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1 매일 시읽기 54일 

포구의 잠 
- 김선우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소라냄새 나는 베개에 코박고 있노라면 

푸른 연어처럼 . . .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더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불며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큰소리 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석가도 레닌도 고흐의 감자먹는 아낙들도 
아픈 날은 이렇게 혁명도 잠시 
낫도 붓도 잠시 놓고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머물게 살 좀 섞어도 
흉 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안도현 시인의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나무생각) 중 내가 사랑한 젊은 시인 김선우의 시다. 이 시는 <<내일을 여는 작가>> 1997년 봄호에 실렸었다고 한다.

김선우 시인은 1970년생이다. 이 시를 발표할 당시는 스물여덟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1961년생이다. 이 시집을 출간할 당시 마흔하나였다.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마흔하나의 선배 시인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시인을 이렇게 평한다.

˝199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아직 시집 한 권 묶지 않은 젊은 시인이다. 나는 이 시인의 시가 발표될 때마다 눈여겨 본다. 치열한 자기 탐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말의 절제력이 놀랍다. 머지 않아 우리 시의 보자기 한 끝을 팽팽하게 잡고 있는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선배의 눈은 정확했고 2020년 김선우 시인은 여전히 시대를 읽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살고 있다. 

2020년 11월 19일. 열넷 생일이 사흘이 지난 날. 딸이 생리를 시작했다. ˝엄마, 몸에 물이 찬 것 같아.˝ 그래, 달에 한 번 이맘때면 네 몸에선 비릿한 냄새가 날 거야. 네 몸속에선 파도가 칠 거야. 너는 네 포구에서 파도와 놀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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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 안도현의 내가 사랑하는 시
안도현 지음 / 나무생각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201120 매일 시읽기 53일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봉놋방'은 주막집의 가장 큰 방이다.

오늘 꺼내든 시집은 안도현 시인의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나무생각)이다. 2000년 봄에 과 후배가 생일 선물로 준 시집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시인의 시를 이리 묶어 놓은 시집을 선호하지 않아 방치해 두고 살았다. 하. 그 세월이 20년이라니.

연탄재 시인으로 알려진 마음 따뜻한(그렇게 느껴진다) 안도현 시인이 열 몇 살, 스무 몇 살 무렵 좋아하던 시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20년이 흐른 지금은 아주 젊지 않겠지만)이라는 소제목 아래 일흔 한 편의 시를 묶은 시집이다. 이런 시집은 시에 대한 문턱을 낮춰준다. 시인 독자의 눈과 마음을 통해 한 번의 검증을 통과한 시들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나는 시인의 저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시든 소설이든 무엇을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꼭 불행하지만은 않다. 읽는다는 행위가 활자에만 국한되지 않고, 행복의 원천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 지수를 한 가지 더 가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를 읽지 않고 보낸 세월이 길었는데, 그래도 그렇지 최승자 시인을 몰랐던 건 충격이다. '개 같은 가을이'는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에 실려 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 매독 같은 가을." 이 구절을 두고 안도현 시인은 말한다. "이 도발적 직유 하나로도 최승자는 시인이다."

최승자 시인은 1952년생이다. 저 시를 쓴 시기는 시집 출간(1981) 전인 서른을 앞둔 때일 것으로 추정된다. 시를 읽으니 서른도 되지 않은 아가씨의 내면 세계가 서늘해 보인다. 이 시인에게 가을은 "매독"과도 같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든 병인 셈이다. 가을은 흔히 인생의 중년에 비유되곤 하는데, 서른이면 한창 나이지 않은가. 왜 이렇게 칙칙하고 냉소적인가 했더니, 찢어지게 가난했고 처절하게 외로웠던 시인 개인의 삶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삽십 세' 중에서)

최승자 시인에게 서른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나이였다. 그 나이를 어찌어찌 통과한 시인은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늘 우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내고 있고 시를 계속 쓰고 있다. 그의 시집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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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매일 시읽기 52일 

저무는 가을 
- 행복한책읽기 

저무는 가을 다가선 겨울 

가을과 겨울 사이 여러 색과 풍경이 공존하는 마당 
눈이 즐거운 계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때 
시려서 따스함을 찾는 시기  

나이 들어 좋은 것 하나를 꼽자면 
계절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알게 된 눈 
 
가을이 저물어 간다 
아쉬움 뒤로 
잎새 떨군 벌거숭이 나무들이 
내게 말을 건넨다 

동무가 되어 줄게

8년 전 쓴 글이다. 딩동! 하고 SNS가 알려 주었다. 마침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의 하루 강수량이 104년만에 최고치를 찍었다고 한다. 68.2mm

나이 들어 좋은 것 하나를 더 꼽자면, 계절 뿐 아니라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는 점이다. 자의적 망상 속에 나를 가두지 않게 되었다는 것.

8년 전 세 살이던 아들이 열한 살이 되었다. 방과 후 집에 온 아들이 ˝엄마 선물이야˝ 하며 쑥 내민 진갈색 나뭇잎 한 장. 가을비에 촉촉이 젖어 있다. 그래, 너는 한참을 푸릇푸릇할 신록의 나무, 나는 푸른색 게워내고 제 속의 색을 드러내는 나뭇잎. 너는 봄. 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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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1-20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들이 그맘때 낙엽같은 길에서 주워 온 선물을 자주 받았었는데,,, 이제는 그때가 그립네요. 님의 글을 읽으니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면서 아련해요. ^^;;
서울에 가을비가 왔군요!! 여기도 어제 아주 잠깐 안개비가 내렸어요. 제가 사는 곳은 사막이라 비가 그립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0-11-20 13:59   좋아요 0 | URL
헐. 사막이요? 대체 어디 계시길래?

