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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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삼아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문턱'을 깨닫게 된다. 한가지 주제나 상황에 대해 쓰여진 책을 3권 읽으면 감이 잡히고, 10권 정도 읽으면 좀 알겠다 싶은 걸 보니 '10권'이 내게는 문턱인 셈이다. 그런데 이젠 문턱을 넘었을 때가 되었는데도 도통 내 머리로 '상상' 내지는 '재연'을 해내기 힘든 종목이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과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내가 감히 깜이 오네 안 오네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는 자못 심각하다.
뭐, 자괴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세상엔 여러가지 사람이 있고 여러가지 관심사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물리학자'라는 직업도 따로 존재하고, 더불어 물리학 책을 쓰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걸 읽는 독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나는, 물리학자들이 우주만물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아낸 것이 대체 뭔지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일반인을 위한 과학'류의 책들을 읽어주는 독자다.
나같은 독자에게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는 어떤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다 주느냐-- 과학의 성과가 갖고온 사회적 영향력, 이런 것들은 내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이중 슬릿의 그림 따위는 너무나 많이 봤지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고!),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호환이 되는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며(아인슈타인이 불세출의 천재이자 시대의 영웅이라는 것은 백번 인정한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왔다갔다 하고 공간이 휘어지고 하는 것은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다. 그러니, 10차원 11차원에 공간을 휘어감고 찢었다붙이는 초끈이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물리학 관련 책들을 읽다 보면 한번씩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수퍼스트링. 내겐 돌부리나 목에 걸린 가시같은 존재였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하필이면! 저 초끈이론에 대한 책이다.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갈팡질팡하는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까만별 10개를 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초끈이론을 완전히 이해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읽었던 통일장 이론을 다룬 교양과학서 중에서는 가히 최고였다.
책은 뉴턴 물리학을 뒤집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적어도 내가 보아왔던 책들 중에선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선생보다도 멋지게, 기가막히게 웃기는(코믹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설정이 재미있다) 비유를 들어 상대성원리를 설명해낸다. 예시한 사례와 그림을 보다 보면 어쩐지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책 전반부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탄생과정, 기본개념들을 설명하는데, 본론 못잖게 재미있었다.
이 책은 이론물리학의 첨단 조류를 다루고 있다. 별 관측하고 플라스크 들여다보는 과학자들의 얘기가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적절한 수학적 방법을 찾는 이론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과정을 포함해서, 초끈이론의 탄생과 그동안의 발전을 생생하게 소개해준다. 대체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걸 알게 됐을까,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과학 문외한들이 궁금해하기 마련인, 물리학자들의 연구 방식(생각을 전개해가는 방식)에 대해 알려준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이다. 덕택에 구체적인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끈이론 학자들의 논리를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따라갈 수가 있다.
더불어 막강하고 훌륭한 번역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읽는 재미 중에 무시 못할 부분이, 괄호 안에 들어있는 옮긴이의 설명을 읽는 거였다. 끈이론을 공부할 당시의 경험을 예시해가면서, 위트를 섞어가며 저자의 말을 풀이해 들려주는데 이게 또 쏠쏠히 재밌었다.

기본적으로 난해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읽는동안 내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 이런 책이 좀더 나와준다면, 어쩌면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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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턱은 이미 넘으신 것 같은데요?^^

balmas 2004-10-1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서평을 참 재미있게 잘 쓰세요.^^
왠지 이 서평도 뽑힐 것 같은 기분 ...(부러워라^^)

딸기 2004-10-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직도 문턱을 못 넘었다니깐요 ^^
발마스님, 칭찬 고맙습니다. 발마스님이야말로. ~~

마냐 2004-10-1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못하겠지만...딸기님이 "당신에겐 안 맞을 책"이라는 식으로 뭐라했는데...여봐란듯이 잘난체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샀지. 이게 뭔 심뽀인지. 암튼 당근 내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같은 책. 사실 첫장 이후 넘어가보지도 않았지. 근데..이글은 왜 이리 낯익지? 혹시 딸기네 있던 글인가.

딸기 2004-10-1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오해예요. 나는 그런식으로 얘기한 게 아니라구요. 마냐님이 이 책 빌려달라고 하고, 거사님이 '쉽게 볼 책 아니다'라고 해서, 내가 '마냐님이 빌려달라는 이유는 (나하고 똑같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러저러해서 아무튼 읽고 싶다, 이런 거였다고요.

아무튼, 그때 사놓고 나도 이제야 읽었다니깐. ㅋㅋㅋ 그러니 벌써 몇년이 지난 건가. 산같은 책이라고 거사님이 그러셔서 나도 쫄았는데 읽다보면 재밌어요. 초강추.

딸기 2004-10-1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기억 못하겠지만~' 이라는건 좀 웃기는걸요. 원래 기억하는 건 나의 일 아니었나. 흐흐. 어차피 마냐님도,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면서. ^^

에레혼 2004-10-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부터 <엘레건트 유니버스>란 제목을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적어놓았는데(제목이 무척 엘레강스하잖아요?^^), 아직 도전 못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문턱의 높이가 얼마쯤인지도 가늠 못 하고 있으니, 스트롱베리님의 몇 년보다 더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 책의 첫장을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ㅜㅜ

깍두기 2004-10-19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찜이에요,찜. 너무 재밌을거 같아요. 중3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본 이후에 천문, 물리계통의 교양도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건만 코스모스보다 어려운 책은 절대 이해 불가능입니다. 이건 물론 코스모스보다 당근 어렵겠지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하셨죠? 저 님의 말씀을 믿고 이 책 살테여요. 책임지세요^^
(저랑 같은 고민을 하셨네요ㅎㅎ. 아랫글을 보니^^)

나같은 독자에게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는 어떤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다 주느냐-- 과학의 성과가 갖고온 사회적 영향력, 이런 것들은 내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이중 슬릿의 그림 따위는 너무나 많이 봤지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고!),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호환이 되는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며(아인슈타인이 불세출의 천재이자 시대의 영웅이라는 것은 백번 인정한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왔다갔다 하고 공간이 휘어지고 하는 것은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다.

딸기 2004-10-1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지못할 고개를 넘어보고자 과학책을 몇번씩 들여다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고민을 이해할 겁니다. ^^ 저 책 재미있으니깐, '끈기를 갖고' 보세요. '만물이론'을 다룬 책들을 몇권 봤는데, 보통은 상대성이론 설명하는데 한참, 그리고 최근의 연구결과 나열하는 식이었어요. 저 책은 저자가 초끈이론 신봉자이다 보니 아무래도 설명이 구체적이죠. 초끈이론이 현재 학계에서 과연 그같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어쨌든 재미는 있습니다.

마냐 2004-10-20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노무 기억력. 칫. 아...이노무 건망증..이 아니라 뇌용량 한계.

딸기 2004-10-2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노무 기억력도 요즘 시원찮다 못해 의심스러운 수준이긴 해.
게다가 요샌... 흰머리... 탈모... 잔주름... ㅠ.ㅠ

마냐 2004-10-21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같이 늙어가서 다행이다.

딸기 2004-10-2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도 흰머리 생기는 중? 난 아주 미치겠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