'론은 이 동요를 잘 보여준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적 기획은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유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한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의 총체화에서 벗어나 계급적대와 지적적대를 절합하는 시도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맑스주의의 진화론적, 종말론적 공산주의 상과 전통적인 혁명 노선을 기각하지만, 그러나 그의 이론화에서는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 이념은 결코 포기되지 않으며,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학적 분석능력이 보존된다.



3.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

맑스주의의 개조 작업 속에서 발리바르는 확대된 해방의 정치로서의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 이로부터 '반폭력'의 문제설정을 제출하며, '해방'과 '변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다른 정치로서의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 개념을 가공한다.(주4)

발리바르의 논의는 맑스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회적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다시 말해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고 보는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은 개인주의와 유기체주의 사이의 부르주아적 대립을 무효화시킨다. 이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론적 인간주의'와 그에 대한 보완물로서의 유기체주의 모두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맑스는 계급관계를 총체화함으로써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의 비판적 함의를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했다.

맑스의 이론화의 이러한 내재적 한계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그것을 규정하는 맑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를 전면적으로 문제삼는다. 발리바르는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단순히 기각하기보다는 그것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하려 한다.(주5) 즉 그는 노동의 인간학에 토대를 둔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내적 한계들이라는 질문, 즉 계급투쟁과 모든 곳에서 일치하지만 그것으로 절대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초개인적인 것의 형태들이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계급적대와 전혀 다른 유형의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들로서 성의 차이와 지적인 차이라는 인간학적 차이를 식별하고,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의식과 담론 밖으로 추방되어 온 이 차이들과 계급적대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한다.

정치의 개조를 위한 발리바르의 작업의 개조의 출발점은 '인권의 정치'의 새로운 정식화이다. 인권의 정치란 인간의 권리들을 부단히 확장시키고 그것들을 시민의 권리들로서 발명해 내는 정치이다. 그는 인권 일반을 무조건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보로 만드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인권이라는 관념 속에서 하나의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담론만을 발견하고 집단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 인권을 지양하려 하는 종래의 사회주의적 기획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치의 원리를 그는 평등과 자유를 동일화시키는 '평등자유(equaliberty) 명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의 차이, 지적인 차이라는 '평등의 제도화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 또는 모순의 어떤 유형'이 근대 정치 속에서 억압되어 왔다. 근대정치를 괴롭힌 이러한 모순은 '평등자유의 변증법'을 더욱 전개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화(해방)의 내용은 이제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중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의 생산으로서 전진해야 한다. 인권의 정치의 이러한 확장은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중화시키는 시민성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그러한 차이를 전화시키는 명시적 경향을 갖는, 새로운 시민성 개념을 요구한다(그에 앞서 인권의 정치는 민족성과 시민성의 구별의 종언을 요구한다).

인권의 정치는 착취, 불평등, 차별 등과 같이 보편적 권리를 부정하는 폭력 또는 압제에 대한 봉기적 행위를 항상 전제한다. 이 봉기적 행위는 불가피하게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즉 대항폭력을 수반한다. 인권의 정치는 기존 질서의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 효과들과 대결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오늘날의 일반화한 폭력의 상황 속에서 폭력의 실천적 부정의 두 형태인 비폭력과 대항폭력 간의, 또는 혁명적 변화와 합법적 변화 간의 전통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를 다급히 발명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해방, 변혁, 시빌리테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발전시키면서 맑스주의를 개조하려는 발리바르의 최근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을 절합하는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의 제출, 그리고 그러한 도식에 입각한,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개념의 정식화이다.(주6)

발라바르는 정치는 인민 및 인민 내부의 개인들의 구성적 행동으로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위에 정초된다고 보는, 루소가 대표하는 관점을 '정치의 자율성'으로 명명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해방(emancipation)이라는 윤리적 형상'에 조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개념은 인민의 내적 갈등, 내적 분할이라는 아포리아를 내장한다.

루소적 관점의 대극에서 맑스는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념을 주창하는데, 이는 정치의 진실(진리)과 현실성은 그 자신 안에, 즉 자신의 정치적 의식 또는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밖에, 즉 외적 조건들 및 대상들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타율성, 즉 구조적 및 정세적 조건들에 결부된 정치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형상에 조응한다. 그 작동에 각종의 폭력을 요하는 생산과 착취의 구조의 변혁에는 폭력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 또는 '폭력과 대항폭력의 순환의 종언으로서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유토피아가 그려진다.

