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세 편 모두 블루레이로 상영했고, 지금 구입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 중 두 편은 상영 당시에 극장에서 보고, 그 감동을 잊지 못해 DVD를 구입해서 반복 감상한 영화들이다. 이미 본 영화를, 그것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영화를,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다시 스크린에서 본 이유는, 내가 혹시 이 영화들에게 속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마음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떠나간다. 에로스가 프쉬케에게 했던 말이다. 떠나간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프쉬케는 고난을 감수했다. 나 역시 프쉬케의 절박한 심정으로 이 영화들을 다시 마주보았다. 그 절박한 영화들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Memories of Matsuko, 嫌われ松子の一生)>이다.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은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제대로 오지 않은 영화였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영화는 비비 꼬아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더니, 주인공 조엘(집 캐리)의 “두뇌 탐사”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도 이제 매너리즘에 빠지는구나 하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쨍”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티끌하나 없는, 청명한 마음에 비친 영원한 햇빛처럼.
하지만, DVD로 다시 봤을 때, 불행히도, 전반부의 혼란함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 쨍한 느낌은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미셸 공드리의 현란한 연출과 벡의 환상적인 주제가 때문일 거라는 단정을 서둘러 지으며,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8월 5일, 6년 만에 스크린에서 다시 마주한 이 영화는, 날 진심으로 펑펑 울리게 했다. 이 영화에 대한 내 태도가 변한 이유는 아마도 사랑을 "경험"해서가 아닐까. 그냥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감정, 그리고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들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헤어짐, 만남, 결혼을 경험하고, 불타올랐던 뜨거웠던 감정과, 점점 식어가는, 그리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경험을 해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몸의 반응"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니까. 제 아무리 지루하고 끔찍한 시간을 보내더라도, 결국 모든 감각이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경우처럼, 기억을 지워버려도 서로에게 끌려 다시 시작하는, 그래서 또 다시 그 지독한 열병을 앓고, 또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할지라도, 그렇게 다시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그게 사랑 아닐까?
반면, 6일에 본 나카시마 데츠야(中島哲也)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 제목은 신파로 보이고, 포스터는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영화를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로 "강렬"했다. 쉴 새 없이 들이붓는 강렬한 음악, 화려하다 못해 과장된 색감, 끝없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급작스런 화면 전개로 정말 울면서 웃게 만드는(!) 이 기막힌 영화의 출현은 정말로 굉장했었다. 그런데 DVD로 다시 봤을 때는, 그 굉장했던 느낌들이 조금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다시 확인했을 때, DVD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굉장했던" 그 느낌들마저 모두 휘발되어 버린 것을 느꼈다. 내가 굉장했다고 느꼈었던,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적 장치-스타일들은, 이미 영화에 익숙해진 내게 더 이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오히려 내러티브를 방해하는 과잉의 요소로까지 느껴지게 되었다. 감독 특유의 과잉이 사라지고 나니까, 남는 것은 정말이지 "지독한 신파 멜로 여인 잔혹극"이었다. 그저 사랑을 원했던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를 온갖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착취하는 이야기를 난 "쿨"하다며 봤던 것이다.
그 뒤에 상영한 <고백(告白)>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잉의 스타일을 쏟아내며 끔찍한 이야기를 한다. 딸을 잃은 여교사 유코(마츠 다카코)가 종업식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이 이 반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철저하게" 복수를 하는 이야기를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시청각적으로 관객들을 붙잡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나, <고백> 모두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마도 다른 감독들이 이 영화를 찍었더라면, <마츠코>는 <영자의 전성시대> 같이 한 여자의 일생을 그 사회의 알레고리로 담은 영화가 나왔을 것이고 <고백> 역시 청소년 보호법이나 이지메 같은 거대 담론들을 다룰 수 있는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이 이야기들을 철저하게 개인의 이야기로만 다루었다. 일례로 <고백>에서는 끔찍하게 이지메를 당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학생 중 한 명이 살인자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지만, 담임인 유코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짜놓은 이 끔찍한 지옥에 범인들이 걸려들기만을 바란다.
영화는 과도한 스타일로 보는 것 자체가 피곤할 지경이다. 특히 <고백>의 스타일은 지나칠 정도로 과잉이라고 생각되는데, 사람을 죽이는 장면조차 "감각적으로" 찍는 장면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 지경이었다. 마치 그는 단 한 장면이라도 관객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영화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도대체 나카시마 데츠야 감독은 왜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이 시대의 관객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까지는, 적어도 영화는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영화는 수많은 오락거리 중 하나에 불과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탄해봤자, 대중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소위 "작가주의 영화"들은 재미없는 영화, 지루한 영화, 철저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일방통행의 영화로 구분되어지기 시작했고, 고립되어 갔다. 대중 영화는 자신만의 비전은 고사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감독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그의 과잉의 스타일은 이런 까다로운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과잉이 그런 지독한 이야기들에 어울리는 것일까?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고, 그저 끔찍한 지옥도를 보여주는 이 잔인한 감독에게 신은 너무 많은 재능을 준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는 정말로 굉장하다. 하지만, 그게 올바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프쉬케는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에로스와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 볼룹투스라 지었다. 사랑(에로스)이 마음(프쉬케)안에 깃드니 쾌락(볼룹투스)이 생긴다. 영화에 대한 내 사랑은 "절박한" 쾌락이었나?
그게 아니면, 혼돈을 불안해하며 무언가로 규정 짓고 싶어하는 하나마나 한 행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