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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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돌베개(2007)

서경식의 최근작 『고통의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를 읽고 전에 사두었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을 내쳐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어판을 펴내며에서 밝히고 있듯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들의 초상집이다.” 원래는 아사히신문사에서 1995년 1월 20일부터 같은 해 11월 5일까지 간행된 『20세기 천 명의 인물』전 10권 가운데 실린 글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는 집필 대상자를 일관된 주제 아래 골라냈다고 말한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극한의 시대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사형, 전사, 암살, 객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선명한 죽음을 통해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 인물들의 “묘비명”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고작 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묘비명이지만, 저자의 글은 그 어떤 긴 평전보다 크고 강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사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 중 내가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너무도 귀에 선 인물들의 이름을 대하면서 이 책을 옮긴 역자도 부끄럽고 민망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모르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49인은 폭압, 폭력,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밀쳐둔 채 저항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 전선에 뛰어든 인물들이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들 중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인 남편 박열과 함께 대역죄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죄수 지소에서 스스로 엮은 노끈을 독방 쇠창살에 걸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겨우 스물 셋의 나이였다. “미래의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것은, 단언컨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어서 끝까지 나로 시종일관하겠습니다.”(186)
이 책에서 자살을 선택한 인물들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저자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자살에 대해 언급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161쪽) 다시 말해 어떤 권력이나 종교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선택한 삶과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것이며, 그럴 때 선택한 죽음은 자유의 또 다른 일면임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현실 도피가 아닌 저항의 몸짓이라는 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순일곱의 나이에 아파트 현관 난간에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그 자산이 말한 “인간적인 행위”였다.

아우슈비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환을 기약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바다는 어두컴컴하고, 항해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는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레비의 자살은 인류 자체의 자살 과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124)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사라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더불어 각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엑기스만을 뽑아서 일목요연하게 감동적으로 정리해낸 저자의 글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펴내며>에서 저자는 이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1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47편이라는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은 무척 가혹한 작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무렵은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썼던 것 같다. 그 가혹한 작업이 현재의 나라는 ‘글쟁이’의 지식과 사고의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교사들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배움과 생각의 위력을 읽을 수 있었다. “부지런히”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저자는 각 인물들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조사하여 사실이라는 주춧돌 위에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훈훈한 집을 완성했다. 겉에서 보면 작은 집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높고 넓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큰 집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아는 사람들은 더 가깝고 깊게 알게 되었고, 모르는 사람들과는 통성명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책꽂이 한 켠에 이 책을 잘 보이게 꽂아 놓고 세상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이 슬금슬금 기어올라치면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옮긴 이목 선생의 후기도 근사했다.

저자는 세계의 근현대사에 자신의 족적을 또렷이 아로새긴 49명의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우리의 ‘편향된 인식’과 ‘망각’을 질책한다. 그들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기억이란 단순히 개인들의 경험을 보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시 그들과 함께 기억을 공유하면서 사회적 기억=사회적 관계망을 확장해가야 한다고. 그리하여 암담한 현실에 저항하고 어두운 기억에서 밝은 미래를,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 기억이 정치적·문화적 산물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런 기억의 속성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기억들 간의 싸움’이 매일 치열하게 반복된다. 과거의 역사를 애써 외면, 왜곡, 망각하려는 자들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는 자들의 싸움, 이 책에 실린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자산이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돌베개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접해본 책들 중 이 책만큼 편집에 정성이 들어간 책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각 인물과 관련된 보충 자료를 일일이 조사해 정리를 해준(이것 역시 지루하지 않게 엑기스만) 덕에 시대 상황과 인물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책 속의 책들을 왕창 선물 받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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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0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선물 왕창 받을 거라구요!! 서경식님 책 읽었었는데-제목은 까먹;;;;-이것도 기대되네요!!

syo 2021-04-04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력이 장난 아니시네요. 12년 전이라니.... 저는 그때 빌빌거리면서 학교다니고 과외하고 연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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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중 - 유년동화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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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또또 들여다보게 되는 가슴 찡한 그림책이다. 이태준이라는 이름 석 자만 보고 알라딘에서 고른 중고 서적인데, 뜻밖의 감동과 김동성이라는 그린이를 함께 얻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그린이의 해석과 감성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추운 날, 귀를 덮은 모자를 쓰고 두툼한 옷을 입은 아기의 모습에서 내 딸의 영상이 자꾸 겹쳐졌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렸나 보다.

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낑’하고 안전 지대에 올라섰습니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져 가만히 서 있습니다.