정치의 타율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스피노자가 분석한 상징적 폭력 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모든 정체에 적용가능한 민주화의 이론으로서의 정치적 교통'의 이론을 발견한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교통의 활동인데, 이 교통은 무지의 관계, 미신의 관계,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사고는 그 자신의 교통을 항상 이미 가능성의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자유화(해방)의 조건으로서의 인식을 위한 투쟁은 정치적 실천이다. 스피노자적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모두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자유로운 교통이며, 그 조건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이다.

스피노자적 정치에서 변혁의 대상은 '생산과 착취의 구조'가 아니라 '믿음과 교통의 구조'이다. 이 구조 속에서는 '공동체적 도식(schema)'이 육체·행동·가치·문화·소속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규정에 항상 투영됨으로써 교통과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자 형태로 나타나며, 이로부터 폭력이 발생한다. 요컨대 집단적 주체성의 창설에 폭력이 따르는 것이다.

맑스가 분석하는 생산과 착취의 구조와 스피노자가 분석하는 '믿음과 교통의 구조' 사이에 놀라운 평행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의 분석 사이에는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맑스가 정치의 조건인 공동체적 소속과 따라서 상징적 폭력의 영역, 즉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면, 스피노자는 '경제적' 적대의 감축불가능한 성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

정치의 조건 또는 타자로서의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의 비사고와 '일반화된 경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사고는 각각 그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발리바르가 맑스의 '생산적 노동의 인간학'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교통의 문제, 따라서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정치의 근본문제로 사고하는 스피노자가 이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사고를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학적 성찰 위에서 발리바르는 생산양식들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들('상징적 구조들의 작용 하에서의 주체의 구성 양식들)의 문제설정의 절합을 추구한다.(주7)

이 두 개의 문제설정의 절합은 역사적 인과성에 대한 맑스의 도식을 넘어섬은 물론 알튀세르의 도식에서도 더 나아감을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 새로이 구성될 도식이 "역사성의 보충물 또는 보완물처럼 작동하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합" 대신에 "서로 양립불가능하면서 동시에 분리불가능한 설명의 두 '토대들' 또는 두 결정들, 즉 주체화양식과 생산양식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양자의 결합의 필연성을, 어떠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도 상상적인 것(이데올로기)의 효과들은 현실적인 것(경제적 적대)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의 효과들은 상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발리바르는 맑스를 패러디하여,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듯이 경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는데, 이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는 각기 자기 자신의 효과들의 유효한 원인인 타자를 통해서만 역사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과성 도식 속에서는 '최종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가 정치의 타자, 즉 정치의 현실성·원인들·효과들의 장소라면, 이데올로기는 이 타자의 타자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타율성의 타율성'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에 '해방'으로도, '변혁'으로도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정치가 조응하는데, 이러한 정치의 윤리적 지평이 '시빌리테'이다. 시빌리테의 정치는 '동일성들의 폭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모든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개인은 단일한 동일성, 단일한 소속을 갖지 않으며, 반대로 불균등하게 포함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등적인 여러 동일성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동일성의 형성 즉 동일화와 관련하여 두 개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극한적인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성을 유일하고 일의적인, 집괴적(集塊的)이고 배제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이 모든 역할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부동(浮動)하도록 허용하는 상황이다. 폭력의 상황은 개인들과 집단들이 이 극한들 중의 한 쪽을 향해 내몰리게 될 때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양극 사이의 잔혹한 진동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할 때에도 산출된다.

동일화들과 소속들의 복수성, 복잡성, 갈등성이 감축되어야만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감축하는 것이 제도들의 역할이다. 제도들은 '상징적'이고 물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예방적 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반제도들의 경우에는 조직된 대항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수행한다. 발리바르는 총체적 동일화와 부동적(浮動的) 동일화라는 두 극한들 사이에서의 동일화들의 갈등을 규제하는 한에서의 정치를 '시빌리테'라 명명한다.

시빌리테로서의 정치는 '위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가능하다. 아래로부터의 시빌리테의 정치는 국가의 고유한 폭력에 대한 대안이자 동시에 국가의 무능력에 대한 치료제로서 정의된다. 인민이 국가에 대한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고타강령 비판])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보통의 시민들로, 계급들로, 대중masse의 당파들로 이루어지는) 다중(multitudes)이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도록 강제하고 공적 공간에 시빌리테의 규범들을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곧 시빌리테의 정치가 된다.

