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 현무문에서 태자가 변을 당하고 양의전에서 위징이 요괴를 쏘다
p.220
“현무문에서 양의전으로 향하려면 이 길목을 지날 거야. 저쪽 숲에 매복하자.”
p.258
“저쪽이다! 월화문月華門쪽으로 달아났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위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요원전』에서 ‘현무문의 쿠데타’는 현무문, 양의전, 월화문을 아우르는 지역인 산지원(山地院)과 남해지(南海地) 사이에서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쪽인 산수지각(山水地閣)근처에서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자치통감』권191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고 했다. 즉, 이건성의 거처인 동궁(東宮)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역사서마다 그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일을 그리 세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p.221
“아바마마께서는 세민이 놈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역시 우리 둘이서...”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요원전』에서 이원길은 틈만 나면 이세민을 죽이자고 이건성을 부추기지만 이건성은 반대한다. 이는 실제 역사에도 기록된 부분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부분을 옮겨 적는다.
애초에 제왕(齊王) 이원길이 태자 이건성에게 권고하여 진왕(秦王)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형님을 위하여 손수 칼을 쓰겠습니다.”
이세민이 황상을 좇아서 이원길의 집에 갔는데, 이원길이 호군 우문보(宇文寶)를 침실 안에 숨겨두고 이세민을 찌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건성은 성격이 자못 인자하고 후덕하여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의 정통성을 확보시키기 위해서는 두 형제의 단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이건성의 경우에는 종종 장점을 기술한 부분이 보인다. 어찌보면 이건성은 ‘인자하고 후덕한’ 그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p.224
“사공 배적裴寂, 좌복사 소우蕭瑀...”
좌복사 → 좌복야
『요원전』에서는 당고조 이연이 양의전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역사에는 해지(海地, 어느 해지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위 범선에서 배적, 소우, 진숙(陳叔)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연은 이세민의 상소를 공적인 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형제들간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시키려는 자리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자지간, 형제지간의 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이세민이 영악(혹은 냉철)한 것이다.
소우는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는 말을 당고조 이연이 들었을 때 즉각 이세민의 편을 든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것으로는 626년 4월, 태사령 부혁(傅弈)이 불교를 없애자고 탄원했을 때 소우가 불교를 옹호하며 서로 토론했으나 처절하게 발린 것이 있다. 이 때 대다수의 사찰과 도관이 철폐됐으나, 현무문의 정변 이후 다시 환원됐다.
p.231~232
이세민이 쏜 화살에 쓰러지는 이건성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 이세민이 좇으면서 그들을 부르니 이원길이 활을 당겨서 이세민을 쏘려는데 두 세 번이나 활이 당겨지지 않았으며, 이세민은 이건성을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부상만 당하고 다른 인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역사에는 이세민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p.241~242
울지경덕에게 목이 잘리는 이원길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지경덕이 7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도착하니 좌우에서 이원길을 쏘아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세민의 말이 놀라서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말을 타고 있던 이세민이 나뭇가지에 걸리니, 떨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원길이 갑자기 도착하여 활을 빼앗고 그를 누르는데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오면서 그를 질책하였다.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하니 울지경덕이 쫓아가서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질책한 것과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이 언뜻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죽인 것이다. 『자치통감』권 188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원길과 울지경덕이 서로간에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일화가 나온다. 이 대결에서 이원길은 울지경덕에게 완패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다.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말을 타고 삭(矟)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였는데, 울지경덕이 능력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칼날을 떼어내고 승부를 비교하자고 청하였다.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저 울지경덕은 삼가 이것을 떼어 버리겠지만 왕께서는 떼어버리지 마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고 이원길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적중시킬 수가 없었다.
