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최전선 - 지상의 미군들
로버트 카플란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이사 간 동네가 미군기지 옆이다. 옆에도 앞에도 미군기지, 길 건너 조금만 돌아다니면 미군기지. 아파트 엘리베이터 타면 종종 미군과 미군의 가족들이고, 골목길 부동산에도 ‘미군 공식 계약 부동산’ 하는 선전이 붙어있다. 태어나 이렇게 미군들 많이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간만에 걸어보자 했는데 미군기지 기나긴 담벼락 지나가야 하고, 산보 해볼까나 하고 나서면 보이는 것은 미군 기지, 그리고 기지와 기지를 잇는 그들만의 다리들. 언덕 위 전철역은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오염됐다 해서 몇 해 전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었던 곳이다. 심지어 이 동네 지나갈 때 자동차 네비게이터를 켜면 화면이 온통 사막 같은 회색이다. 군사구역. 미군 곁에 붙어사는 것 좋아할 사람 누가 있겠느냐마는, 확실히 기분이 개운치는 않다.

작년이었나, 그 해의 ‘첫 책’을 로버트 카플란으로 장식하는 것은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서 굳이 연말에 다 읽을 수 있었던 ‘무정부주의가 온다’를 내버려두고 ‘동방견문록’을 붙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해서 그 해의 첫 책은 카플란 대신 고전으로 ‘당당히’ 독서카드에 기록을 할 수 있었는데 사실 별 의미도 없는 나만의 쓸데없는 고집일 뿐이다. 지난 연말부터 올 초까지 정신없이 바빴던 탓인지, 시간은 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인지 책을 통 읽지를 못했다. 그렇게 질질 끌기만 하다가 결국은 지난해 가을부터 오래오래 붙들고 있던 이 책으로 올해 테이프를 끊었다.

예상했던 대로, 책은 기분 나빴다. 카플란의 책은 다 기분 나쁘다. 그런데 왜 보냐고? 봐야 하니까. 카플란의 책은 결국은 출간 되는대로 골라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딱 이 작자만이 담아내는 그런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카플란은 ‘미군’을 집중 탐구한다. 그냥저냥 자료 찾고 인터뷰 곁들여 구색 잘 갖춘 저널리스틱한 책 따위로 그치진 않는다. 카플란은 직접 군복을 입고 지구상 첨예한 대립지점, 미군이 위치하는 곳곳을 찾아간다. 총 들고 순찰을 돌고, 미군이 느끼는 생명의 위협을 같이 느끼고, 사막의 먼지바람을 마신다. 그가 만나는 미군들, 그가 이 책에서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미군들은 펜타곤의 장성들 혹은 워싱턴의 군사 관료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최전선의 보병들’이다.

책은 2002년부터 2004년 사이 예멘(중부사령부), 콜롬비아(남부사령부), 몽골과 필리핀(태평양사령부), 아프가니스탄(중부사령부와 특수전사령부),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이라크(중부사령부), 그리고 미국 캠프 레준의 해병대와 노스캐롤라이나의 육군 본부를 찾아다니면서 기록한 것들이다.
카플란은 미군이 세계를 움직이는 진정한 제국의 수레바퀴라고 생각하고 있고, 미군이야말로 가장 정직하고 순결하고 고고한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더불어 가장 종교적 즉 기독교적이며 가장 도덕적(!)이라고, 그러니 못된 미디어들이 이라크전과 대테러전쟁에 오물을 씌우고 있는 현실에 맞서 이 숭고하고 빛나는 존재들이 어떻게 지구를(그러니까 미국의 이익을) 지켜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저널리스트인 자신의 임무라고. 그것이 카플란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내용은 순전히 이런 구도대로 이뤄져 있다. 포맷은 챕터 별로 거의 비슷하다. 형편무인지경으로 버려지다시피 한, 갈등과 혼란과 부패에 빠진 예멘(그리고 콜롬비아, 필리핀, 아프간, 아프리카, 이라크). 그곳을 지키는 미군 중부사령부(그리고 남부사령부, 태평양사령부). 그곳에서 뼈빠지게 국가의 이상을 지키며 숭고한 임무를 수행해가는 용감한 미군들(다만 몽골만은, 미군의 지도 하에 훌륭하게 체제를 변신시켜가는 모범사례로 소개됐다). 미국은 제국이며, 제국은 수호자들을 필요로 한다. 제국이 없으면 세상은 혼란 뿐이다(이 점에선 니얼 퍼거슨 류의 신종 제국예찬론자들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니 미국이여, 세계여, 미군을 예찬하라.

