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황금나침반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촘스키의 책, 신선미가 떨어져서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는데 어째 또 한권 뚝 떨어졌다. 읽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동안 우르르 쏟아져나왔던 책들이 전작들 울궈먹기 짜깁기로 펴낸 듯한 느낌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번엔 이라크전 이후 상황에 대한 내용들이 꽤 들어가 있다. 촘스키가 이제 어찌나 유명한지, 원제는 ‘실패한 국가’인데 한국어판 제목은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로 바뀌었네그랴.

눈길 끌었던 대목.

내게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력 사용의 정당성을 규정하는 일이라 대답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도적 개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증명이라는 무거운 짐이 남는다. 게다가 역사의 기록 앞에서도 우리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179쪽]


이 부분은 요새 관심 많이 갖고 있는 주제인데, 인도적 개입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럴 때에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될까? 피터 싱어가 ‘세계화의 윤리’에서 얘기한 대로, 현재로서는 ‘유엔의 판단’이 가장 타당한 기준이 될 것 같다. 유엔이 강대국 논리에 좌우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유엔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유엔이 강대국 입김에 휘둘리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유엔이 분명 이라크전을 반대했었음을, 끝내 승인을 거부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미국은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전쟁이란 무시무시한 것에 비판이라는 온건한 매를 드는 것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엔의 무기력함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이 인정하지 않은 침략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들어 군대까지 보냈던 나라, 그 나라의 정부와 그 나라 국민들의 자세를 반성해보는 일 아닐까. 한국인들의 절반은 이라크 파병에 찬성했다. 적어도 한국인들의 절반은, ‘힘의 논리’와 연결지어 유엔의 무기력함을 욕할 자격이 없다.

미국의 중동 패권 약화와 아시아 에너지 연대 부상 가능성에 대한 부분, 그 과정에서 캐스팅보트로서 인도가 갖고 있는 위상 등에 대한 내용도 눈길을 끌었다.

이란의 분석가 아이자드 아흐마드는 “서구 세계가 쥐고 있는 세계 에너지의 공급권을 극복하고, 아시아의 절대적인 산업 혁명을 이루고자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시아 에너지 안보망’에서 이란은 향후 10년 내에 실질적 중심축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한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여기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며, 일본이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도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가 중요한 변수이다. 인도는 이란과의 석유 파이프라인 협상에서 철수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거부했다. 하지만 IAEA의 반(反)이란 결의안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편에 서면서 그들의 위선에 동참했다. 지금까지 이란이 그런대로 준수해 온 듯한 NPT 체제를 인도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큰 틀에서의 이야기인 셈인데, 어쨌든 인도가 ‘캐스팅 보트’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한국도 얘기되는데, 노무현 정권 들어서 한미관계의 균열이 외부에 많이 비치면서 한국의 ‘독립성’이 좀 높게 평가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옆에 있는 이상, 촘스키의 전망이 아주 틀릴 것 같지도 않다. 가설로만 놓고 봐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촘스키는 또 베네수엘라의 메르코수르 규합 움직임과 친 중국 행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중국의 관계가 피상적으로는 많이 다뤄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나 상호 접근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까지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공략전’은 아프리카를 상대로 한 것에 비해 덜 부각돼 있어서 짐작하기도 힘들다. 우고 차베스는 볼리바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아직 ‘통합국가’까지는 아니지만 범 라틴아메리카 경제권 구상을 공개적으로 내걸고 있다. 이 쪽 행보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아무래도 가장 큰 궁금증은, 이라크의 앞날과 미국의 입장에 대한 것이다. 이라크가 과거 미국이 침공했던 그 어느 나라들보다도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궁금한 것은, 옳건 그르건 미국이 갖고 있는 ‘재건된 이라크’의 상(像)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좌파 중에서도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프랑스 외무장관을 맡은 인도적 개입론자 베르나르 쿠슈네르 같은 사람들이 부시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한 반면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후쿠야마 같은 이들은 반대했다. 미국의 전통적 보수파들이 부시 행정부를 비판한 것은, 결국 부시행정부에 전후 이라크의 총체적인 그림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점, 혹은 그 그림이 너무도 이상주의적인 것이라 불가능하다는 점을 갈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그림조차 저렇게 망가져버린 지금, 미국은 어떤 ‘통제 전략’을 갖고 있는가? 최소한 이라크인들의 민주주의 의지와 수준은, 미국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태에서 말이다. 어쨌든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으니, 무식한 놈들의 무식한 짓이 가져온 이 야만적인 결과에 차마 입 벌리고 할 말이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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