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주로 읽던 동양 고전이 (사고전서의 분류로 말하자면) 經史子集 중에 經과 약간의 史, 그리고 거개는 子까지였고 集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렇게 편지만 모아놓은 글은 더욱 드물게 보았는데 ...


이번에 한 사람의 편지를 모아서 간행한 책을 연대순으로 주욱 읽어보니 누군가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그이의 고민과 문제의식, 거칠게 말해서 희로애락을 함께 겪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벼슬자리를 부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와의 추억을 반추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하게 지냈던 기생과의 ... 아련 ...


조선 최고 명문가(조카가 왕비가 되는 정도?)에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형제자매가 죄다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그중 누나의 시집은 중국에서도 출간되는 정도?), 온갖 곡절이 많았지만 벼슬로는 정2품까지 올랐던 조선의 이단아, 문제작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삶을 편지를 통해 따라잡으며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문제작을 지은 문제의 인물 허균을 너무나 몰랐구나! 허균 뿐만 아니라 조선사상사의 인물들 중에 딱히 제대로 아는 이도 없고, 남아있는 그들의 저작을 다른 동서양의 고전들 찾아보듯 열독한 적도 없는 것이 아마도 나 말고도 대다수의 형편일 듯. 이 책 덕분에 일단은 허균의 다른 저작들에도 관심을 더 가지게 된 것이 최대의 소득이다.


P.S. 폭넓은 전거를 찾아 달아둔 주석에서는 역자의 노고를, 한문 번역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번역문을 읽으면서는 이게 대체 원문이 뭔데 이걸 이렇게 자연스레 번역하나 궁금증이 일면서 역자의 무시무시한 번역 실력을 생각하였다.


P.S. 편지의 특성상, 상대방의 답신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싶어 약간 아쉬웠다.  

큰 비단 한 폭과 금색 청색 등 각종 물감을 종놈에게 부쳐 서경으로 보냈다네. 부디 산을 등지고 개울에 임한 집을 그려주게나. 온갖 종류의 꽃과 긴 대나무 천 그루를 심고, 가운데는 남쪽을 향한 집을 열 것이네. 그 앞의 뜰은 넓게 만들어 패랭이꽃과 금선초를 심고, 기이한 바위와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주게. 동쪽에는 깊숙한 방에 장막을 걷어올린 사이로 진열해놓은 그림과 책 천 권이 보이게 하고, 구리 화병에 공작의 꼬리털을 꽂고, 박산 모양을 새긴 술잔을 비자나무 서안 위에 놓아주시게나. - P157

서쪽으로 난 창을 열면, 작은 아씨가 옥삼갱을 장만하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신선로에 붓는 동안 나는 마루 가운데 안석을 깔고 누워 책을 읽으면서, 그대와 아무개를 좌우에 두고 실없이 농담하며 웃고 즐길 것일세. 우리는 모두 첩건을 쓰고 사리를 신고 띠를 두르지 않은 도포 차림을 하고 있다네. 한 줄기 향불 연기가 발 밖으로 피어오르고, 두 마리 학이 돌 위의 이끼를 쪼고 있으며, 동자는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게나. 이것이 실제라면 인생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일세. 그림이 완성되면 태징공이 돌아오는 편에 부쳐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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