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0 매일 시읽기 32일 

길고양이 밥 주기 
- 황인숙 

언제까지 . . . . . . 
언제까지! 
내가 쓰러질 때까지? 
그 뒤에는? 
고양이들은 계속 슬픈 새끼를 치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다 
(옆에도 없다, 앞에도 없다) 

아무도 없어도 되는 그 날까지 
고양이들아, 너희 핏줄 속 명랑함을 잃지 말렴! 

사실 나는 낙천주의자 
폭삭 지친 내게 
고양이밥을 놓지 말라고 목청 높이던 젊은 엄마가 
조르르 고양이 밥그릇을 찾아 들고 와 
길바닥에 패대기치는 어린 아들을 
나 보기 부끄러워하며 살짝 야단칠 때 
그 ‘살짝‘에 한낱 희망을 실어보누나
아, 그 탐스런 작은 손으로 
고양이한테 밥을 줘봤으면!

길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게 
죽음의 문턱에서 데려오는 일이 
더 이상 아니게 될 그날까지


시인 황인숙은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길고양이들을 거둬 먹이는 엄마 노릇을 40년 넘게 하고 산다고 한다. 시인의 데뷔 시도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1984)였고, 그간 낸 시집이며 산문집과 장편소설에서도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황인숙 시인에겐 시를 쓰는 일과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 우위를 다툴 수 없는 일이란다.  ˝내 삶은 길고양이들 밥을 주기 전과 후로 갈렸다˝라고 말할 정도다. 고양이들 밥 주는 시간을 줄여 시 쓰기에 힘을 모으라고 지인들이 때로 타박도 한다는데, 시인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깨지 않고 묵묵히, 꾸준히, 고양이들을 돌본다고 한다. 동물을 싫어하지는 않으나 동물을 돌보는 것은 싫어하는 나로서는 시인의 고양이 사랑이 놀랍다.

‘돌본다‘는 것은 사랑과 책임이 동반되는 일이다. 나는 모든 동물이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여기는 1인이지만, 사회는 변했고, 변한 세상에서 같이 사는 동물의 존재도 ‘애완‘에서 ‘반려‘로 바뀌었다. 동물권은 중요하다. 고양이 밥그릇을 ˝길바닥에 패대기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은 인간들의 밥그릇을 저울질하는 일도 없는 세상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황인숙 시인이 따끈따끈한 산문집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달)를 출간했다. 시인들의 글은 ‘시‘로 읽는 게 제일 좋지만 산문은 또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허나, 지금으로선 읽고 싶은 다른 책들이 너~~~~무 많아 한동안 펼쳐 보기 힘들겠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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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매일 시읽기 31일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며칠 전 옆지기 핸폰에서 들려온 음악. 가을이면 어김없이, 자주, 등장하는 그 노래. 그런데 목소리가 내가 아는 그 가수가 아니네. 원곡 가수보다 발음이 또렷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네. 아하. 이적.

나는 최백호의 음악성은 인정하나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많이 들었던 그의 노래는 ‘낭만에 대하여‘보다 ‘영일만 친구‘였다.

이적의 목소리로 듣는 ‘낭만에 대하여‘는 훨씬 호소력 있고, 가사가 귀에 쏙쏙 다가와 박혔다. 나는 최백호보다 이적이 더 좋네 했다가, 내쳐 유튜브로 검색을 해보니 어머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유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와 불렀더라는.

나훈아, 린, 송가인, 임영웅/영탁, 김호중, 탤런트 김응수 등등등. 아주 많은 연예인들이 이 노래를 불렀더라.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할아버지할아버지, 아줌마아저씨들은 한 번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노래를 듣다 든 생각. 왜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을까. 그건 아마도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자는 씩씩해야 해, 남자는 강인해야 해, 남자는 늘어지면 안 돼,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 남자는 가족을 건사해야 해 등등등, 남자라는 호칭에 따라붙는 무수한 의무들 때문에 목이 조이고 숨이 막혔을 남자들에게 숨통 한 번 트이게 해주려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이 계절만은 센치해져도, 울적해져도, 울먹거려도 된다는.

‘낭만에 대하여‘가 실려 있는 최백호의 앨범은 1995년에 발매되었다. 발매 후 2년 동안은 거의 팔리지 않았던 이 앨범은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의 <<목욕탕집 남자들>>에 등장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하루 2천 장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재미나게 보았건만, ‘낭만에 대하여‘가 흐르고 불렸다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백호씨는 1950년생이다. ‘낭만에 대하여‘는 그의 나이 46세 때 처음 불렀다. 아직 젊다. 가사에 등장하는 첫사랑 그 소녀는 최백호씨가 통학열차에서 만난 실제 소녀가 모티브가 되어 가사화 되었단다. 2020년 현재. 그는 71세, 일흔하나가 되었다. 최백호씨도 그 소녀도 노래 가사에 맞게 늙어가고 있다.

늙어가나, 아직은 늙어간다고 말하기 싫고, 말하기 꺼려지는 오늘의 나는, 이 노래 가사에서 가장 와닿는 구절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가슴에 구멍 하나 이상 뚫린 채 사는 일 같다. 그 구멍은 다시 오지 않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생긴다. 구멍의 개수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사진은 ‘낭만에 대하여‘ 앨범 앞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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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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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8 매일 시읽기 30일

송년회
- 황인숙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 (아마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2016)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황인숙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2007년 이후 거의 십 년만이다. 어제 올린 황인숙의 대표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도 드러나듯 이 시인의 시들은 기본적으로 애잔하면서 쾌활하다. 해설을 쓴 조재룡 평론가는 황인숙의 시들이 ˝우수와 명랑˝을 띄고 있다고 말한다. 동감한다. 나는 해설을 꼼꼼히 읽지는 않는 편인데(많이 어렵고, 말장난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 평론가의 글은 잘 읽혔다. 그래서 다 읽었다.

