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8  매일 시읽기 41일 

그때는 미처 몰랐제 
- 박제영 

젊었응께 어렸응께 
정말로 그때는 미처 몰랐제 
서른둘에 이장이 되어서 내가 처음 한 게 
나무를 벤 기라 
마을 어귀 삼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를 베어낸 기라 
길을 내야 했거든 
봐라 저 휑한 길을, 저 흉한 걸 내가 만든 기라 
어르신들 반대를 무릅쓰고 
공약을 지킨 거 그땐 그리 자랑스러울 수 없었는데 
젊었응께 어렸응께 
저 신작로를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날 줄 몰랐제 
이리 될 줄은 이리 텅 빌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네 

내가 사람을 벤 기라 
나무를 벤 기 아니라 사람들을 벤 기라 


박제영 시인의 <<식구>>를 한 번 더 펼친다. 발문을 쓴 정제영 시인은 박제영 시인의 시가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 더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로 확장된다˝고 썼다. 그의 시가 내 식구에 국한돼 있지 않다는 건 시집을 읽으면 저절로 느껴진다.

‘그때는 미처 몰랐제‘는 꾸밈없는 사투리 입담 덕에 발랄함이 풍기건만, 이장 경력을 가진 화자의 마지막 말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젊어서, 어려서, 뭘 몰라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이 어디 한둘일까. 때론 인생이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함께 좋자고, 더불어 잘살자고 한 일이 너나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돼버렸을 땐, 그 일을 도모한 내 손을 베어버리고 싶지 않을까.

내 경우엔, 나의 말이 혹 누군가를 베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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