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한창 만화책을 빌리러 비디오가게에 드나들던 그 시절에,나는 퇴마록을 처음 봤다. 원래 심령 쪽,그리고 추리소설 쪽으로 관심이 많은 나라서 쉽사리 손이 갔다. 국내편부터 먼저 보게 된 건 당연지사. 국내편에는 19권의 퇴마록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그들의 만남을 주로 다뤘다. 파이터인 현암과,그들의 좌장 역할을 하는 박 신부,어리지만 영악한 꼬마 준후,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승희.말그대로 우리나라 안에서의 퇴마행을 다룬 국내편은 뭐라고 할까. 좀 스케일이 부족한 듯 해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 편인 세계편으로 넘어가면 주인공들이 더욱 더 많아지고,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꼼꼼하게 메워진 스토리를 들고 등장한다. 거기에는 심연의 눈을 가진 언어계의 천재인 연희도 나오고,흡혈귀에 물려버려서 어쩔 수 없이 어둠의 피조물이 되어버린 윌리엄스 신부,그리고 흡혈귀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연구하는 이반 박사 등,여러명이 등장한다. 더군다나 그 다음 편인 혼세편에서는 국내편에서 나오던 인물들과 세계편에서 나온 인물들이 뒤섞여 훨씬 더 스케일을 크게 만든다. 더군다나 혼세편에서는 우리 나라 고대 역사에 대한 작가 나름의 지식과 해석을 명료하게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설명해놓는데,작가의 그 동안 쌓인 글빨 내공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 편인 말세편. 혼세편이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았다면 말세편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주인공들이 상대하게 된다. 말세편에서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요점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진짜 다른 나라에 번역이 된다면,개인적으로 '다빈치 코드'를 아우르는 대작이 될 거라 생각한다.

'퇴마록'이 내 기억에 남는 이유는,그리고 다른 SF 소설과 다르다고 여기는 이유는 작가가 주인공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떠나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주문과 외국주술이 판치고,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돌아오고 외국 사람들이 줄줄 나온다고 무조건 SF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이 가르쳐준건 나에게 큰 교훈을 남겨줬다. SF소설을 읽고 운다는 건 좀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나는 퇴마록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주인공들의 선택에,그리고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그 어떤 책을 읽었을 때보다 몇 곱절 더 많이 공감했던 것 같다. 거기에 말세편 완결에는 보조 인물들은 거의 다 죽고,네 명의 핵심 주인공들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마무리져 있다. 확실하게 산 사람들은 훌쩍 커버린 준후와,그를 잘 따르는 준호,아라,수아 정도. 작가님이 외전은 쓰지 않겠다고 해서 그 불투명한 마무리가 너무 눈물 나게 만들었지만,책에서 박 신부가 '이제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라는 뭉클한 독백이 그들의 미래를 어떻게 보면 암묵적으로 정해놓았으니....퇴마록은 완결이 났어도 끝난 책은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전해져 왔었다.

주인공들은 절대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때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따르는 바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 간악한 유혹,사람들을 구해주고도 그들에게 항상 쫓기고 두려움을 받아햐하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는 그것 하나만 믿고도 거칠게,하지만 마음 아프게 살아간다. 거기에는 또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베여져 있다. 어떤 난관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서로 의지한다면 설사 절대 존재인 신이나 악마의 계획도 송두리채 마꿔놓을 수 있다는 걸 작가는 주인공들의 입과,행동을 통해 절실히 외쳤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퇴마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작가는 열아홉 권의 퇴마록에서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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