우리네 인생이란 언제나 좀, 때론 많이, 쓸쓸하다. 쓸쓸함의 저변에는 애잔함이 깔려 있다. 내가 쓸쓸하면, 쓸쓸해 봤으면, 타인도 그러하리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밝고 환한 웃음들 이면에는 너나없이 쉬이 내뱉지 못하는 울음들이 숨겨져 있음을, 이 나이쯤 이르면, 아니 이 나이까지 이르지 않아도 다 안다. 고파도, 슬퍼도, 아파도, 표정이 어두우면 인생까지 어두워질까 염려스러워 사람들은 허허실실 웃는다. 그렇게 명랑함을 가장한다.

황인숙의 명랑함은 가장되지 않다. 이 시인의 명랑함은 ‘길고양이 밥 주기‘라는 시에서 드러나듯 고양이들의 ˝핏줄 속 명랑함˝을 닮은 듯하다. 인생은 고달프나 우리 안에는 ‘명랑함‘이 내재해 있으니 어느 때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황인숙의 시들은 술술 읽힌다. 우리 동네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재미 있다. 삶에 지쳤을 때 읽으면 위로가 된다. ‘풉‘하고 웃게도 된다.

오십대가 되기 전까지 시인은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단다. 나는 아니었고, 우리 엄마는 그랬다. 우리 엄마가 55세 무렵부터 달고 산 말 중 하나는, ˝내가 5년만 젊었으면˝ 하는 소리였다. 5년이 흘러 보니, 엄마는 5년 전 할 수 있던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 5년 후, 또 5년 후에도 그랬다. 그랬기에 엄마는 언제나 나의 반면교사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나이는 숫자보다 더 많은 함의를 지닌다. 나는 어떤 나이에 이르면 내가 생각한 모습만큼 커 있지 않아서(몸이 아닌 정신이) 늘 당황스러웠다. 초딩 때 본 중학생, 중딩 때 본 고등학생, 고딩 때 본 대학생, 대딩 때 본 직장인 선배, 20대 때 본 30대, 30대 때 본 40대, 40대 때 본 50대, 그들은 내게 언제나 뿌리 단단히 박힌 큰 나무들 같았다. 내가 막상 그 나이에 이르고 보면 나는 늘 뿌리가 언제 뽑힐지 모를 위태위태한 묘목이었다.

그 이유를 어느 날 내가 깨달은 간명한 이치는 그 나이가 내가 처음 사는 나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많은 십대, 이십대, 삼심대, 사십대, 오십대가 있어도 나의 ~대는 언제나 처음이다. 그래서 낯설다. 낯선 것들은 당혹감을 준다. 당혹스러운데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산다. 왜 누가 봐도 나는 어른이거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랬듯, 내가 큰 나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을 살고 있다. 그러니 허리 곧게 펴고 앞으로!

그리고 매일 시읽기 30일을 자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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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통의 물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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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담겨진 그릇의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득 찬 연못의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비추어 보아도 나는 역시 반 통의 물에 가깝다. 스스로 충만해서 일렁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이고, 반쯤 모자라 출렁거리고 사는 어리석음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다. 지금까지 글을 써온 것도 내 속에 채워지지 못한, 또는 잃어버린 절반으로 하여 뒤척인 날들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책머리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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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매일 시읽기 29일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 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 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내가 매일 시읽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니 한 친구가 아느냐며 알려준 시다. 몰랐다. 시 제목을 듣자마자 내게 떠오른 것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황인숙은 이름을 아는 시인이고, 집 책꽂이에 떡하니 한 권의 시집이 꽂혀 있기도 한데, 이 발랄한 제목의 발랄한 시를 왜 여태 몰랐던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시인 황인숙의 데뷔 시다. 1984년(어머나 36년 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88년 출간된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 지성사)에 실려 있다.

나는 이 시를 꿈꾸는 고양이의 저항이자 항거로 읽었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부뚜막에서의 안락한 삶을 거부한다. 이 고양이는 인간이 던져주는 먹이 핥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손길에 머리 들이미는 짓을 거부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툇마루를 박차고 너른 들판을 달리겠다 한다. 이 고양이는 참새떼를 덮치고 들쥐와 뛰어 놀겠다한다.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아도 어둠을 핥겠다 한다. 아늑한 짚단 속에 쏙 들어가 달빛을 벗하며 잠을 청하겠다 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아. 너는 자연인이 아닌 자연고양이를 꿈꾸는구나. 너의 그 꿈에 내 꿈을 실으마. 함께 달려보자. 너는 물론 앞발사레를 치겠지만.

황인숙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대입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가 보다. 입시생들의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고, 친절한 샘들의 상세한 설명도(이른바 칼질) 많이 보인다. 나는 국어 만점이 그렇게나 힘들던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시를 앞에 놓고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하는
순간 시는 죽는다.

사진은 윤필의 <<야옹이와 흰둥이 1>> 표지. 이 글을 쓰다 급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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