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1400년
버나드 루이스 엮음, 김호동 옮김 / 까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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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버나드 루이스의 책은 필수다. '서구 중심 시각'이라는 비판이 만만찮기는 하지만, 어쨌든 루이스만큼 이슬람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풍부하게 알고, 펼쳐보일 수 있는 학자가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루이스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중동 정치나 유럽과의 관계 못잖게 이슬람 사회의 제도와 조직체계, 도시생활, 문학, 미술, 건축, 음악까지 사회문화적 측면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화질은 떨어지지만 삽화와 사진도 많이 넣었다. 사실 루이스가 아니면 서구의 어느 학자가 이란의 시와 아다브 문학, 모스크의 건축원리같은 것들을 이렇게 한 상 요란하게 차려줄 수 있을까.

그런데 공부삼아 루이스의 책을 읽다보면 그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많이 생긴다. 이 주제 저 주제를 넘나들다보니 정신이 없다고 할까. 일목요연하게 꿰어지지가 않는다. 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펼쳐놓지만 글이 그다지 아름답지가 못하다. 역시나 저술가의 책이라기보다는 '학자의 책'이어서일까. 게다가 투르크(오스만)를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에(이것이 바로 서구적인 시각) 아랍의 본류를 놓치기가 쉽다. 더욱이 치명적인 약점은- 1976년에 쓴 것이다보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점. 이건 작가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무려 이란 팔레비왕조 시절에 쓴 책이라니. 79년 호메이니 혁명 이후의 이슬람은 그 이전의 이슬람세계와는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 그것을 반영하지 못해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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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의 충돌 - 아메리코필리아와 옥시덴털리즘을 넘어
타리크 알리 지음, 정철수 옮김 / 미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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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알리, 라는 이름 때문에 책을 사놓았던 것인데 어째 표지나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좀 그랬다. 쿨 하게 보이지가 않아서 그냥 놓아두고만 있었다. 요사이 다시 '이슬람 주간'이라서 책장을 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타리크 알리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저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란 것은 거의 '정체성의 충돌'로 점철돼 있는 듯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이슬람권 사람'이다. 인도의 명문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아니다.

명문가의 좌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무신론자 아들. 또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출생했지만 명문가의 아들답게 영국에 가서 공부한, 즉 식민통치의 아픔과 수탈보다는 특혜와 서구화의 혜택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사람이다(그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했다. 알리네 집은 아마도 대단한 명문이었던 모양이다. 파키스탄 독립의 아버지 무하마드 알리 진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자와할랄 네루, 파키스탄의 군부독재자 지아 울 하크, 줄피카르 부토와 그 딸 베나지르 같은 당대의 정치가들이 모두 그의 '지인'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리는 이슬람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랍인은 아니다. 그의 가문의 토양인 인도-파키스탄은 무굴의 이슬람 문화와 인도 고유의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므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변방이라 할만하다. 어쨌든 그는 다양한 정체성의 갭들 사이를 넘나들었고, 이슬람세계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아주 폭넓고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지적했듯, 알리는 무슬림이 아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세계 대부분이 이 제국(미국)을 '착한 나라'로 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작정이다'라고 밝힌다. 그는 종교적 근본주의 자체를 '근대성의 산물'로 정의하면서, '두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제국의 횡포를 비판하고, 또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를 비판한다. 그 광기에 몸을 내던지고도 반성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쪽이 워낙 신랄해서, 전세계의 무지한 친미주의자들보다는 '이슬람 동포'들에게 읽히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좋았던 것은, 앞서 지적한 알리의 독특한 내력 덕분에 '안에서 보는 바깥의 시선'으로 이슬람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점. 이슬람 주요 국가들의 지나온 사정을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지적을 해놨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됐다. 덕택에 니자르 카바니의 시들을 읽게 됐으니, 그건 덤으로 얻은 수확.

짧은 이야기 한 토막.

 

1920년대 카슈미르 지식인들이 농민들의 참상을 부각시킨 이야기 중 하나는 마하라자(왕)가 캐딜락을 구입한 일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전하가 페할감으로 차를 몰고 갔을때, 감탄한 농민들이 자동차 주위로 몰려들어서 그 앞에 신선한 풀을 흩뿌려놓았다. 마하라자는 농부들이 자동차를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몇몇 농부가 울기 시작했다. "왜 울고 있느냐?" 통치자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농부 한 명이 대답했다. "전하의 새로운 동물이 도대체 풀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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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작은 다리를 건너서
이케자와 나츠키 지음, 모토하시 세이이치 사진 / 달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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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까운 시절의 일인데도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기억의 조작' 내지는 '강요된 망각'인지도 모를, 그런 일들.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케자와 나츠키(글)와 모토하시 세이이치(사진)가 전해주는 이라크의 풍경은, 불과 몇달전의 모습인데도 마치 오래 지난 옛날처럼 느껴진다. 티그리스강에서 배를 띄워놓고 노는 아이들, 고대유적을 지키는 아버지와 아들, 시장통 사람들, 아주 일상적인 스케치들. 지금도 이라크에서는 어쩌면, 똑같은 풍경이 살아있을지 모른다.

