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rioli > 딸기님의 장자 해석에 대한 부동의

매미와 새끼 비둘기


5.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그것을 보고 함께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한껏 날아보아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이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미쳐 땅에 내려앉고 마는데,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니.”

가까운 숲으로 놀러가는 사람은 세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미나 새끼 비둘기 같은 미물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아는 것(小知)으로 많이 아는 것(大知)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大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침에 잠깐 났다가 시드는 버섯은 저녁과 새벽을 알 수 없습니다. 여름 한 철 사는 메뚜기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짧은 삶’입니다.

조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신령한 거북이 살았습니다. 이 거북에게는 봄, 가을이 오백 년씩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오랜 옛날에 춘(椿)이라는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에게는 봄, 가을이 각각 팔천 년씩이었습니다. 이것이 ‘긴 삶’입니다. 그런데 팽조(彭祖)가 (700년 혹은 800년을 살았다 하여) 오래 살았다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니 슬프지 않습니까.


* 椿 참죽나무 춘.


첫째, 진짜 곤이고 붕이라면 매미와 새끼 비둘기를 업신여길 것 같지는 않다.

둘째, 매미와 새끼 비둘기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거라면 뭣 때문에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남?

셋째, 곤이건 붕이건 매미와 새끼 비둘기보다 더 가치있고 행복한가? 그럼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고 행복한 건 뭔가?

 

* 나도 예전에 장자를 읽고 쓴 글이 있어,  그 입장에서 딸기 님에게 반론을 해 본다.

 

첫째,

곤과 붕은 자신을 매미와 새끼 비둘기와 같다고 여길까?

같다고 여기려고 몸부림치겠지만 안 될 것이다.

(1) 궁극적으로 한 인간이 타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2) 그러면 전자는 후자를 불쌍히 여기거나 업신여기거나 둘 중 하나다.

굳이 하나 더 추가하자면, 무관심이다.

(3) '불쌍히 여김'(=사랑=자비) 과 '업신여김' 은 종이 한 장 차 아닌가.

 

둘째, 

곤과 붕이 구만리 장천을 날든 땅에서 매미와 새끼 비둘기를 제도하든 그 맘이다.

- 옛날은 곤과 붕에게 그리 큰 역할이 요구되지도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자신이 긍휼히 여김 당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 현대는 누구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는 시대이다.

곤과 붕에게도 자유를 달라. 위선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셋째,

곤과 붕은 더 행복한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쟤는 왜 저래?' 라고 하는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훨씬 더 행복하다.

곤과 붕의 삶이 더 가치있는가?

그렇다. 편한 거 보다는 힘든 게 더 가치 있기 마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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