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228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손재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013 매일 시읽기 15일

가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나뭇잎이 진다. 잎이 진다. 멀리서 날려 오듯
하늘의 아득한 정원이 시든 듯
거부하는 몸짓으로 나뭇잎이 진다.

그리고 밤에는 무거운 대지가
많은 별에서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모두 떨어진다.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을 보라, 조락은 어느 것에나 있다.

그러나 이 조락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쳐 주는 어느 한 분이 있다.


열린책에서 2016년에 출간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선집 <<두이노의 비가>>는 '한 권으로 읽는 릴케'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다. 1899년부터 1922년까지 릴케가 24년간 발표한 총 8권의 시집에서 170여 편의 작품을 선별해 만든 선집이다. 역자 해설 제외하고 463페이지. 작품을 고르고 번역을 한 손재준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쳐주겠다. 번역도 깔끔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어본 사람이면 스쳐 지나가듯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시인이다. 나 역시 그런 독자들 중 한 명이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 . . . . .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시는 생살 씹듯 오물거리며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글이지만 매일 시읽기라는 혼자만의 프로젝트 때문에 오래 전 사두었던 이 시집을 꺼내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그러다 만난 <가을날>은 어찌나 반갑던지. 익숙하고도 익숙한 첫 시구,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119) 그러나 나의 가슴을 적신 시는 초가을을 노래한 이 시보다 늦가을의 정서를 간결하게 묘사한 <가을>이란 시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1826년 스위스 몽트뢰 언덕에 자리한 발몽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1세(우리나라 나이로 52세).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병세가 완연해졌을 때 릴케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상상만 해보아도 몸이 부르르 떨린다.

릴케의 시들을 면발 들이키듯 후루룩 맛본 느낌으로 말하자면, 릴케는 무릇 존재란 창조와 동시에 소멸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모든 것은 탄생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간다. <가을>도 같은 맥락을 노래하고 있다. 나뭇잎도 피고 지고, 별도 뜨고 진다. 모든 것이 "떨 어 진 다."

사랑, 고독, 죽음. 릴케의 시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 선집을 뒤적거리면서 든 생각은, 아, '시인은 사물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자'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릴케는 한동안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 정치학
케이트 밀렛 지음, 김유경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36쪽. 와. 절대 다 안 읽을 것 같지만 소장 욕구를 부르는 책. 문학과 결부된 3부 내용이 젤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챙김의 시
류시화 엮음 / 수오서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 시읽기 14일

​야생 붓꽃
- 루이스 글릭(Luise Gluck)

​내 고통의 끝에
문이 있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보라.
당신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머리 위, 소음들, 소나무 가지들의 자리바꿈
그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린 태양만이
메마른 흙 위에서 깜박거릴 뿐.

끔찍한 일이다, 어두운 땅속에 묻혀
의식을 가지고
생존한다는 것은.

그때 끝이 났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한 영혼으로 존재하면서도 말을 할 수 없던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했던 흙이
약간 위로 부풀었다. 그러자 내게 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키 작은 관목 속으로 내리꽂혔다.

다른 세상에서 돌아온 통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내가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잊혀진 상태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내 삶의 중심으로부터
커다란 물줄기가 솟아났다.
하늘색 바다에
깊고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류시화 옮김)

​The Wild Iris

​At the end of my suffering
there was a door.

​Hear me out: that which you call death
I remember.

​Overhead, noises, branches of the pine shifting.
Then nothing. The weak sun
flickered over the dry surface.

​It is terrible to survive
as consciousness
buried in the dark earth.

​Then it was over: that which you fear, being
a soul and unable
to speak, ending abruptly, the stiff earth
bending a little. And what I took to be
birds darting in low shrubs.

​You who do not remember
passage from the other world
I tell you I could speak again: whatever
returns from oblivion returns
to find a voice:

from the center of my life came
a great fountain, deep blue
shadows on azure seawater. ​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리스 글릭(77세)의 시다. 나는 이 시인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여성이 상을 탄 것은 환영이고, 미국인으로서 10번째인 건 유감이다. 노벨상, 그 중에서도 문학상은 지나치게 서양에 치우쳐 있다.

우리나라에는 류시화 시인이 올해 출간한 #마음챙김의시(수오서재) 시집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고,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포르체)에 다른 시 한 편이 소개 되어 있다. 두 시집 모두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노벨상에 선정된 후 스웨덴 한림원이 시인과 한 통화가 화제인가 보다. 노벨상 관계자가 글릭이 추구하는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묻자 글릭은 자신은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하니 2분의 시간만을 허락하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건 지나치게 거대한 문제고, 여기는 아침 7시밖에 안 됐다. 그에 대해선 생각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죠. 그렇지만 2분이 지나지 않았나요?"

아주 시건방진 인터뷰로 보일 수 있겠으나, 자신이 누리는 일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할 만하다. 노벨상 상금으로 원하는 집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고 한다.

2009년에 글릭에 관한 논문을 쓴 양균원 대진대 영문과 교수는 글릭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굉장히 언어가 간결하고, 언어가 투명해서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 속에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출처: 조선일보)

​이 시는 첫 두 행이 아주 마음에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꽃 민음사 세계시인선 1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201011 매일 시읽기 13일

#음울 Spleen
- #샤를피에르보들레르

오랜 권태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마음 위에
무겁게 내리덮인 하늘이 뚜껑처럼 짓누르며,
지평선의 틀을 죄어 껴안고, 밤보다도 더욱
처량한 어두운 낮을 우리에게 내리부을 때.

