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원전』 의 번역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잡지 못한 오류들이 조금씩 보인다. 1권에 대한 글도 끝냈고 해서, 그간에 썼던 글 중 오류라 생각하는 부분들만 모아서 따로 정리를 한다. 명시한 것들이, 확실하게 틀린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라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다음에 재판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반영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올린다.
p.004
등장인물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이유는 아래 p.078 무지기 항목에서 설명.
p.005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 이연의 넷째 아들.
넷째 아들 → 셋째 아들
1권 p.247 본문과 註에서 다루었으므로 셋째 아들로 통일해야 한다.
p.022
“국원攫猨이구먼...” → 확원攫猨이구먼... (p.023, p.024, p.029, p.030, p.031, p.035, p.052, p.054 모두 수정)
확원(攫猨)이라 읽어야 한다. 확원이란 앞서 이야기한 가국을 나타내는 다른 말이다. 『포박자(抱朴子)・대속편(對俗篇)』에, “후(猴: 원숭이)는 나이가 팔백 살이 되면 원(猿: 원숭이)으로 변하고, 나이가 오백 살이 되면 확(攫: 큰 원숭이)으로 변한다”고 했다.
p.034
“평소라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음식이겠으나... 권세를 등지고 산야에서 풀을 뜯어 연명한 옛 성인 백이와 숙제의 덕을 기리기에는 좋은 기회일 게야.”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p.076
“무지기無支奇... 그 이름은 이 노인네도 알고 있소. 먼 옛날 하夏를 개국했던 성국 우왕禹王께서 치수를 하실 깨 붙잡아 귀산龜山 아래 사슬로 꽁꽁 묶어 뒀다던 수괴水怪가 아니오? 『악독경』岳讀經이라 하는 책에서 본 적이 있소이다. 장강長江, 회수淮水의 물을 지배하며 온갖 들판의 넓이와 개울의 깊이에 통달했다던가...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무지기(無支祁)는 巫支祁・无支祁・巫支祗 등으로 표기되는데, 『요원전』에서는 ‘기’자를 祁에서 奇로 바꾸었다. 『요원전』에는 차용한 캐릭터의 원래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경우가 가끔 보이는데, 그게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서유기』 47회와 99회에 나오는 일칭금(一秤金)은 『요원전』 74회부터 96회까지 등장하는 일승금(一升金)으로 글자가 바뀌었는데, 각 작품에서 칭秤과 승升이라는 단어에 맞게 이름을 해석하므로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겠다.
무지기에 대한 기록은 『고악독경(古岳讀經)』제 8권에 나오는데, 『고악독경』은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67 「이탕(李湯)」에 실려 있다.
禹理水,三至桐柏山,惊風走雷,石號木鳴,五伯擁川,天老肅兵,功不能興。禹怒,召集百靈,授命夔龍,桐柏等山君長稽首請命。禹因囚鴻蒙氏、章商氏、兜盧氏、梨婁氏,乃獲准渦水神,名無支祁。善應對言語,辨江准之淺深,原隰之遠近。形若猿猴,縮鼻高額,青軀白首,金目雪牙,頸伸百尺,力逾九象,搏擊騰踔疾奔,輕利倏忽,聞視不可久。禹授之童律不能制;授之烏木由,不能制;授之庚辰,能制。鴟脾桓胡、木魅水靈、山襖石怪,奔號聚繞,以數千載,庚辰以戟逐去。頸鎖大索,鼻穿金鈴,徒准陰龜山之足下,俾准水永安流注海也。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세 번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렀는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며 돌이 부르짖고 나무가 울었으며 오백(五伯)이 시내를 끌어안고 천로(天老)가 병사들을 모아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가 노하여 천하의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기룡에게 명하여 동백 등의 산군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명령을 청했다. 우가 홍몽씨(鴻蒙氏)・장상씨(章商氏)・두호씨(兜盧氏)・이루씨(梨婁氏)를 가뒀기 때문에, 곧 회수(准水)와 와수(渦水) 사이에서 요물을 잡았는데 이름이 무지기(無支祁)라고 했다. (이 요괴는) 말을 잘하고 장강의 흐름과 회수의 흐름 가운데의 얕고 깊음을 가려낼 줄 알며, 벌판과 습지의 가깝고 먼 것을 가릴 줄 알았다. 생긴 것은 원숭이와 같은데 코가 움츠러들었고 높은 이마에 몸빛은 푸르고 머리는 희며 금처럼 반짝이는 눈에 눈처럼 하얀 이를 가졌다. 목을 길게 빼 늘이면 그 길이가 백 자는 되는데 힘은 코끼리 아홉 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세며 동작이 매우 빨라 잠깐 사이에 번득이며 듣고 보이는 것이 오래 가지 못했다. 우가 무지기를 동률(童律)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조목유(烏木由)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경진(庚辰)에게 맡겼더니 다스릴 수 있었다. (경진이 일을 시작하자) 치비・환호・나무 도깨비・물의 정령・산의 요괴・돌 요괴들이 달려와 모여들기를 수천 년 동안이나 했는데 경진이 갈래진 창으로 쫓아냈다. (경진은 무지기의) 목에 굵은 사슬을 메고 코에는 금방울을 닳아 회수 북쪽의 구산(龜山) 기슭에서 항복시키니 회수를 좇아 영안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갔다.
