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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여애반다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평점 :
20210207 시라는별 9
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 이성복
냇물 가장자리 빈터에 새끼오리 너댓 마리 엄마 따라 나와 놀고 있었는데, 덤불숲 뒤에서 까치라는 놈 새끼들 낚아채려 달려드니, 어미는 날개 펼쳐 품속으로 거두었다 멋쩍은 듯 까치가 물러나고, 엄마 품 빠져나온 새끼들은 주억거리며 또 장난질이었다 그것도 잠시, 초록 물무늬 독사가 가는 혀 날름대며 나타나니, 절름발이 시늉하며 어미는 둔덕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 그 속내 알 리 없는 새끼들 멍하니 바라만 보고, 그때 덤불숲 까치가 다짜고짜 새끼 모가지 하나를 비틀어 물고 갔다 그리고 차례차례 그 가냘픈 모가지를 비틀어 물고 갈 때마다, 남은 새끼들은 정말 푸들, 푸들, 떨고 있었다 다 아 얼마나 무서웠을까? 돌아온 어미가 새끼들 부를 때, 덤불숲 까치는 제 새끼 입속에 피 묻은 살점을 뜯어 넣어주고 있었다 아, 저 엄마는 어떻게 살까?
이 시는 이성복 시인이 인생을 십 년 단위로 나눈 시기(래여애반다라 來如哀反多羅) 중 ‘哀‘에 해당하는 시다. 그러니까 ‘슬픔을 맛보‘는 때이다. 그 뜻 그대로 이 시를 읽고 펑펑 울 뻔했다. 흐르는 눈물은 그대로 두었고 꺼이꺼이 나오려는 울음은 삼켰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 건 제목부터였고 기어이 눈물 터지게 한 건 마지막 구절, ˝아, 저 엄마는 어떻게 살까?˝였다.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내 엄마, 세월호 부모, 각종 재난과 참사로 숨진 이들과 그들의 가족, 친지, 지인 등등등.
인생의 슬픔(哀)을 맛보는 때가 비단 스물에서 서른 사이에 국한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이 시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을 맛보고 그 사실에 치를 떨고 그 사실 앞에 좌절하다 결국은 그 슬픔을 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삶의 본질을 깨달아버린 듯하다. 왜냐하면 까치도 뱀도 남의 새끼를 죽여야 제 새끼를 살릴 수 있다.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새끼오리들은 모가지 비틀린 채 어미 까치에게
물려가는 자매들을 두 눈 뜬 채 보면서 그저 ˝푸들, 푸들˝ 떨고 있을수밖에 없다. 엄마 무서워요, 엄마, 어디 있어요? 어미오리는 다리를 절뚝이며 뱀을 유인하러 갔다. 어미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다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지 못했다. 지킬 수 있을 줄 알고 지키려 했던 새끼들을 잃은 어미 오리는 이제 어이 살까?
이성복 시인은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발표한 시 <정든 유곽에서>으로 등단했고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출간했다. 데뷔 나이 스물여섯, 첫 시집 발표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이성복 시인은 대학 은사이자 문학평론가인 고 김현 선생의
추천사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려 한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시절(청년)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고.
˝우리는 이번 호에도 새로운 시인을 소개하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이성복 씨의 시에는 상처 받은 젊은이의 아픔과 아픔 그대로 선열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획실하지 읺으니,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이성복 씨의 시가 가지고 있는 큰 장점 중의 하니라고 생각한다. 아픔의 근원과 증세가 확실하다면, 이미 그것은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될 수 있는 아픔이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 김현의 1977년 추천사 중 )
인생의 어느 때고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때가 없다. 이유가 있는 상처들은 그 어느 때고 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흐려지되 절대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도 있다. 남의 목숨에 빌붙어 사는 존재가 어디 저 시의 까치와 뱀 뿐이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러하다. 모든 생명은 생명이 깃든 다른 존재를 등쳐먹고 살거나 잘해봐야 그것에 기대어 산다. 인생의 본질이 그러하다. 아프고 슬프다. 이 아픔과 슬픔은 결코 치유될 수 없고
죽어서야 끝이 날 터이다.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 저 엄마는 어떻게 살까?˝ 라는 물음 뒤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그럼에도 . . . 그럼에도 여전히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슬프지만,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아름다움을 찾으려 애쓰리라. 몰라 그렇지, 아름다움 역시 지천에 깔려 있을지 모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