진왕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삭을 빼앗는 것과 삭을 피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렵소?”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삭을 빼앗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침내 울지경덕에게 이원길의 삭을 빼앗도록 명령하였다. 이원길이 삭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뛰어나가니 속으로는 그를 찌르려고 하였는데, 울지경덕이 잠깐 사이에 그의 삭을 세 번이나 빼앗으니, 이원길은 비록 얼굴을 대하고는 탁월함을 탄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세민은 이미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은 이원길을 두 번 능욕하는 처사를 저질렀다. 평소에 이원길이 잘난 척하는 게 꼴사나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이참에 기를 꺾어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처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원길에게는 울지경덕과 이세민 둘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이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원길은, 이건성이 울지경덕을 자신의 도당으로 포섭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당고조에게 참소하여 울지경덕을 죽이려 했었다. 울지경덕은 이세민의 강력한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다.
울지경덕은 선양(善陽, 산시성 숴저우시) 출신으로 역주(易州)의 도적 우두머리 송금강(宋金剛)의 장수였으나, 이세민에게 패해 포로가 됐다. 이 때 울지경덕을 눈여겨본 이세민이 바로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右一府統軍)으로 임명했다. 이세민의 측근들은 울지경덕이 배반할 것이라 하며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세민은 신의로써 그를 믿었고, 울지경덕은 그 믿음에 화답하듯 왕세충군을 격파했다. 신의로 충만하고 무예가 출중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p.250
“잘했다, 위징!”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위징에게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건성은 이세민이 쏜 화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원전』에서 위징의 모습은 기회에 따라 주인을 바꾸는 비열하고 저열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역사에서는 다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선마(洗馬) 위징(魏徵)은 항상 태자 이건성에게 일찍이 진왕(秦王)을 제거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건성이 실패하고 나서 이세민이 위징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하였느냐?”
무리들은 이 때문에 위험스러워서 두려워하였지만 위징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대답하였다.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일찍이 저 위징의 말을 쫓았더라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화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평소에 그의 재주를 중하게 생각하였던 터라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끌어서 첨사주부로 삼았다.
자신의 친형제는 물론이고, 친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한 일가친척 500여 명을 학살한 이세민이 자신의 숨통을 조인 위징을 살린 것은 지금 봐도 미스터리하다. 『요원전』에서처럼 정말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세민의 냉혹하면서도 탁월한 정치 감각의 발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위징은 이세민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唐)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p.268
“꼬마야, 내가 일찍이 도적 패거리에 투신했을 때도 딱 너 만한 나이였으나...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감히 궁성에 잠입할 줄이야...”
이세적이 이야기하는 ‘도적 패거리’는 적양(翟讓)의 와강군(瓦崗軍)을 말한다. 와강군은 고기잡이 능수들이 주축이 된 농민군이다. 수 양제의 폭압으로 농민군의 봉기에 가담한 이세적이 지금은 그들을 ‘도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자치통감』권 186에 기록된 서세적(이세적이 당고조 이연에게서 이 씨 성을 하사받기 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호(離狐, 산둥성 허쩌시) 사람 서세적(徐世勣)은 집은 위남(衛南, 허난성 안양시 화현)에 있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으며 용기와 지략이 있었는데 적양(翟讓)에게 유세하였다.
p.275
“전하, 신이...”
“오, 위징인가.”
『서유기』10회에서 위징은 당태종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경하 용왕의 목을 베는 신묘한 인물로 묘사된다. 『요원전』에서 위징이 양의전 위에 올라간 ‘요물’을 죽이는 것은 『서유기』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p.282
“이 장안의 불교계를 보게. 섭론파 외에 북도파北道派, 남도파南道派... 종파마다 죄다 다른 소리를 하고 있어...”
‘미륵(彌勒, Maitreya, ?~?) → 무착(無着, Asaṅga, 300?~390?) →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의 기본 틀에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지론종이다. 이 지론종 성립 후 제8아리야식(第八阿梨耶識: ālaya vijñāna의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와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로 분리되었는데, 약칭으로 남도파 · 북도파라 한다. 섭론종은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무착의『섭대승론』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이다.
이렇게 종파가 나뉜 이유는 『요원전』24회와 25회에서도 다뤘듯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 때문이었다. 바로 이게 현장이 천축으로 가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