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세 편의 영화(또는 한 편의 필름과 두 편의 블루레이)를 봤다. 어떤 영화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어떤 영화는 딱 기대한 만큼의 감흥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것은 영화 자체의 힘도 있지만, 아마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세 편의 영화 모두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았는데, 그 중 한 편은 (아직)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다른 두 편은 이달에 블루레이로 출시될 예정이다.  

 

7월 8일 19시에 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사무라이 반란(上意討ち 拝領妻始末)>은 내가 기대했던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미후네 도시로와 나카다이 다쓰야가 <요짐보>와 <스바키 산주로> 이후로 다시 만나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것과, 정말 "죽여주는" 제목 때문이었다(사무라이만으로도 헐떡거리게 하는데, 게다가 반란이라니!). 딱 이 두가지 설정만으로도 엄청난 사무라이-액션 활극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나? 그런데 그 결과물은 의외였다.  

영화는, 물론 액션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운동-이미지에 집중하지 않고 봉건 시대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있다. 에도 시대. 영주의 첩인 이치는 아들을 낳은 후 성에서 쫓겨나 사사하라 가문의 큰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이치의 아들이 영주의 후계자가 되자 성에서는 생모인 이치를 다시 데려가려 하고, 사사하라 이사부로는 영주의 불합리한 처사에 분노해 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영화는 일본영화답게 시종일관 조용하게 진행한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계속 부조리한 명령이 내려온다. 사무라이의 미덕, 가문의 미덕, 체면의 미덕, 거기에 생존의 욕망!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은 더운물에 개구리를 삶아 죽이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천천히 이 부조리함을 잔인하게 드러낸다. 이 논쟁에 서 있는 가련한 인물인 이치는 매번 잔인한 질문 앞에 내던져지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 부조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에도 시대의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들처럼)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 부당함에 대항하는 것은 이치(츠가사 요코)와 그녀의 시아버지인 이사부로(미후네 도시로), 남편인 요고로(가토 고)다. 이들은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분노를 느낀다. 시스템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스템이 아니다. 부당함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 마땅히 인간의 행동이다. 이들은 시스템에 저항함으로서,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미덕들이 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인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사무라이 반란>은 패배에 관한 이야기이다. 개인이 시스템을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패배는 <매트릭스>의 한 프로그램처럼 제 할일만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을 흔들어 놓았다. 부당함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 그게 인간이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 낡은 명제를 2011년에 다시 꺼내 놓았다. 이 영화를 볼 것인지 그냥 지나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또 다시 마지막으로 <매트릭스>를 언급하자면, 빨간약을 고를 것인지 파란약을 고를 것인지 선택하는 것과 같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당신 몫이다.  

 

 

다음날, 7월 9일 13시 30분에 본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 대해 할 말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 블로그에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기도 하고(http://blog.aladin.co.kr/tomek/3553158), 또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그 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 더 반복한다면, 영화의 이야기나 캐릭터 보다는, 영화 표피 그 자체에 파고드는 김지운 감독의 특성상, 이 영화는 아마도 그의 최고작으로 남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무언가를 다루려고 하지만, 그 무언가 대신 스타일에 집중하게 되어, 영화를 보고 나면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달콤한 인생>은 바로 그 공허함을 다루기 때문에, 그의 주제의식과 스타일이 일치하는 흔치 않은 경우다.  

이 영화가 개봉한 게 2005년 4월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매체로, 그리고 본의 아니게) 한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영화를 보다 별 헛생각까지 들게 되었는데, 어쩌면 <달콤한 인생>은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이성에게 성욕을 느낀 한 게이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여자 캐릭터는 희수(신민아) 혼자만, 그것도 잠깐, 나올 뿐이고, 선우(이병헌)가 그녀에게 반응하고, 기억하는 모습도 순 페티쉬적인 모습(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는 모습/하얀 목덜미)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단이 된 선우와 강사장(김영철)과의 대립도 (둘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여자 때문에 생긴 질투 때문이 아닌가! ... 더 이상 영화가 산으로 가기 전에 다음 단락으로 빨리 넘어가야 겠다.   

 

같은날 16시에 본 (또,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인터내셔널 버전이었다. 한국 개봉판과 달리, 인터내셔널 버전은 심의에서 문제가 됐던 '조금 잔인한' 장면들이 추가가 된 반면, 기존에 있던 두 씬이 삭제가 되었다. 하나는 장경철(최민식)과 태주의 애인(김인서)이 기이한 팬션에서 벌이는 "개 같은 정사"씬이고, 다른 하나는 오과장(천호진)의 딸이 밤중에 공부한다고 나가는 씬이다. 이 두 씬은, 내가 영화를 보면서 불필요(혹은 불쾌)하다고 느꼈던 장면들이었는데, 이유는 이렇다. 전자는 오로지 장경철을 위한 장면이었다. 그는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여고생을 강간하려고 했고, 여간호사를 강간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성공할려는 차에 수현(이병헌)이 방해(?)를 하는 통에 그의 욕구는 배설되지 못하고 멈춰 있는 상태다. 김지운 감독은 그의 영화에서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캐릭터라도, 한 번쯤은 그 캐릭터를 동정하게 만드는 장면을 넣는데, 삭제된 정사씬은 그런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본다. 하지만, 관객이 장경철을 응원(?)하는 장면은 앞에도 이미 있었다. 택시 강도들과의 대결과 무례하게 반말을 내뱉는 한의사와의 맞대응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장경철의 유일한 순기능(?)이 아니었을까? 장경철을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이런 일련의 장면들이 아마도 이 영화를 모호하게 받아들이는데 일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장면의 삭제는 "악에 대한 동정"이라는 모호함을 덜어준다.  

그에 반해 후자는 아마도 김지운 감독이 이 영화에서 야심을 품었을만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오과장의 딸이 무방비 상태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 언젠가, 그 누구라도 이 끔직한 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장경철이라는 개별적 악과, 그 악에 대응하다 결국 괴물이 되어 버린 수현의 이야기가 "세상의 악"을 다루는 거대담론이 되는 순간이다. 거대담론을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러니까 영화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지루해지고 유치해지기 시작한다.   

이 두 장면이 없어지자, 영화는 장경철과 수현의 이야기에 더 집중됐고, 현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보다 장르적으로 읽혔다. 영화의 마지막, 수현의 울음/절규도 더 절절하게 다가왔고. 내가 이 영화에 그렇게 불쾌했던 까닭은, 현실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르물도 아닌 영화의 이상한 스탠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김지운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주어졌다. 겉보기에는 자만심 가득하고 허세 작렬하는 이미지였던데 반해, 그 속은 오히려 너무나도 사려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좋게 말하면 사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야기에 중심이 없다는 것?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영화를 닮았나!  

 

그렇게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그렇게 또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게 내가 시간을 쏟아가며 영화를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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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11-07-19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뜸하신 것 같더니 다시 서재 활동 하시는군요. 저는 거의 안하고 있습니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는 생각보다는 좋더군요. 왜 그런지에 대해선 나중에 정리해 봐야 겠습니다. 한가지 여쭤볼게요. 최근 시드니 루멧 감독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생겼는데요, 그의 옛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Tomek 2011-07-19 09: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어서 한동안 서재를 잠시 접고 있었거든요. 그냥 조용히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끼적이고 있습니다. <악마를 보았다>보면서 남재홍님 소설 많이 생각 났어요. 지존파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서 그랬나? 정리글 기대하겠습니다. :D
시드리 루멧 작품은 DVD아니면, KOFA나 시네마데크 프로그램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별로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