 글이 이렇게 끝나서 너무 슬펐다. 뭔가 잘못된 거야, 동화책이 이렇게 슬퍼도 되는 거야, 왜 엄마를 못 만난 거야, 라고 구시렁대며 책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보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지막 장에 이르니 아하, 그럼 그렇지, 하는 탄성이 나오게 하는 그림이 숨어 있었다. 그린이의 그 센스라니. 이 그림책은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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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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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내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책 한 권 사준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읽으라면서 왜 책을 사주지 않는 걸까. 나중에야 내가 알게 된 것은 우리 집은 책을 살 여유가 없었고, 그보다 우리 엄마는 독서는 학교에서 해결해주는 것으로 믿으셨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교에서 뭘 배우길래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허구한 날 하셨을까.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동화책만 보면 흥분되곤 한다. 그림책을 보면 더 가슴이 뛴다. 그림과 글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책을 보면 내 어린 날을 그런 책들과 벗하며 지내지 못한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하니 시려지곤 한다. 그 때문에 나는 가끔 동화책을 읽는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읽는 한 선배가 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정말이지 흥분과 입가에 배시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숲 속에 사는 동물 네 마리가 주인공인 책이다.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흥분하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는 두더지 모울, 자신이 사는 와일드우드 마을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영리하고 재치 있는 물쥐 래트, 무슨 일을 하건 싫증을 곧잘 내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허풍이 심한 두꺼비 토드, 여럿이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만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주변의 모든 동물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명한 오소리 배저 아저씨. 이야기는 땅 속에서 혼자 살고 있던 두더지 모울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 땅 위의 무슨 소리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된다. 땅 속에서만 틀어박혀 있다 보게 된 세상은 모울에게 천국과도 같다. 발 닿는 대로 어슬렁거리던 모울은 강물이 불어난 강기슭에 이른다.


모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강을 본 적이 없었다. 강은 매끄럽고, 구불구불하고, 통통한 동물 같았다. 이 동물은 꼴꼴거리며 무언가를 쫓아가서 콸콸거리면서 붙잡았다가 쏴쏴거리면서 놓아 주었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새 친구들의 뒤를 다시 덮쳤다. 강의 새 친구들은 붙잡혔다가 놓여나기를 되풀이했다. 이 동물은 반짝거리면서 번쩍거리면서 팟팟거리면서 찰찰대면서 윙윙대면서 졸졸거리면서 보글거리면서 몸서리를 쳐댔다.(12)


모울이 세상을 보는 눈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세상을 얼마나 설렁설렁 보아 왔고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은 개성이 저마다 다른 동물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말썽을 잘 일으킨다고 해서, 성격이 무뚝뚝하다고 해서, 단정 짓길 좋아한다고 해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격은 달라도 착한 심성을 가졌기에 네 동물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더욱 친해진다. 그런 사건의 중심에는 늘 두꺼비 토드가 있다. 토드가 벌이는 짓거리는 때때로 배꼽 잡을 정도로 웃긴다. 이런 친구가 주위에 있다면 골치야 좀 썩겠지만 삶이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더라. 말썽장이 토드를 언제든 보듬어 안는 두 친구와 배저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에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두더지 모울이 정말 좋았다. 모울이 땅 속을 박차고 세상을 나오는 순간부터 느끼는 온갖 벅찬 감정들은 내가 삶의 순간순간마다 느끼는 것들이었고, 모울이 혼자만 살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기쁨과 힘겨움은 나 또한 느끼던 것들이었다. 숱한 경험 속에서 모울은 현명해지기로 한다. 기특도 하지.

모울은 현명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기 미래가 걸려 있는 즐거운 곳을 지켜야만 했다. 모울은 그곳에서 충분한 모험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삶을 펼쳐야 했다.(106)

이 책은 날 때부터 시력이 약해 앞을 잘 보지 못한 가엾은 아들은 위해 케네스 그레이엄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매일 밤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더지와 물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휴가 동안에는 두꺼비의 모험담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저자의 진한 부성애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도 언젠가 내 딸에게 이런 멋진 동화를 지어내서 읽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력에 나는 때때로 숨을 멈추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곤 했다. 그러나 바람만 클 뿐 현실의 나는 모자란 상상력과 언어의 빈곤에 시달린다. 꺼이~

- 배는 뒤집혔고, 모울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물이 얼마나 차갑고, 얼마나 끔찍이도 축축하게 느껴졌는지!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때에 얼마나 귀가 울렸는지! 어푸어푸하고 콜록콜록하면서 물 위로 떠올라서 바라본 햇살은 얼마나 밟고 정다웠는지! 다시 아래로 가라앉을 때에는 얼마나 캄캄한 절망을 느꼈는지!(32)

- 돌아보면 지난 일은 무척 화려하고 다양한 그림이 곁들여진 멋진 책의 한 페이지와도 같았다.(63)

- 냉혹하고 매서운 하늘이 귀를 쫑긋하고 있는 어느 추운 날 오후, 모울은 따뜻한 응접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잎사귀 하나 없이 황량했다. 모울은 여태까지 자연의 여신이 일 년에 한 번씩 옷을 몽땅 벗고 깊은 잠에 빠지는 그 겨울날처럼 자연의 모습을 이렇게 깊이, 또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신비로운 탐험지였던 잡목 숲, 골짜기, 채석장, 그리고 감춰져 있던 모든 곳들이 이제는 가슴 아프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지니고 있던 비밀을 모두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낡은 속임수로 모울에게 장난을 치고 술수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을 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 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 모울은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 아무 꾸밈없이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 자연을 보는 게 좋았다. 모울은 벌거벗은 뿌리로 다가갔다. 그것들은 섬세하고 강하고 순수했다.(65)

- 솔새 한 마리가 어두운 강둑 가장자리에 몸을 감추고 작고 가는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지났건만 하늘은 아직도 주춤거리며 이별을 고하는 낮 빛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찌뿌드드한 오후 열기도 한풀 꺾여서, 짧은 한여름밤의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흩어지듯이 사라져 버렸다.(161)

- 아름다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나면 누구나 그 꿈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 몽상가는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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