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난 세기말 즈음에 인문학, 특히나 동양 쪽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라면 허탁과 이요성이라는 금시초시의 새파란 정문연 대학원생들이 쿵짝쿵짝 번역한 청계판 [주자어류](그것도 두 권이나 한꺼번에 상재된!)를 접하고선 대관절 주자학이 고려에 들어온 이래 처음 시도되는 이 경악스러운 작업이 나잇대로 봐서는 석사 과정 정도나 될까 싶은 학생들 손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나, 궁금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양반들이 심지어 동양철학 분야에서는 산골짜기와도 호각지세를 이룬다는 호랑이굴을 나온 것도 아니요, 새마을에서도 저리 정진하여 성취를 이루었구나 ... 해서 알아 보니 새마을 어느 누항(말 그대로 진짜 구비구비 들어간 초라한 뒷골목이었다!)에서 [주자어류]를 강독하는 훈장님이 계시다 하여 서당도 찾아가고 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브서 하는 수 없이 공부를 작파하고 의술이나 배워 ... 어쩌구저쩌구 ...
그러더니 몇 년 뒤에는 청계에서 3, 4권이 바로 나오나 했더니 역시나 정문연의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번역본이 소나무 출판사에서 또 나오네?
삽시간에 두 종이나 되는 번역본이 고고성을 울린 것은 좋은데, 이 소나무판도 [주자어류] 앞부분을 번역했네? 그러니까 이 두 종의 번역본은 정문연 대학원생들이 권1에서 권13까지를 번역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바, '교수님이 누구시니?'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강독 수업도 듣고 했으니 누가 책 내더라, 누구도 그 책 준비하더라 등등의 사정 뻔히 알 것이고, 이왕이면 우리가 권1에서 권13까지 번역해서 냈으니 그럼 너희는 ... 그래 아 물론 기존에 출간 직전까지 해놓았던 원고 작업이 아까웠겠지만 깔끔히 엎고(!) ... 권14에서부터 번역해다오, 뭐 이렇게 내부에서 교통정리를 해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싶은데(청계판이 대략 전체의 10% 분량이니, 소나무판이 그 다음부터 했으면 20% 분량까지 바로 달성이거든),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희망사항이겠고. 이번에 권14 대학편부터 번역을 해주신 안동섭 선생의 용단이 그래서 더 고맙다.
아무튼, 완간되면 세계 최초가 될 전권 번역에 도전하겠노라던 양측의 웅지는 간데없고 품절 딱지만 나부끼면서 이후 [주자어류] 번역은 무려 사반세기 동안 감감무소식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독서법 부분을 다룬 두 종, 일본 학자의 선집을 번역한 책 한 종이 나오긴 했다.)
주자학 연구의 필수 도서인 [주자어류]가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 땅에서 아직도 완역이 안 되었다는 이 사태가 안타깝고, [차의집보]와 [고문해의]라는 엄청난 주석서를 상재한 선학들 보기 부끄러울 따름이다. 안동섭 선생께서는 부디 끝까지 완주하시기 바란다.
(사실 저 무렵에 산골짜기에서도, 정문연도, 다들 모여서 [주자어류] 강독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아 했쟈나? 심지어 저으기 남쪽 어디서는 번역한다고 학진 연구비도 받고 다아 했쟈나? 퍼뜩 책 안 내고 뭐 하는겨?)
이번 안동섭 번역은 예전 두 종의 번역본이 [고문해의] 정도를 참조하였던 것과 다르게, 朝鮮古寫徽州本 등의 이본도 대조하고, 그동안 새로 나온 일본어 중국어 영어 번역본 및 다양한 관련 연구서도 참조한 작업이다. 시간의 축적과 역자의 내공이 이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구나 싶다.
([고문해의]나 [소분] 같은 조선 시대 공구서들도 영인본이 아니라 무려 표점인쇄본으로 출간되어버림)
통행본 주자어류는 총 140권인데, 그 중 14번째권에 해당한다. 주자어류에 수록된 조목의 수는 모두 14,322개인데, 권 14에는 그중 176개 조목(1.228%)이 수록되어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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