모로호시 선생은 무지기의 奇를 『산해경・서산경(西山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궁기(窮奇)’라는 짐승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그 짐승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西山經」: 曰邽山。其上有獸焉,其狀如牛,蝟毛,名曰窮奇。
규산(邽山)이라는 곳에는, 그 위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그 생김새가 소와 비슷하고, 고슴도치 털로 덮여 있으며, 이름은 궁기(窮奇)라 한다.
궁기(窮奇)
「海內北經」: 窮奇狀如虎,有翼,食人從首始,所食被髮,在蜪犬北。
궁기(窮奇)는 생김새가 호랑이와 비슷하고, 날개가 있으며, 사람을 잡아먹을 때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잡아먹히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으며, 도견(蜪犬)의 북쪽에 있다.
궁기(窮奇)
p.244
“당시 천하의 판도로 말할 것 같으면 열에 아홉은 거의 당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만 고개도高開道, 서원랑徐円朗 등 아직도 당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이 남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유흑달은 하북을 거점 삼아 당에게 마지막까지 완강히 저항한 군웅 중 마지막 한 사람이었답니다.”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역사 속 인물, 고유명사이니 통자 대신 본자를 써야 한다.
p. 358
“잘 들어, 진秦 말엽에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오광吳廣, 신新 시절 거병한 여모呂母, 녹림綠林의 난을 주도한 왕림王匡・왕봉王鳳, 적미군赤眉軍을 이끈 번숭樊崇, 후한後漢 말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노張魯, 북위北魏 시절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왕림王匡 → 왕광王匡
장노張魯 → 장로張魯 (p.359 장노 수정)
p.358
“* 다들 아시겠지만, 황소는 이 이야기로부터 수백 년 뒤 당 말기를 뒤흔든 ‘황소의 난’의 주모자, 그리고 송강은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옮긴이 註)”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 북송(北宋) 말기의 도적으로 약 1년간 관군과 대치해 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항복한 인물로, 『수호전』의 송강은 바로 이 송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올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송강은 역사 속의 인물인데, 설명은 『수호전』의 송강과 섞여 있다. 송강은 북송(北宋) 시절의 도적으로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니,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이듬해 5월에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에,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송사(宋史)』에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한다(言宋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고 나와 있어 ‘양산박 108호걸’, ‘급시우’ 등은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p.407
수말당초隋末唐初 군웅할거도群雄割據圖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임자홍林子弘 → 임사홍林士弘
이자통李子通 아래 그림 밑에 심법흥(沈法興) 추가
p.408
623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 유흑달, 제갈덕위(諸葛德威)의 배반으로 사로잡힘. 이건성, 유흑달을 참수.
『자치통감』 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는 것은 이세민이 아니라 태자 이건성이다. 이건성이 유흑달 토벌에 지원한 것은, 뛰어난 무공으로 당(唐)의 기반을 굳건하게 세운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가운데, 무덕(武德) 6년 (623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배신해 생포한 후, 이건성에게 호송해갔다. 유흑달과, 함께 잡힌 유흑달의 동생 유십선(劉十善)은 유흑달의 도읍지였던 명주에서 목이 베어 죽었는데,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이건성이 유흑달의 참수를 지시했던 것으로 본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유흑달을 죽인 것으로 설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권 이후로 홍해아가 더 이상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권말 부록 부분은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되어 일부러 오류를 적었다.
이상 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