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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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매일 시읽기 44일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 이원하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젊은 시인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이틀째 읽는다. 며칠 더 볼 예정이다.

이 시집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웃음과 울음이겠다. 웃음은 시인의 울고 싶은 심정을 가리는 장치이자 살아가는 방편이겠다. 긴 제목들과 몇 편의 시들을 읽어본 나의 소감을 요약하자면 이 시집은 시로 담아낸 자기 치유서 같다. 방황하는 청춘들, 나를 찾으려 애쓰는 세대들, 날마다 "발전"하고 싶은 패배자들, 웃음으로 무장하고 싶은 속울음꾼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너의 한 세상이 "불쑥" 나오자 나의 한 세상은 "움푹" 꺼졌다. 꺼져버린 어둠 속 세상에서 시인은 웃는다. "빛을 비추면" 누구라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밝아서 빛이라면" 웃음꽃 피운 표정이 빛이 될 터이니.

그렇게 웃어도 "빈자리의 결핍"은 결핍으로만 남아 있다.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인가 아닌가 잘 몰라 "결핍에게 슬쩍 전화"까지 걸어 확인해 본다. 이 기발 난 생각 좀 보소. 결핍의 원인은 상실 같다. 소중한 대상을 잃은 상실. 자신이 떠나간 대상보다 5년 뒤면 나이가 많아진다는 사실에 대한 기막힘과 씁쓸함.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그 씁쓸함을 혀끝으로, 식도로, 내장으로 느꼈으리라.

모든 상실은 시간과 더불어 흐릿해진다.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그 일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르는 일보다,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그 맘도 "아무 감정"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고 아무 것도 아닌 감정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상실은 옅어질 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결핍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시인은 웃는다. 보이면 더 웃을 수 있다. 알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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