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7 #시라는별 12 

그리고 겨울, 

- 이규리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끝을 모른다는 것 

길 저쪽 눈부심이 있어도 가지 않으리라는 것

가지 못하리라는 것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그뿐 

겨울은 잘못이 없으니 

당신의 통점은 당신이 찾아라 

나는 

원인도 모르는 슬픔으로 격리되겠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옹호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또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잦다. 자주 보니 점점 시큰둥해진다. 그래도 눈이 내려 세상이 설탕 가루 뿌린 듯 눈부심의 향연을 펼치면 언제나 설렌다. 이번에는 작은 눈송이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나려 눈이 오는 줄도 몰랐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창밖 풍경은 초록과 하양의 앙상블. 눈이 그친 뒤 이어질 불편함과 더러움은 잠시 잊자. 아름다움에 취하자. 

눈이 오면 이제는 백석의 나타샤보다 이규리의 첫눈입니까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갔다. (시인의 말)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시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저 "못함"과 "않음" 사이, 생의 불확실성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슬픔과 의지를 이야기하는 시집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리고 겨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이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시작에 불과"하고 "끝을 모르"겠는 것이다. "눈부심"이 있는 무엇이나 화자는 거기까지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가지 않겠노라 선수를 쳐버린다. 그리고 당부하듯 훈계하듯 선언한다.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인생에 답이 있나? 있을 리가 없지. 다만 희노애락은 있지. 그 중에서도 '애哀'는 넘치도록 있지. 넘쳐나서 내 속에 담을 수 없는 슬픔, "원인도 모르는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하나? 화자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대신 "슬픔으로 격리"되는 길을 택한다. 인생은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의 잘못이 아니다. "겨울은 잘못이" 없다. 잘못 없는 겨울을 탓해 무엇하리.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아픈 곳, 온몸에 퍼져 있어 외부 자극에 쑤시듯, 찔리듯, 눌리듯 아파오는 그곳, "통점"을 찾는 일에 힘써라. "위험을 무릅쓰고" 삶을 "옹호하라." 그렇게 살다 "이후 /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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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7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코로나로 부터 격리된 삶, 우리모두 누군가의 첫눈,,, 유일하게 허락된 공중 위를 풀풀 날리는 자유~
행복한 책읽기님 ‘슬픔으로 격리‘라는 문구에 가슴속에 콕!

시보다 더좋은 행복한 책읽기님에 리뷰 ^0^

행복한책읽기 2021-02-17 12:04   좋아요 2 | URL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이 표현 넘 멋있죠. 시인들은 정말 좋겠어요. 근사한 말들이 막 춤을 춰대니. scott님은 내게 알라딘이 선사한 첫눈^^

미미 2021-02-17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꾸준히 읽으셔서 글에 시적 감성이 묻어 있는 듯해요! 잘 읽었어용^^♡

행복한책읽기 2021-02-17 12:10   좋아요 2 | URL
히히히. 미미님, 제가 작년에 잘한 일 중 하나가 시 읽기랍니다. 까짓 함 읽어봐, 하는 즉흥적인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좋아져서 그럼 죽기 전까지 읽어봐? 하는 맘까지 이르렀다는^^ 같이 읽어줘 고마워요~~~~^^

희선 2021-02-19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에도 눈 왔어요 어제 새벽에도 왔는데, 낮에는 많이 녹았더군요 예전에는 눈 오면 맞고 다녔는데, 이번 겨울에는 눈 올 때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도 눈이 오고 아주 춥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거 보면서 지구를 걱정했네요 겨울이어도 살아야죠 이젠 곧 봄이 오겠습니다 마음에도 봄이 올지...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