엊그제 버락 오바마 편인 시카고 교회 목사가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며 ‘갓댐 어메리카’라는 말을 했다가 난리가 났다는데, 이 작자 눈에는 아부그라이브의 미군도, 팔루자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지른 미군도 극히 도덕적이고 영웅적인 제국의 지킴이들일 뿐이다. 갓댐 어메리카.

 

그런데도 꾸역꾸역 읽기는 읽어야 하니... 어떤 저널리스트가 미군을 이렇게 직접 찾아다니며 생생한 현장에서 ‘밑바닥 미군’의 정서와 가치관을 드러내주겠느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카플란 밖에 없기 때문에 미군에 대한 그의 책은 기분나빠하면서도 굳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미군이 이런 식의 밀착 취재를 허락해준 것도 상대가 미군 사랑으로 넘쳐나는 카플란이었기 때문임을 고려한다면, 이런 식의 주제와 소재를 담은 책이 카플란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당연한 듯도 싶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미군에 대해 뭐 한 자락이라도 주워들을 필요가 있는 입장에서라면 그나마 카플란 같은 사람이 책을 써주는 게 고맙지 않느냐 하면서 읽을 수밖에. 일례로, 미군의 이라크·아프간 전쟁에서 핼리버튼 계열사 켈로그 브라운 앤드 루트 같은 ‘죽음의 기업’들의 역할을 놓고 미국 내에서도 말이 많은데, 이 책을 읽다보면 미군과 그런 기업들이 ‘남이 아닌’ 사이임을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군산복합제국주의’인 셈이다.


또 하나는, 역시나 기분 더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남들이 잘 안 돌아다니는 지역에 가서 그 적나라한 실상을 까발겨 준다는 점이다. 예멘과 콜롬비아,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와 이라크. 맛이 갈대로 간 이런 나라들에 대한 카플란의 묘사들에는 보통의 저널리스트라면 절대로 쓸 수 없는 막가파식 표현도 많이 섞여 있지만 또 그만한 통찰력이 숨어 있다. 예멘의 현재에 대해 아직 카플란이 이 책에서 써놓은 것 같은 구체적인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찌됐든 이 작자가 쓴 책은 골라골라 다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이 책의 뒷부분에 카플란이 자기 얘기를 좀 털어놓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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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3-22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해도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었군요. 그나저나 꼼꼼이 학교는 집에서 가까운가요?

딸기 2008-03-24 09:50   좋아요 0 | URL
응, 큰길 하나만 건너면 돼.
요새는 뭐니뭐니해도 안전이 최우선이니깐... 나는 큰길 말고 뒤로 돌아가라 했는데,
내 여동생은 꼼꼼이 뒷길 말고 큰길로 다니게 하라 하더라구.
교통사고와 범죄 중 더 무서운 쪽을 피해다녀야 하는 현실...

파란여우 2008-03-2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하고 나하고 이주의 마이리뷰 동반 당선되었다우 :)
축하축하!

마노아 2008-03-28 22:50   좋아요 0 | URL
오옷, 두분 모두 축하예요! 딸기 언니 얼마 전에도 타지 않았나요? 연이어 축하예요!!

딸기 2008-03-29 20:42   좋아요 0 | URL
어머나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도 축하, 언니도 축하!
마노아, 축하 고마워 ^^

멜기세덱 2008-03-31 13:09   좋아요 0 | URL
두 분 누님,,, 나 완전 꽃미남이 마구마구 축하...ㅋㅋㅋ(도망가자....ㅎㅎ)

순오기 2008-03-29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야하는 책을 친절하게 알려주시면 안 읽어도 도움이 되는군요.^^ 감사하고~~~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딸기 2008-03-29 20:42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예요. ^^

전자인간 2008-03-3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