대지가 온통 축축한 토굴감옥으로 변하고,
거기서 <희망>은 박쥐처럼 겁먹은 날개로
마냥 벽들을 두들기며, 썩은 천장에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떠돌 때,

내리는 비 광막한 빗발을 펼쳐
드넓은 감옥의 쇠격자처럼 둘러칠 때,
더러운 거미들이 벙어리떼를 지어
우리 뇌 속에 그물을 칠 때면,

별안간 종들이 맹렬하게 터져 울리며
하늘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니,
흡사 고향을 잃고 떠도는 정령들이
끈길지게 울부짖기 시작하는 듯.

ㅡ 그리곤 북도 음악도 없는 긴 영구차 행렬이
내 넋 속을 느릿느릿 줄지어 가는구나.
<희망>은 꺾여 눈물짓고 잔인 난폭한 <고뇌>가
내 푹 숙인 두개골 위에 검은 기를 꽂는다.


#악의꽃 제1부에 실려 있는 4편의 <음울Spleen> 중 맨 끝 편이다.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으로 1974년 출간된 <<악의 꽃>>은 번역문과 원문이 함께 실려 있고, 문학 박사인 김붕구 교수의 상세한 해설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은 1994년의 개정 증보판 1쇄이다. 해설은 글자 크기가 작고, 외람되지만 옮긴이의 우리말 글쓰기가 원활하지 않아 읽기에 쉽지 않다.

#악의꽃 초판은 1857년, 보들레르 나이 37세 때 출판되었다. 총 101편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861년 출간된 증보판에서는 6편이 삭제되고 36편이 추가되어 총 130편 6부로 구성되었다. 초판 출간 당시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뉜 이 시집은 몇몇 과도한 표현들로 법원에서 6편 삭제라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을 두고 ˝이 혹독한 책 속에, 나는 내 온 심혼을, 내 온 애정을, 내 온 종교(변조된)를, 내 온 증오를 집어넣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

나는 20대 때 보들레르를 읽고 구체적으로 뭐가 좋은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고뇌와 절망이 읽혀 좋아했다. 보들레르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반사회적이고 반정통적이었다. 방탕한 한량이었고, 고립된 외톨이였다(쉬운 말로 왕따). 보들레르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 접점을 못 찾은 인물로 보인다. 짧은 생(46세)을 살다간 것이 그에게는 다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음울은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였다. 마지막 두 행은 이 시의 압권이다. ˝‘희망‘은 꺾여 눈물짓고 잔인 난폭한 ‘고뇌‘가 / 내 푹 숙인 두개골 위에 검은 기를 꽂는다.˝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권태의 동굴. 이 시를 압축하라면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사는 동안 이런 때를 마주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신은(나는 신을 믿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이 박쥐처럼 날개를 접고 웅크리고만 있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 하루하루 살아가나. 그런 게 궁금해지는 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책읽기 2020-10-1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럴수럴수. 황현산님의 2016년 리뉴얼 번역본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니. 꺼이~~~
 
둘이라서 좋아
김응 지음, 황정하 그림 / 창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010 매일 시읽기 12일 



모든 게 놀이 

- 김응 


냉장고에 먹을 게 없을 때는 

식당 놀이를 할 거야 

나는 솜씨 좋은 주방장 

동생은 배고픈 손님 

주방장은 색종이로 김밥을 만들고 

지우개 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뚝딱 음식을 내놓지 



방바닥이 차가울 때는 

겨울 왕국 놀이를 할 거야 

나는 성에 갇힌 엘사 

동생은 용감한 안나 

안나는 보자기 망토를 두르고 

비닐봉지 장화를 신고 나타나 

엘사를 구해 내지 



집 안이 깜깜할 때는 

동굴 탐험 놀이를 할 거야 

나는 지혜로운 대장 

동생은 똑똑한 대원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발맞춰 

둘이 함께 길을 헤쳐 나가지 


​김응 시인의 <<둘이라서 좋아>>(창비)에 실려 있는 시들 중 한 편이다.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시집이었는데, 이제야 펼쳐서 또박또박 읽는다. 이제야 읽어 미안해지는 시집이다. 읽다가 아리고 짠하고 슬프다 기쁘다 한다. 귀결되는 감정은 므흣므흣.

김응 시인에게는 김유라는 동화를 쓰는 동생이 있다. 자매 작가들이다. 김유 작가가 소개글을 썼다. 눈시울이 불거지게 할 만큼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발랄하게도 썼다. <<둘이라서 좋아>> 시집도 비슷한 톤을 띠고 있다. 명랑하게 써내려간 가난한 날들의 기록. 

​이 시집은 열두 살 언니와 일곱 살 동생이 부모를 잃고 둘이 사는 동안 있었던 경험담을 이야기한 동시집이다. 의지할 대상이 둘밖에 없었기에 자매의 정이 돈독하다.

​‘모든 게 놀이‘는 자매가 슬픔을 이겨 내기 위한 방법으로 했던 무수한 놀이에서 탄생한 시다.

​˝슬픔을 이겨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요,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슬프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한없이 슬퍼지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놀이로 만들었고, 그 놀이들은 우리를 꿈꾸게 했어요.˝(김유 97)

​놀이로 꿈을 꾸던 열두 살 언니와 일곱 살 동생은 동시 작가, 동화 작가가 되어 시와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꿈을 실어 나르며 지금도 의좋게 산다. 물론 날마다 싸우면서(동생의 말이다 ㅋ).  

슬픔을 승화해 마음을 정화하는 이야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아이와 어른이 둘이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시집. 중딩 딸이 말했다. ˝슬픈데 공감이 갔어. 또 엄마 얘기더라고.˝ ㅋ 딸에게 내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길 잘했다. 이 친구의 공감력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