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2  매일 시읽기 45일

홀로(Alone)
- 이하이 노래 / 안신애 작사 / 글로잉독 작곡 

홀로 있는 게 가만히 있는 게
어려운 일인가요
홀로 있어도 같이 있어도
외로운 건 같아요
One day it will stop
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되는 것 아닌가요
햇빛을 쬐고 숨 쉬어 봐도
쉽지는 않네요
One day it will stop
And I’m gonna stop cryin’, stop feelin’, stop thinkin’ ‘bout you my babe
이제 그만 울 거야 나 올 거야 나를 더 아껴줄 거야
And I’m gonna stop …
쟤보다 내가 나보다 쟤가
나은 게 중요한가요
수많은 날을 괴로워하다
이제 좀 알겠어요
가만히 앉아 걱정하기엔
난 너무 소중해요
들여다봐요 맘속의 민낯
그대로 괜찮아요
It’s gotta stop
And I’m gonna stop cryin’, stop feelin’, stop thinkin’ ‘bout you my babe
이제 그만 울 거야 나 올 거야 나를 더 아껴줄 거야
And I’m gonna stop …
And I’m gonna stop
홀로 있는 게 가만히 있는 게
어려운 일인가요
홀로 있어도 같이 있어도
외로운 건 같아요
One day it will stop


얼만 전 친한 동생이 ˝언니 선물˝ 하며 최신곡들을 톡으로 쏘아주었다. 열네 곡 중 나의 뇌와 심장에 톡! 박힌 것이 이하이의 ‘홀로‘였다. 나는 책과 달리 노래는 날마다 찾아서 듣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노래가 생각나면 듣고, 이렇게 누가 날라주면 듣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듣고, 그러다 맘에 들면 주구장창 듣는다. 가사는 거의 못 외우고, 외우지 않는다. 외우려 하지 않는 날들이 길어져 못 외우게 된 것 같지만.

아무튼, 이하이의 ‘홀로‘는 2020년 7월에 발매한 디지털 싱글 앨범 타이틀곡이다. 찾아 듣지 않았으니 발매 당시로부터 얼마 전까지 몰랐던 사실이다. 앨범 소개글은 이렇다. ˝홀로 남아 외로움의 시간을 견뎌낸 이하이 본인과 폐쇄된 사회적 환경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곡. 홀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곡.˝

영어 가사 One day it will stop 의 it 이 무얼까 궁금했는데, 앨범 소개글을 보니 코로나 19가 초래한 전세계인의 독수공방 처지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선율을 타고 흐르는 이하이의 중저음
목소리는 듣는 이의 일그러지진 심장을 펴주는 듯하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라며 아픈 배를 만져 주던 엄마의 손길처럼. 음유시인 같은 목소리다.

홀로 있고 가만히 있는 것이 누군가에는 힘들 일일 것이다. 나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 혼자 있어도 심심함을 모른다. 때론 심심함을 즐긴다. 무료함이 선사하는 느긋한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내가 주목했던 가사는 ˝홀로 있어도 같이 있어도 외로운 건 같아요˝였다. 외로움의 점수를 매기자면 홀로 있는 외로움보다 같이 있는 외로움이 더 크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독거노인이 되면 달라질 것 같다.
그때는 공감이고 나발이고 누구라도 곁에 있어 주면 그저 좋지 않을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마)에서 이렇게 말한다.˝우리는 고독하다. 뇌 속에서는, 우리는 특히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는 않는다.˝(132)
˝우리는 아플 때 매 순간 줄곧 아프다.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나의 뇌는 아픔과 함께 있다. 아니, 아픔 속에 있고, 아픔 그 자체다. 나의 뇌가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아플 때 우리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픈‘ 것이다. / 그리고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절절한 친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격렬한 통증을 뇌에서 꺼내어 건네줄 수는 없다. 우리의 뇌 속으로 찾아와 느끼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138) ​

내가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을 모양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꺼내어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같이 있어도 외롭다. 내 생각과 느낌을 누구에게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매정한 현실에 홀로 있어도 외롭다. 어찌 살라는 말이냐. 어쩌라는 말이냐. 관계를 끊어? 백퍼센트 감정이입과 공감이 불가능한 관계를 그럼에도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기시 마사히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도 빼고,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의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히 나눌 수 있다. /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141) ​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 안에서 저마다 고독하다. 그 사실만큼은 나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연민이 싹튼다.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이 솟는다. 너도 나와 같구나 라는 동질감도 생긴다. 그러면 이승의 삶이 아주 조금(어쩌면 눈꼽만치), 덜 외로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111 매일 시읽기 44일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 이원하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젊은 시인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이틀째 읽는다. 며칠 더 볼 예정이다.

