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7월이었다. ‘평화로운 빗소리’라는 식의 표현을 7월의 집중호우 속에서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빗속에 생존권을 떠내려 보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고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또다른 ‘비’를 내리는 세력들이 있다. FTA와 평택미군기지의 강행, 노동자 때려잡기,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대한 학살 등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있다.
빗소리의 느낌이 맥락에 따라 다르듯이 평화의 개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그것이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실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가짜 평화에 맞서 평화를 규정하려는 노력들은 많다. 좁고 넓게 혹은 길게 가깝게 평화를 ‘이런 것’이라 규정하는 노력 속에서 바라보는 평화는 참 평화롭다.
“평화는 삶에 대한 존중”, “평화는 인간의 가장 값진 소유물”, “평화는 무장 갈등을 끝내는 그 이상의 것”, “평화는 인간과 환경의 조화로운 공존”,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빈곤과 기아 등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 “평화는 먼 훗날의 이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방식으로 창조되고 확대되는 행위양식”, “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및 인류 간 연대의 원칙에 대한 뿌리 깊은 헌신”…
“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란 말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당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이 1984년 채택한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선언’이다. 이 선언은 인류의 평화적 생존권이 모든 인권의 기초임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강조하고 있다. ‘전쟁위협의 종식’,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이란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평화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가장 좁은 의미의 평화에 대한 약속의 재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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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유엔은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선언’을 발표했다.<출처; UN PHOTO>
| 이 선언이 채택된 것은 유엔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1985년을 ‘세계 평화의 해’로 선포하기 위한 합의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더 큰 피를 불렀다는 역사적 교훈은 넘쳐난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한 것의 결과가 어떠하지를 잘 아는 속에서 출발한 유엔은 그 헌장 첫머리에서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의 힘을 합”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 연장선에서 1949년 ‘평화의 본질에 관한 선언’은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어떤 국가에 대해서든지 그 인민의 의지를 파괴하려는 모든 직간접적 위협이나 행위를 삼갈 것”을 가장 엄숙한 평화 협정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78년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들의 준비에 대한 선언’에서는 “침략전쟁, 침략전쟁의 계획·준비·추동은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서 국제법에 의해 금지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1984년 선언은 앞서 원칙들을 반복·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력에 기념할 날짜를 채워가고 평화에 대한 선언문을 쌓아가는 것이 평화의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은 아프게 보여준다. 이 모든 국제인권법을 백지화시키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표정은 이런 선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선언이 채택되기 얼마 전인 1982년에도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침략하여 약 1만8천여 명의 생명을 학살했고, ‘세계평화의 해’에는 튀니지의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를 폭격하여 수십 명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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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라는 말이 있다. 군사적 공격에 의해 생명이 위협받는 곳에서 ‘인권’의 개념은 출발조차 힘들어 보인다.<출처; Islamic Relief> |
평화에 대한 말을 실천으로 번역해 내기 위해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반평화와 반인권의 현실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기본권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위험과 실제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경제적 압력, 실업, 저발전, 기상의 변화, 사막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인간이 유발한 환경파괴 등을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알아야 한다.
평화에 대한 또 다른 선언문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전쟁을 창안한 바로 그 종(인류)이 평화도 고안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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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1984년 11월 12일 유엔총회 결의 3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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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총회는
유엔의 주요 목적이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임을 재확인하며,
유엔헌장에 규정된 국제법의 기본적 원칙들을 상기하며,
인류의 삶에서 전쟁을 근절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핵 파멸을 막는 것이 모든 인류의 의지와 열망임을 표현하며,
전쟁 없는 삶이야말로 나라들의 물질적 복지, 발전, 진보를 위하며 유엔이 선언한 권리와 기본적 인간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제1의 국제적 필수조건임을 확신하며,
핵시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보존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조건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인류의 평화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각 국가의 신성한 의무임을 인정하며,
1.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2.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고 그 이행을 증진하는 것이 각 국가의 기본적 의무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3. 인류의 평화권 행사를 보장하는 것은 전쟁의 위협, 특히 핵전쟁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가들의 정책을 요구하며,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와 유엔헌장에 기초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4. 모든 국가와 국제 조직은 국가적 및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적절한 조치를 채택함으로써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이행을 지원하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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