이번 전쟁은 미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과시했던 전쟁이었고, 민간인 피해나 오폭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으며, 이라크인들의 '물리적인'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또한 어디에서든 사람은 살게 마련이므로. 그런데도 책 속의 '사람 사는' 모습은 오래된 과거처럼만 보인다.

'나 역시 석유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나라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세계경제시스템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몸이다.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켜 나가기만 하는 글로벌리즘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논하기는 하면서도,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 무인도에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려하지는 않는다.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패권을 비판하는 문장을 쓰기만 할뿐, 그 이상의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상상력이 있다. 2001년 늦가을에, 만일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때 내가 상정한 나의 모습은, 군벌의 지도자도 아니고 탈레반의 간부도 아닌 보통의 시민이라는 신분, 즉 폭탄을 맞아야 하는 몸이었다. 이라크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사람들의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질지 알고 싶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생생히 전달되어오기 때문에, 바그다드와 바스라, 모술에 사는 이라크 사람들의 얼굴은 이케자와의 책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의 말을 빌자면 미국은 '건조물 3347HG' '교량 4490BB' 따위를 공격할 뿐이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밀리암이라는 아낙네와 세 명의 아들, 그녀의 사촌인 젊은 병사 유세프, 유세프의 아버지인 농부 압둘인 것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죽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전쟁의 참혹함을 머리 속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다. 한 이라크소녀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에게 '나의 얼굴을 떠올리라'고 외쳤던 것, 그리고 그 호소가 우리 마음에 절절이 와닿았던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구체적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죽어갈지 모르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라는 것.

작가가 이라크를 방문한 것은 지난해 10월무렵이었기 때문에 전쟁과는 시간차이가 좀 난다(사담 후세인 체제하의 이라크를 겉에서만 보고 너무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아주 적은- 불과 몇달의 차이일 뿐인데 책은 이라크의 과거가 되어버렸다. 희망이 있다면 그 과거는 어느 부분에서는 과거일지라도 큰 흐름에서는 결국 현재진행형이고, 또한 미래를 담은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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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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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동화책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아마도 이 책, '작은 책방'의 서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먼지 쌓인 다락방 냄새가 나는 듯했던 그 글, 저렇게 책 속에 쌓여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경. 어른이 된 지금도 '보리와 임금님'의 한 구절 한 구절, 머리를 길게 기른 일곱 공주 이야기, 서쪽 숲나라에 나오는 명랑한 하녀와 무뚝뚝한 임금님 이야기를 언제건 떠올릴 수 있다.

또래 사람들(아저씨, 아줌마들)과 엘리너 파전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이 책을 꺼내어 읽어봤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그 느낌은 별로 살아있지 않았다. 책은 그대로인데 나는 나이를 먹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특히 기대했던 '서쪽 숲나라'의 느낌이 예전같지 않아 섭섭했다. '우리말 다듬기 이오덕'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말을 너무 다듬어서일까. 아이들용--당연한거지만--의 친절한 존대말투가 오히려 감정을 퇴색시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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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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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모드 타고서 촘스키 책이 하도 많이 나와 요새 좀 지겨워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래오래 붙들고 있다가 오늘에야 뗐다. 하도 오래 붙잡고 있다보니 군데군데 포스트잇 붙여둔 페이지를 펼쳐봐도, 대체 왜 붙여놨는지를 모르겠다. '예의' 촘스키식 세상보기는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유행처럼 상품화되어버렸기 때문일까. 다만 번역은 참으로 훌륭하다. <숙명의 트라이앵글> 때문에 열받았던 생각을 하면-- 이 책 번역은 정말 칭찬할만 하다.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밍고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질질 끌고 또 끌어서 별다른 감흥 없었지만 저 구절은 스크랩해두고 싶다. 아이티라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 아닌가. 그런데 저 구절을 읽으니 갑자기 그 나라가 조금, 아주 조금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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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2004-03-0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명의 트라이앵글 절판됐더군요. 비싼 돈 주고 읽다만걸 생각하면...으으 돈아까워라,,,이 책은 번역이 잘되었다니,,땡기는군요.

딸기 2004-03-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동과 관련된(?) 학계에서, 트라이앵글 번역한 분이, 저 책 번역 잘못한 것 때문에 완전히 망신당했다고 들었어요. 출판사에서 부랴부랴 절판시켰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히 팔아치운 뒤였다죠. 그쪽 학계에 계신 분한테 들었어요.
<507 정복은 계속된다>는 번역 추천 만빵입니다. 실은 번역자가 저하고 절친한 분인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번역 잘 했어요. 오죽하면, 저 책 읽은 제 친구는, 저 번역자 팬하겠다고 했을 정도. 그 친구도 트라이앵글에 완전히 데었더랬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