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 르와젤의 피터 팬 - 1,2권 합본 (양장본) 비앤비 유럽만화 컬렉션 4
레지스 르와젤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앤비(B&B)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아마 내가 읽은 첫번째,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인 것 같기도 한 '피터팬'은 어릴적 집에 있었던 계몽사 동화집 중의 한권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그 '피터팬'에 대해 여러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먼저, 그 책에서 '괴짜'라는 말을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 웬디네 동네 사람들이 웬디의 아버지를 '괴짜'라고 불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걸 보고 엄마한테 뜻을 물어봤었다. 엄마의 대답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별로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웬디의 아버지가 나나(개)에게 육아를 맡기고 있었다는 점-바로 이 것 때문에 웬디 아버지가 '괴짜'라고 불렸었다-이다. 웬디의 큰 개가 웬디 삼남매를 돌보았는데, 아버지는 주제에 이 개를 미워했단다. 그래서 밤중에 개를 집 밖의 개집으로 내몰았고, 하필 피터가 이 때 나타나서 개가 없는 사이 삼남매를 데리고 네버랜드로 떠난다.

어린 시절 읽은 네버랜드의 추억 따위는 몽땅 지워버리는, 아니 지우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엎어서 메스껍고 징그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레지스 르와젤의 피터팬>이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출간된 원작의 제목은 그저 '피터팬'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작가의 이름을 앞에 붙여 누구누구의 피터팬이라고 붙인 것은 참 잘한 일이지 싶다. 이런 피터팬, 이런 식으로 '피터팬'을 비비 꼬아낸 작가의 이름을 앞에다 떡하니 붙여놔야, 어린 시절 동화의 미몽에 아직도 빠져 있는 독자들이 좀 정신을 차리지 않겠는가.

피터는 주정뱅이 엄마 때문에 죽도록 고생하면서 동네 못된 인종들로부터 성추행이나 당하는, 찌들대로 찌들고 영악할대로 영악해진 애늙은이다. 팅커벨? 얘는 원작하고 좀 비슷하다. 질투심 많고 저만 아는, 그렇지만 아주 사악하지는 않은 얌체같은 요정. 나머지 등장인물은? 대체 <레지스 르와젤의 피터팬>에는 선인이란 없다. 이야기 좋아하는 늙은 영감, 피터에게 '꿈이란 무엇인가'를 설파하는 노인네 하나를 빼면, 전부 욕심많고 잔혹한 인간들이다.

고전 동화를 패러디한 작품은 많다. 폴리티컬리 코렉티드인지 뭔지 하는 운동가들이 새로이 제작해낸 베드타임 스토리들도 봤고,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이야기>라는 것도 두 권이나 봤는데, 정말 재미가 없었다. 이런 식의 패러디가 꼭 의미가 있을라나 하는 의심도 했었고, 일단 재미가 너무 없었다.

패러디라는 점만 놓고 보면 이 피터팬은 수준이 다르다. 앞서 말한 류의 동화 패러디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자라지 않는 아이'와 '어린시절의 꿈'을 반어적으로 잘도 그려내고 있다. 극도의 반어법인 셈이다. 한 가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건, 잔혹한 장면이 간간이 나온다는 것. 아무리 '현실'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난 이렇게 잔인한(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습을 굳이 그림으로까지 봐야 하는 건 싫다. 이노무 작가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무지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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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1-16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 그림동화는 패러디가 아니라, 원래의 그림동화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재미없던가요?

딸기 2004-11-1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런가봅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저는 무시무시한 건 너무 싫어하거든요 ^^

숨은아이 2004-11-1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원작 자체는 아니고, 일본 작가가 가필을 한 것입니다. 그림동화 이전에 페로의 동화가 있고, 그 이전에 프랑스와 독일의 민담이 있을 텐데, 민담도 그렇고 페로의 동화도 꽤 잔혹합니다. 그러나 그림동화는 그걸 상당히 순화시켰기에, 아마 일본 작가가 그걸 모델로 해서 새로 쓴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