이 시집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웃음과 울음이겠다. 웃음은 시인의 울고 싶은 심정을 가리는 장치이자 살아가는 방편이겠다. 긴 제목들과 몇 편의 시들을 읽어본 나의 소감을 요약하자면 이 시집은 시로 담아낸 자기 치유서 같다. 방황하는 청춘들, 나를 찾으려 애쓰는 세대들, 날마다 "발전"하고 싶은 패배자들, 웃음으로 무장하고 싶은 속울음꾼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너의 한 세상이 "불쑥" 나오자 나의 한 세상은 "움푹" 꺼졌다. 꺼져버린 어둠 속 세상에서 시인은 웃는다. "빛을 비추면" 누구라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밝아서 빛이라면" 웃음꽃 피운 표정이 빛이 될 터이니.

그렇게 웃어도 "빈자리의 결핍"은 결핍으로만 남아 있다.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인가 아닌가 잘 몰라 "결핍에게 슬쩍 전화"까지 걸어 확인해 본다. 이 기발 난 생각 좀 보소. 결핍의 원인은 상실 같다. 소중한 대상을 잃은 상실. 자신이 떠나간 대상보다 5년 뒤면 나이가 많아진다는 사실에 대한 기막힘과 씁쓸함.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그 씁쓸함을 혀끝으로, 식도로, 내장으로 느꼈으리라.

모든 상실은 시간과 더불어 흐릿해진다.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그 일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르는 일보다,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그 맘도 "아무 감정"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고 아무 것도 아닌 감정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상실은 옅어질 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결핍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시인은 웃는다. 보이면 더 웃을 수 있다. 알게 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110 매일 시읽기 43일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는 2020년을 달군 시집 같다. 4월에 첫 출간 7월에 8쇄를 찍었다. 내가 구매한 시기가 10월이니 8쇄 이후로는 판매량이 주춤해진 모양이다. 북플에 많이 소개되는 시인이어서 궁금해서 구매했다.

이원하 시인은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젊다. 싱그럽다. 이력이 특이하다. 미용 보조, 단역 배우, 카페 바리스타로 일했다. 시를 쓰고 싶어 제주로 내려갔다는데, 재미나면서 기특한 이유다. 내 지인들이 제주에 사는 까닭은 고향이어서, 직장이 거기여서, 아이들 정서 발달을 위해서이다. 시를 쓰기 위해 제주에 내려간 이십대 예비 시인은 6개월 만에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바로 그 어렵다는 ‘등단.‘

시인은 수험생이 수능 시험 준비를 하듯 매일 시를 썼다. 어떤 때는 밤에 불을 켜두는 것이 무서워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시를 썼다고 한다. 밤의 전등불보다 등단 실패가 더 무서워 정말로 열심히, 아주 부지런히 썼다고. 나는 시인의 이 각별한 노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어졌다.

시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읽어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1109 매일 시읽기 42일 

서울의 달 
- 김건모 작곡 / 최준영 작사  
 
오늘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텅 빈 방안에 누워 이 생각 저런 생각에
​기나긴 한숨 담배연기 또 하루가 지나고
​하나 되는 게 없고 사랑도 떠나가 버리고
​술잔에 미친 저 하늘에 달과
​한 잔 주거니 받거니 이 밤이 가는구나
​​​오늘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가끔 비가 내리면 구름에 니 모습이 가려
​어두운 거리 더 쓸쓸해지네
​텅 빈 이 거리 오늘도 혼자서 걸어가네
​오늘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슬픈 추억 안고 사는구나
​텅 빈 가슴 안고....


