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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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류학자인 저자가 수십년간 세계를 돌며 직접 보고 느낀 `야만과 문명의 스케치'다. 퓰리처상을 받았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을 사람이라면 이 책도 즐겁고 편하게 읽을 수 있을 듯. 두 책 모두 인류 역사의 진화과정을 다루는 부분에서 모두 윌리엄 맥닐의 책(`전염병과 인류')를 근거로 삼고 있고, 내용도 많이 겹친다. 굳이 말하면 이 책은 방대한 `총,균,쇠'의 `가벼운 버전'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티베트에서 그토록 극명하게 드러난 문화 간의 갈등을 목격한 후,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인간 집단이 어떻게 서로 그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문화가 아직 세계에 존재하는가? 그 문화가 어떻게 이제껏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는가? 전세계의 인간 문화는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가, 좁아지고 있는가?


책은 맥닐과 다이아몬드에게서 과학적 지식을 빌어 오고, 중세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에게서 문명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왔다. 그러나 책을 가장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 저자의 전공인 인류학적 지식들이다. 시신을 새의 먹이로 주는 티베트의 천장(天葬)에서 저자는 인간 문화의 다양성을 보고, 호주 사막의 애버리진(원주민)들과 베링해의 알류트족을 통해 문명의 정착과정을 통찰한다.


치차가 갓 숙성되어 마시기에 알맞은 정도가 되면, 그 집 가족은 신의 눈 십자가나 아니면 그냥 흰색 깃발을 문간 위에 걸어둔다. 그러면 그 집은 그날부터 며칠동안 치차를 마실 수 있는 주점으로 변한다. 한 잔에 몇 센트를 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환영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사하라를 건너간다기보다 항해하여 지나간다. 노련한 운전자와 안내인들은 가던 길을 끊임없이 멈추고 주변을 관측하고 자신의 위치를 계산한다. 낮에는 해의 위치와 또 계절에 따라 부는 바람을 기준으로 방향을 찾고, 밤에는 항해사와 같은 방법, 즉 별을 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성경에 나오는 세 명의 동방박사처럼 이들은 떠오르는 어떤 별이 어떤 오아시스를 가리키고 어떤 별이 어떤 마을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다. 북에서 출발하여 드디어 사하라를 건너면 사헬에 도착한다.


노점상들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모든 학과의 축소판 졸업증서를 판다. 해외로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졸업증서와 로이드 에어로 볼리비아노 또는 미국 항공사의 비행기 표와 똑같은 축소판 복제품을 살 수 있다. 축소판 볼리비아 지폐와 미국달러도 살 수 있다. 몇가지 달러에는 미국 대통령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우르쿠피냐의 동정녀나 심지어는 악마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지폐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이러한 물건들을 모두 작은 농가 안에 진열하고 나면 숭배자들은 색종이 조각과 리본을 그 위에 뿌리고 또 서로에게도 뿌려준다.


저자의 발걸음은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니카라과의 해안, 파나마와 뉴기니, 이집트의 옛도시 알렉산드리아와 볼리비아의 산길을 헤집고 다닌다. 책은 지나치게 저널리스틱(혹은 센세이셔널)하지도, 아카데믹하지도 않다. 하지만 지구촌 곳곳을 누빈 저자와 함께 인류가 지나온, 지금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길들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사와 현실 속에서 야만과 문명의 교차점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책은 제목에서부터 `야만'과 `문명'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지만 역사를 보는 그의 시선에 제국주의의 기색은 전혀 없다. 이 책의 기본 전제는 `성찰'이다. 서양과 비(非)서양, 근대와 전근대의 대립구도를 억지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란 그렇게 단선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알게 해준다. 책에서 `야만'은 도시민이 유목민을 부르던 이름(이븐 할둔)이 되기도 하고, 기독교도들이 칭기즈칸을 지칭하던 이름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호주 태즈메이니아의 영국인들이 원주민들을 부르던 이름이고, 저자가 20세기말 미국 워싱턴의 뒷골목을 묘사할때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현대적인 세계 속에서 야만을 찾아내려면 우리는 낭만적인 폴리네시아나 암흑의 아프리카, 신비한 아시아, 야생의 아마존과 같은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눈길을 돌려 우리 자신의 사회를, 문명 세계의 심장부를 이루는 도시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야만과 문명의 미로를 헤매고 나온 독자들이 얻는 결론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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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uko 2005-05-19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총균쇠도 아직 읽지 않았는데.... 아직도 뒤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네요...
근데 딸기님. 어제 제 페이퍼에서 보셨다시피 제가 이슬람 쪽으로 너무너무 아는 게 없어서 그러는데 시작하는 마음으로 읽기에 좋은 책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 님의 리스트를 보긴 했는데 넘 많아서요.. 진짜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으로 부탁 드립니다...꾸벅....(맨날 물어보기만 해서 죄송해요....)

풍로초 2005-05-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았습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보다 이 책이 조금 더 먼저 나온 책이네요. 이 책은 1994년에 나온 책인데 야만과 문명사에 대해서 친절한 접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두 권 모두 야만과 문명에 대한 배부른 정보를 주는 것만은 분명하고요. 그런데 님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신간을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관심 있던 책에 대해 리뷰가 올라와서 처음으로 댓글 남겨요. 저는 원본으로 접했던 책인데 국내판도 읽어 보아야겠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딸기 2005-05-19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정;;이 있어서 이 책 신간을 좀 일찍 보게 됐어요. 리뷰 잘 읽으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
(그런데 혹시... 윌리엄 맥닐 책도 원본으로 갖고 계신지요 ^^;;)

클리오 2005-05-2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총.균.쇠 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걸 어찌 아시고..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