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CinDi) 영화제 (8.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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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분미 -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제 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개막작인 <엉클 분미>가 상영되기 전, 감독인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겨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대로 <엉클 분미>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화자를 바꿔가며 영화 내내 다시 시작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분미 아저씨는 신장 질환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분미 아저씨를 따라 처제인 젠 아줌마와 통이 시골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통, 젠 아줌마 그리고 분미 아저씨는 오래전에 사별한 후아이의 유령과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사라진 아들 분쏭을 만납니다. 분쏭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 원숭이가 되어 있습니다. 후아이의 유령이 분미 아저씨를 돌보기 시작하고, 분미 아저씨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정글 속의 동굴에 갑니다. 분미 아저씨는 그 동굴에서 자신의 전생인 미래(!)를 봅니다.
비유를 비유로써 허락한다면, <엉클 분미>는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팀 버튼의 감수성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이들 두 거장의 아바타란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껴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처음 맞이하는 저녁식사에서, 아피차퐁 감독은 초대받지 않은 두 존재, (후아이의) 유령과 (아들인) 원숭이 괴물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라오스 출신의 불법체류자인 자이까지 이 자리에 불러들입니다. 인간과, 유령과, 괴물(혹은 동물)까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그의 따스한 시선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왜 우리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으면서, 그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반성하는 생각도 들곤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깜짝 놀란 것은, 이 이야기가 분미 아저씨의 기억이 아니라, 통이 꿈을 꾸며(혹은 애도하며) 돌아가신 분미 아저씨를 추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분미 아저씨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습니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끼어드는 공주와 시종과 메기(혹은 물)의 이야기도 그렇고, 분미 아저씨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길게 진행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의 죽음조차도 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아팟치퐁 감독의 따스함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물론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분미 아저씨의 죽음 이후는 아무리 서사를 만들어보려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제 입장을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뒷부분은 다른 존재가 된 분미 아저씨의 시선(혹은 미래를 기억하는 죽음 이후)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찌됐건, 우리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를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 영화에서 내재적인 의미를 뽑아내어 평을 할 것이고요. 저는 전에 아피차퐁 감독의 <세계의 욕망>을 예로 들면서, 이 감독이 새로운 거장인지 혹은 사기꾼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엉클 분미>를 본 이후로 제가 생각하는 아피차퐁 감독은, 거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기꾼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세상에는 (비평가들의) 설명이 필요한 영화가 있고, (관객들 스스로가) 온전히 경험해야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엉클 분미>는 명백히 후자의 영화입니다. 사기꾼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만큼은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