김건모의 ‘서울의 달‘은 2005년 6월 발매된 10집 앨범 <Be Like...>의 타이틀곡이다. 김건모 본인이 작곡하고 김건모의 오랜 음악동료인 작곡가 최준영이 작사를 했다. 앨범 정보에는 이런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3,40대의 상실감을 소재로 한 ‘서울의 달.‘˝

달에게 마음이 있을 리 없다. 처량한 것은 달이 아니라 화자의 ˝텅 빈 가슴˝이다. 화자는 까만 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는, 왠지 쓸쓸해 보이고, 왠지 허전해 보이는 달을 빌어 자신의 헛헛함을,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이다. 오늘 우연찮게 내 핸폰에 저장된 이 노래를 듣게됐는데,
반복되는 ˝텅빈 가슴 안고˝라는 가사에 어제 만난 후배가 떠올랐다.

이럴 리 없는 나와 내가 그렇지 뭐, 사이. 

후배 모친상으로 장례식장에 갔다 거의 이십 년 만에 한 후배를 만났다. 대학 시절 곧잘 나를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잘 치던 사이였다. 사회에 발을 디딘 후론, 대부분의 관계가 그러하듯 각자의 생활에 충실했고 만남은 끊어졌다. 대부분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이제는 장례식장에서나 본다.

누구나처럼 그 후배도 꿈이 많았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교우 관계도 좋았기에 앞날이 밝아 보였다. 목표한 꿈을 좇아 산 지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신이 바랐던 만큼의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다(나도 그렇다). 술도 한 잔 걸치지 않았는데, 술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를 후배는 제삼자처럼 말했다.

˝누나,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면 깜짝깜짝 놀래. 이럴 리 없어. 내가 50이나 먹었단 말이야. 이럴 리 없어.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어쩌라고~~~~~. 그러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밤이 되잖아. 그럼 이렇게 자조하게 돼. 니가 그렇지 뭐.˝

˝니가 그렇지 뭐˝라는 말에서 우리 둘은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우리가 그렇지 뭐. 

김건모의 ‘서울의 달‘은 이럴 리 없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가슴에 구멍 하나 가지고 사는 거라고 얼마 전 썼더랬는데, 벌써 중년이 돼버린(말도 안 돼) 후배 녀석도 가슴에 생긴 구멍으로 스산한 바람이 드나드니 삶도 스산한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다. 구멍은 생겨버렸고, 바람을 불어대쌌고, 세월은 재깍재깍 가고, 피부는 축축축 처지고, 흰머리는 우후죽순 돋고. 그러나 뭘 어쩌겠는가. 허니 노래나 듣자. 덧붙여 기시 마사히코의 글이나 또 되새겨 보자.

˝되풀이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누구나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든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적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1108  매일 시읽기 41일 

그때는 미처 몰랐제 
- 박제영 

젊었응께 어렸응께 
정말로 그때는 미처 몰랐제 
서른둘에 이장이 되어서 내가 처음 한 게 
나무를 벤 기라 
마을 어귀 삼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를 베어낸 기라 
길을 내야 했거든 
봐라 저 휑한 길을, 저 흉한 걸 내가 만든 기라 
어르신들 반대를 무릅쓰고 
공약을 지킨 거 그땐 그리 자랑스러울 수 없었는데 
젊었응께 어렸응께 
저 신작로를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날 줄 몰랐제 
이리 될 줄은 이리 텅 빌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네 

내가 사람을 벤 기라 
나무를 벤 기 아니라 사람들을 벤 기라 


박제영 시인의 <<식구>>를 한 번 더 펼친다. 발문을 쓴 정제영 시인은 박제영 시인의 시가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 더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로 확장된다˝고 썼다. 그의 시가 내 식구에 국한돼 있지 않다는 건 시집을 읽으면 저절로 느껴진다.

‘그때는 미처 몰랐제‘는 꾸밈없는 사투리 입담 덕에 발랄함이 풍기건만, 이장 경력을 가진 화자의 마지막 말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젊어서, 어려서, 뭘 몰라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이 어디 한둘일까. 때론 인생이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함께 좋자고, 더불어 잘살자고 한 일이 너나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돼버렸을 땐, 그 일을 도모한 내 손을 베어버리고 싶지 않을까.

내 경우엔, 나의 말이 혹 누군가를 베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