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자기 노래 제목대로 인생을 산다는데,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정말 제목대로 인생은 살아가나 보다. 내가 카테고리명을 '난중일기'로 지은 것은 앞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않아 펼쳐질 전쟁같은 삶을 살아갈 내 일상을 조금씩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아주 겉멋든 거창함으로 포장한 것이었는데, 요즘 내 삶이 진짜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 같다. 단,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게 다르지만.


   병원에 갔다온 이후로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집 근처의 산부인과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나 역시 의무감 혹은 당연함으로 같이 따라다녔는데, 아침 10시, 저녁 6시, 단 두 번 따라가는데도 체력이 방전이 되어버렸다. 일어나서 식사 준비하고 밥먹고, 병원 갔다 돌아오면 11시, 조금 있다 점심 차리고 먹고, 5시 30분쯤에 병원가고 다시 돌아오면 7시. 저녁 차리고 먹고 그러면 어느새 하루가 후딱 가버린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실종되는 느낌. "왜 사나?"하는 삶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까지 떠오르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기간동안 아내는 아침에 두 대의 주사를 맞았는데, 근육주사로 폴리몬을 배주사로 유트로핀을 맞았다. 유트로핀은 성장호르몬제로 성장기의 어린 아이들도 맞는 주사라는데, 아마도 난포를 키우는 데 필요한 성분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저녁에는 IVFM이란 근육주사를 맞았다. 잘 모르겠지만, 곧 추출할 건강한 난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주사였겠지.


   목요일(12월 12일)에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잘 컸으니까 이번 토요일(14일)에 추출을 하자고 했다. 처방전을 보니 주사가 달라졌다. 세트로타이드와 오비드렐. 세트로타이드는 조기배란억제제고 오비드렐은 난포터지는 주사란다. 세트로타이드는 13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맞고, 오비드렐은 시술 전 밤 10시에 꼭 시간 맞춰 맞아야 한다는 중요한 다짐을 받고 밤 10시에 맞았다.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제품이 전부 LG생명과학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아내가 넌지시 알려줬지만, 그냥 LG에서 나온 시약들이 아내에게 딱 맞는 제품이라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난 '추적 60분'보다는 '육아일기'를 원하니까. 이날 서울에 엄청나게 눈이 내렸다. 큰맘먹고 택시를 탔는데, 30분 거리를 2시간이 넘도록 도로에 갇혀 있었다. 두눈 부릅 뜬채 하루를 빼았겼다.


   토요일에 시술을 했다. 오전 9시까지 수술실/시술실로 오라 했는데, 주말이라 도로에 차가 없어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시술은 정시에 시작했다. 온갖 우울한 표정의, 시술실에 누워 추출을 하고 있을 누군가의 남편들과 대기실에 앉아 영혼 없이 TV를 봤다. 부인들의 이름과 남편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호명된 남편들은 번호표를 뽑고 정자 체취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구조상 체취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이 남편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그 마주침은 무언가 민망하고 안쓰러우면서 왠지모를 자괴감도 느끼게 된다. 이 대기실의 구조야말로 던적스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9시에 들어간 아내는 12시가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수술 현황을 알려주는 모니터에는 대기중, 수술중, 회복중을 알리는 아내들의 이름이 빼곡히 차있었는데, 멍했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 이름밖에 있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느껴질 찰라, 간호사 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아내분 시술이 잘 끝났는데, 배가 아프시다고 해서 진통제 맞고 누워 계세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실 거예요."라고 말을 했다. 물론 추가로 이런 말도 들었지만. "추가 수납이 있으신데 지금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음에 오실 때 하시겠어요?"


   수술이란 게 여러 번 받는다고 숙련도나 경험치가 올라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매 수술은 매번 새로운 수술이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아내는 1시 즈음에 나왔다. 아무리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임했던 시술이지만, 이러다 진짜로 마지막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경망스런 생각이 들 때 즈음이었다. 난포가 5개 추출됐다는 말을 듣고, 다음 화요일 8시 30분에 이식하겠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뼛속까지 시린 새벽바람을 뚫고 수술/시술실에 도착했고 아내는 들어갔다. 이식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으니까 조금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던 그 때, 나를 부르는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 아니요. ... 수술... 네." 간호사 선생님이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담당 선생님께서 남편분게 말씀드릴 게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짧은 순간이었는데, 정말 오만가지 망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지랄발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술실에서 나오더니 나를 부르고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망상의 지랄 지수가 최고조를 향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니 아내가 가운을 입고 앉아있었다.


   "다섯 개가 다 수정이 됐대요. 처음이지. 이식을 하려고 하는데, 수정이 정말 잘 되어서 한 이틀 더 배양시키자고 하네요. 그게 임신 확률이 더 높대요. 근데, 그럴 경우, 만에 하나 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 이식할 지, 이틀 더 배양시켜 그 때 이식할 지, 결정을 하라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서. 당신 생각은 어때요?"


   지금 이식이 문제냐. 저 대기실에서 지금 여기 수술실까지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내 안에서는 처절한 아마겟돈을 벌였는데. 아무일 없으면 됐지. 아내와 약간의 대화를 하고, 이틀 후에 이식을 받는 것으로 했다. 기왕에 마지막이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을 택했다.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짜피 그럴 운명이었으면 이식했어도 임신이 안 될테니까.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간호사 선생님의 저 말을 이야기해주니, 아내가 바로 복원을 해줬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은 안하셨어요.) 아니요. 수술(할지 미룰지요.) 네." 별 말 아니었는데. 얼마전에 다시 본 <올드보이>에서 박철웅(오달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왜 두려움을 느끼는 줄 알아? 상상력 때문이래. 그러니까 너도 상상력을 없애봐. 졸라 용감해질거야."


   아무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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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1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으시길... ^^

Tomek 2013-12-19 16:21   좋아요 0 | URL
pek0501님~ :)
오늘 잘 이식하고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