라로 2020-11-21 02:41   좋아요 0 | URL
캘리포니아 주에서 살고 있어요. 비가 거의 안 옵니다. 비가 너무 그리워요. ㅠㅠ
 
난치의 상상력 -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
안희제 지음 / 동녘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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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력은 언제든 환영이다. 어떤 병이든 일단찾아들면 완치는 없다는 것이 내 몸이 깨달은 바다. 스물여섯 청년의 아픈 몸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면면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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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8 매일 시읽기 51일  

절망은, 없다 
- 황인숙 

장이 파할 무렵. 
번들거리는 판대기 위의 돼지족발에 앉아 있던 
희망이 500원어치씩 희망꾼들 안주로 
야금야금 삼켜지고 
그래도 잔뜩 남은 
희망이 다른 희망들과 함께 
보따리로 꾸려진다. 

꾸려진 희망들은 저마다 잠을 찾아가고 
안 꾸려진 희망들은 
정류장 근처에 몰려 아우성친다. 
beat it! beat it! 튀는 
덤핑 희망 카세트 노래에 맞추어 
희망이 도처에 넘치고 있다. 

하청받은 희망. 급조된 희망. 
수요 없는 희망. 정비 불량의 희망. 
공장도 가격의 희망. 썩어나는 희망. 
썩지도 못하는 희망. 
무단 복제 해적판 희망. 수입된 희망. 
S.F 희망. 금메달급 희망이 
진눈발과 함께 지분거리고, 

희망은 돼지족발 위에 앉아 있고 
500원어치씩 희망꾼들 끼니로 삼켜지고 
그래도 남은 희망은 
다른 희망과 함께 보따리로 꾸려지고 
그래도 안 꾸려진 희망은 
위생적인 어둠 속에서 
비위생적인 불빛으로 흐르고 
어떤 희망은 
일렬로 세워진 리어커 아래 
모로 쓰러져 잠이 들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면 
그것은 흠뻑 정전기를 띠고
묻어나온다. 
희망은 막차 운전대 위에 앉아 있고. 


황인숙 시인의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를 오늘까지만 읽기로 한다. 여전히 잘 읽히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가장 발랄한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제외하곤 시들이 대체로 난해하다. 내 이해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가 싶다가, 위의 시 ‘절망은, 없다‘에서 그 파도가 쑤욱 밀려났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우리 대다수의 삶은 다 고만고만하다. 어릴 적엔, 또한 젊을 적엔(지금도 어르신들이 보는 나는 젊다) 뭐든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노력만 한다면.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이십대 중반에 깨달았고, 노려한 꿈이 좌절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서른 넘어 느꼈다. 뭔가를 희망한다면.

‘절망은, 없다‘에는 희망들로 넘쳐난다. 돼지족발 위에도, 덤핑 카세트 위에도, 막차 운전대 위에도. ˝하청받은 희망. 급조된 희망. / 수요 없는 희망. 정비 불량의 희망. / 공장도 가격의 희망, 썩어나는 희망/ 썩지도 못하는 희망./ 무단 복제 해적판 희망. 수입된 희망.˝

온갖 것에 ‘희망‘이란 딱지가 붙는 건 희망할 것이 거의 없다는 역설의 표지이다. 희망값은 500원. 500원치 희망은 그 양과 질이 어느 정도일까. 아주 거창한 희망은 아니지 않을까. 돼지족발을 안주 삼아 술잔 들이키는 이들의 희망이란 그저 삼 시 세 끼 잘 먹고, 자식새끼 잘
건사하고, 하루하루 500원이라도 모아 내 집 장만할 수 날이 아닐까.

‘희망 고문‘은 말 그대로 고문이 될 수 있다. 시칠리아 라는 섬이 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섬은 두 나라간 전쟁이 터질 때면 반드시 거쳐가는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시칠리아는 두 나라의 잦은 싸움으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꼴이 되길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에 퍼지게 된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 

많은 이들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바란다. 시칠리아에서는 그런 내일을 꿈꾸기 힘들었다. 하여 그들은 내일을 버티기 위해, 저 말을 만들어냈다. 오늘이 된 내일이 어제보다 나쁘지 않으면 살 만했기에. 저 속담에는 시칠리아인들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들어 있다. 내일이 더 나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살으라는. 다행히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진다면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으라는.

‘절망은, 없다‘는 ‘절망은, 있다‘ 절대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로 읽힌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절망이 날마다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쳐들어온다. 인생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받아들이면 삶에 찾아드는 이런저런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견디기가 조금 낫다. 그래서 나는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산다.

˝모로 쓰러져 잠이˝ 들어 있는 희망. 주머니 깊숙이 들어 있는 희망. ˝손을 빼면˝ ˝정전기˝ ˝묻어나오는˝ 희망. 절망의 다른 이름은 희망.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절망이 온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희망이란 놈은 ˝막차 운전대 위에˝ 간당간당하게라도 앉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절망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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