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들의 연구 모임인 수유너머에서 [동의보감]을 읽는다는 소리가 들린지 꽤 되었더랬는데, 그걸로 책도 몇 권 나온 모양이다. 인문학적 시각으로 바라본 한의학이라 ... 매력있는 주제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의학과 천문학의 만남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황제내경] 의학의 많은 부분이 오운육기와 관련되는지라 뭐 이 정도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예과생 정도면 심심풀이 삼아 한두 번은 기웃거려보는 주제이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삐딱선을 타게 되는데, 설마설마 했더니 역시나 이쪽으로 빠져버린다.
저 분 하나 정도면 한의대생도 아니면서 어깨너머로 한의학 공부 하다 보니 '예과생 증후군' 정도에 걸렸구나 하고 넘어가면 괜찮은데, 이번에 보니 민음사에서 만들었다는 영성 분야 디비전인 판미동에서 이런 저자의 이런 책까지 나와버렸다. (한국의 갈리마르 운운하는 민음사 산하에서 이런 책이 나오는 것도 우습고, 판미동은 약간씩 삐딱선 타는 품이 영, 기획력이 딸리는 느낌이고. 아니 대형 출판 그룹 걱정을 내가 왜 하고 있냐 시방!) 중국 철학 전공자까지 이런 걸 내고 있으면 어쩌란 말이더냐.
일단 한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처음에 개론서 류에서 한번씩은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음양, 그리고 오행이다. 중원 땅에서 의학이 형태를 잡아갈 무렵,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당시 유행하던 오행설의 언어가 의학에도 스며들면서 여러 현상과 용어들을 오행으로 간단히 범주화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 임상 실전에서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한 기록인 [상한론] 등에는 이런 영향이 좀 적게 스며들었고, 생리 병리 이론을 다루던 [황제내경] 같은 책은 그 영향을 좀더 받았다.
이후 [운기칠편]이라고 해서 [황제내경]에 덧붙여진 부분에서는 오운육기니 하는 천인상응론적 의학이론이 아예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
헌데 여기서 시간을 십이간지, 육십갑자 등으로 표기하다 보니, 즉 사용하는 언어가 같다 보니 뭔가 명리학과 연관이 되는 것도 같고, 해서 여차저차하다 보니 겉다리로 사주 꽤나 배운 한의대생들이 한 학년에 한두 명씩은 생기게 된다. 좀더 사주명리학에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기 좋은 풍토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는데 사주팔자를 따지는 의료인은 없으며, 행여나 예과 때나 조금 기웃거리던 버릇을 아직까지 못 버리고 임상에서 적용하는 이가 있다면 동료 집단에서 '돌팔이'라는 비웃음 밖에 사지 못한다.
왜? '팔자대로' 병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
사실 四柱八字라는 것은 결국 태어난 연월일시를 (은나라 때부터 써오던) 六十甲子의 단위로 표기한 것일 뿐인데, 여기서 十干 十二支에다가 무슨 음양오행의 속성을 배치하고 어쩌고 해서 역학 관계를 찾고 어쩌고 하는 것부터가 오류.
근본적으로는, 태어난 연월일시를 육십갑자로 표기하는 것부터가 오류. 육십갑자의 시초를 언제로 잡아야 하며, 그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부터가 오류. 백번 양보해서, 태어난 시각의 "우주의 기운"이 인간의 한평생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그런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치더라도, 그 기준에 해당되는 별들이 수천년간의 운행을 계속하다 보니 지금이랑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서 오류. 끝.
자세한 사항은 이 정도 책 한 권만 보셔도 아주 잘 나와 있으니, 참고.
어줍잖게 동양학이니 뭐니 기웃거리다가, 사주명리학이라는 게 아주 그럴싸하고 폼도 나고 하니 심심풀이 삼아 한번 해볼까, 하는 양반들은 자기 혼자 짓고 까불다 뒤질거면 괜찮지만 남의 인생사를 두고 훈수질 할 생각이면 ... 그 전에 이 책부터 읽어보자!
사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들이댄다고 설득이 될 정도면 ...
아무리 역사적으로 보나 기원적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말이 안된다고 조목조목 따져도 한번 여기에 빠지는 사람들은 또 이게 꽤나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이다. 몇백년간의 이론적 다양화 과정에서 꽤나 그럴싸한 각종 이론들을 만들어 왔으니 말이다. 되려 니가 뭘 알아서 한낱 은나라가 어쩌고 기준이 어쩌고 하는 얕은 알음알이로 동양의 위대한 전통이자 미스테리인 사주명리를 업신여기느냐! 빽!
휴 ... 말을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