이 시빌리테의 정치는 정치의 자율성에 조응하는 해방의 정치, 정치의 타율성에 조응하는 변혁의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 개의 정치 개념은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며, 각자는 역사적 시간과 생활공간 속에서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과 시빌리테 없이는 해방이 없으며, 해방과 변혁이 없이는 시빌리테가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 가지 정치의 절합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빌리테의 정치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의는 아직 추상적이며, 그가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켜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 개념이 정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前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 개념으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맑스적인 변혁의 정치가 예컨대 푸코적인 '저항의 미시정치'나 들뢰즈 '욕망의 미시정치'와 같은 것으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각각의 한계들과 유효화의 조건들을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5.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대중의 정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맑스주의 개조를 필연화시키고 맑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을 특권화시킨다. 발리바르에게서, 계급투쟁과 같은 정도로 보편적이고 결정적인 사회적 적대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이 차이가 발생시키는 억압' 및 '지적 차이'의 재발견은 상이한 해방들의 절합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게 스피노자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중에서 지적 차이와 결부되는 지적 해방의 문제를 '대중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철학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고는 교통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따라서 지적 해방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적 분석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가 된다. 맑스와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은 대중의 관점의 전제조건이며, 맑스와 스피노자의 모순적 결합의 가능성의 토대이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로서의 교통관계를 특권화시키는 반면에, 네그리는 권력과 역능의 존재론적 구분을 특권화시킨다. 발리바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에서 전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으로 회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역과 과학을 결합시키는 맑스에게 과학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이다.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을 기각하는 네그리의 이론화에서는 목적론의 위험이 어른거리게 마련이고 과학의 희생 위에 혁명적 언사가 번성하기 쉽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론화에서는 맑스적인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대중'의 문제설정, 그리고 그 모든 위험을 포함한 '대중의 정치'의 관점이 소실된다.

반면 스피노자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보완된 맑스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유지되는 한 발리바르의 이론화에서는 적어도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 이념은 포기되지 않는다. 특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지배하는 것 같은 오늘의 홉스적 상황에서 이 점의 중요성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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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일'로서의 '신좌파와 구좌파의 수렴'을 전제하거나 제시할 정도로 순진한 연구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2) 심리를 구조화하는 결정적 힘을 욕동에 부여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상징적 질서 부여하는 라캉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는 바디우적 시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하겠다.

(주3) "이 프랑스 이론들[푸코, 들뢰즈, 과타리의 이론들]에서 존재론은 변증법에 대립하여 제기되며, 사회투쟁들과 자본주의적(사회적, 생산적, 국가적) 재구조화 사이의 관계를 지배할 가능성은 권력으로부터 제거된다. 이러한 이론들의 한계는 그것들이 권력 비판을 탈주선, 사건과 대중의 화려함으로 제기하지만, 전복적 소수자의 기관이 될 수 있는 구성권력을 확인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사실에 있다." 네그리, {맑스에 관한 20가지 테제}, 166쪽. 당연히 푸코나 들뢰즈의 입장에서라면 네그리의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용납될 수 없다.
"사회화된 노동자의 생산적 노동의 특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사회적 협조의 창시자라는 점이다.……그들은 상급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 …… 사회화된 노동자는 집단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사회화된 노동자는 일종의 공산주의의 현실화이고 그것의 발전된 조건이다. 그에 비하여 소유주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필요조건도 아니다." 네그리, {전복의 정치학}, 106-7쪽.

(주4) 난감하게도 적절한 번역이 불가능한 이 civilite는 '공동체의 창설/통치성'을 특징짓는 '문명/문화'(영어의 civility)이자 '인륜/예절'로서의 '시민적 도덕성'(독어의 Sittlichkeit)이다.

(주5) 철학적 인간학의 하나로서의 노동의 인간학의 명제는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노동의 인간학의 명제"(이진경)는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희화이다. "노동의 인간학에서 벗어나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고 변환시키고자" 하는 것은 계급 개념을 제거하고 맑스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이진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욕망의 인간학, 코나투스의 인간학, 사랑의 인간학 등과 같은) 다른 종류의 인간학으로 보완하자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사물들에는 서로 보완 가능한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주6) 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1996.

(주7) '주체화'(sujetion)는 '복종'과 '주체화'(주체로 되기)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주체화양식'은 '주체화/복종 양식'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의 양식들 또는 형상들로서 1) 고대적인 시민성에 조응하는 "일방적 말"로서의 주체화[복종]의 양식과 2) (알튀세르가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 부른 바 있는) "내면의 소리"로서의 주체화의 양식에 더하여 3) "권력관계들, 언어의 경제, 신체와 정신의 상상을 결합할" 또다른 주체화의 양식을 제시한다. 이들 주체화양식들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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