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품절


밤이 깊어 집에 돌아왔다. 그 사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줌아웃이 되어 있었다. 그래, 저녁 먹으면서 첫사랑 얘기를 했구나. 첫사랑처럼 강렬하고 두렵게 빛나던 빌딩은, 이제 그 기억처럼 멀리서 안타까운 울림으로 빛나고 있다.-72쪽

'스트랜드'를 찾게 되는 것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바로 이런 비효율이 주는 우회와 카오스의 미학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산처럼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이상한 만족감에 젖게 된다. 지저분한 지성인으로 유명했던 아이리스 머독의 서재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랄까. 이곳 책의 만 분의 일도 다 읽지 못하겠지만 책이 물리적인 양과 그 존재감에 압도당한 나머지,마치 나도 이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지성 세계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언젠가 매정한 아저씨 프레드는 이곳을 싹 정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매상이 대번에 줄었고 다시 예전처럼 지저분하게 원상복귀시켜야 했다고 한다. -81~82쪽

어떤 사람들에게 삶과 예술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미지와 불확신에 몸을 내던진다. 필립 프티가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건너고 있을 때 그의 친구가 밑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조심해. 연약한 필립, 너 그 위에서 너무 연약해보여! 너무 강해보여!" 필립 프티로 인해 나는 연약하고 강인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좀더 자랑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런 삶을 좀더 강렬하게 살아내야 하는 예술가의 삶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13쪽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그림의 정적은 어떤 알 수 없는 마법에서 온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화가 베르메르 자신이다. 외계인이었을까? 그는 43세의 짧은 생을 살았고, 전에 없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다. 나머지는 거의 미스터리다. -160쪽

호퍼의 그림은 호퍼 자신의 세상을 닮아 있다. 그의 그림은 주로 미국인, 또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관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나에게 그의 그림은 고독이라기보다 고독이라 묘사되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 호퍼의 인물들은 고독한 것처럼 보이지만,그들에게서 고독과 함께 다니는 달콤쌉쌀한 멜랑콜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인물들은 고독하면서도 고독과는 무관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호퍼가 가진 역설에 의거해서 스트랜드가 이 책을 써나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퍼의 그림에서 역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트랜드의 책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는 호퍼의 역설은 떠남과 머무름에 관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떠날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머무르도록 종용한다는 것이다.
-178쪽

뒷모습도 풍경이라고 했다. 세상의 이면을 전하는 풍경. 뒷모습은 어쩌면 달과 같다. 달은 해처럼 둥글고, 해의 빛을 반사하지만 해와는 다른 것이다. 뒷모습은 앞모습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다른 이의 뒷모습은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비추기도 하지만, 또한 사람의 이면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뒷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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