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9 매일 시읽기 31일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며칠 전 옆지기 핸폰에서 들려온 음악. 가을이면 어김없이, 자주, 등장하는 그 노래. 그런데 목소리가 내가 아는 그 가수가 아니네. 원곡 가수보다 발음이 또렷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네. 아하. 이적.

나는 최백호의 음악성은 인정하나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많이 들었던 그의 노래는 ‘낭만에 대하여‘보다 ‘영일만 친구‘였다.

이적의 목소리로 듣는 ‘낭만에 대하여‘는 훨씬 호소력 있고, 가사가 귀에 쏙쏙 다가와 박혔다. 나는 최백호보다 이적이 더 좋네 했다가, 내쳐 유튜브로 검색을 해보니 어머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유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와 불렀더라는.

나훈아, 린, 송가인, 임영웅/영탁, 김호중, 탤런트 김응수 등등등. 아주 많은 연예인들이 이 노래를 불렀더라.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할아버지할아버지, 아줌마아저씨들은 한 번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노래를 듣다 든 생각. 왜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을까. 그건 아마도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자는 씩씩해야 해, 남자는 강인해야 해, 남자는 늘어지면 안 돼,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 남자는 가족을 건사해야 해 등등등, 남자라는 호칭에 따라붙는 무수한 의무들 때문에 목이 조이고 숨이 막혔을 남자들에게 숨통 한 번 트이게 해주려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이 계절만은 센치해져도, 울적해져도, 울먹거려도 된다는.

‘낭만에 대하여‘가 실려 있는 최백호의 앨범은 1995년에 발매되었다. 발매 후 2년 동안은 거의 팔리지 않았던 이 앨범은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의 <<목욕탕집 남자들>>에 등장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하루 2천 장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재미나게 보았건만, ‘낭만에 대하여‘가 흐르고 불렸다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백호씨는 1950년생이다. ‘낭만에 대하여‘는 그의 나이 46세 때 처음 불렀다. 아직 젊다. 가사에 등장하는 첫사랑 그 소녀는 최백호씨가 통학열차에서 만난 실제 소녀가 모티브가 되어 가사화 되었단다. 2020년 현재. 그는 71세, 일흔하나가 되었다. 최백호씨도 그 소녀도 노래 가사에 맞게 늙어가고 있다.

늙어가나, 아직은 늙어간다고 말하기 싫고, 말하기 꺼려지는 오늘의 나는, 이 노래 가사에서 가장 와닿는 구절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가슴에 구멍 하나 이상 뚫린 채 사는 일 같다. 그 구멍은 다시 오지 않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생긴다. 구멍의 개수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사진은 ‘낭만에 대하여‘ 앨범 앞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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