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 The Bad Sleep We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悪い奴ほどよく眠る)>는 악(惡)과 죄의식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인간으로서 발동하는 죄의식은 그 악함에 따라 어떻게 얼마나 작동하는지 구로사와 감독은 보여줍니다.  

영화의 시작은 정부 주택공사의 부회장 이와부치(모리 마사유키)의 딸 요시코(카가와 쿄코)와 그의 비서 니시 코이치(미후네 도시로)의 결혼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축하의 자리에 갑작스레 신청사 뇌물 수수 건으로 후루야가 투신자살을 했던 건물 모양의 케이크가 도착하자,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이와부치, 모리야마(시무라 다카시), 시라이(니시무라 코우)는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알고보니 니시는 후루야의 숨겨진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호적을 교환하고 원수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니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옥죄기 시작하지만, 모리야마가 니시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사건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명백히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프를 따왔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는 니시는 햄릿이고, 탐욕수런 이와부치는 클로디어스며, 이와부치의 아들 타츠오와 딸이자 니시의 부인인 요시코는 레어티즈와 오필리아의 현현입니다. 니시와 호적을 바꾼 친구 이타쿠라는 호레이쇼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를 <햄릿>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인간의 악(惡)한 기질을 다루었습니다. 인간의 악은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제도라는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 바로미터를 죄의식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와부치, 모리야마, 시라이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미루면서 그들은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편안함이 죄의식과 맞부딪힌 순간,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염치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염치는 직급이 낮을수록, 그러니까 시스템의 상층부에 있는 거대한 악(惡)에서 멀어질수록 느낄 수 있습니다. 와다와 시라이는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이들은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을 자행합니다. 특히 영화에서 이와부치로 대표되는 악(惡)은 자신의 피붙이마저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악을 응징하는 니시는 선(善)한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니시 또한 복수를 위해서 이와부치의 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원수와 같이 지내면서, 자신의 복수심이 나약해지는 것을 깨닫고 더 큰 증오로 자신을 단련합니다. 그가 행하는 복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편법을 통해 정의를 행하는 주인공들을 그렸습니다. <요짐보>처럼 기회주의적인 주인공의 모습이 그렇고, <붉은 수염>조차도, 병원의 경영을 위해 때로는 관청 직원의 약점을 이용하기도하고, 부자에게는 엄청난 약값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똘레랑스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미 이 세계는 지독히 나빠져 있고, 나쁘면 나쁜 만큼 그 나쁨을 이용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쁜 놈 대 나쁜 놈의 이야기. 그래서일까요? 구로사와 감독은 니시를 정말 갑작스럽게 퇴장시켜 버립니다. 정말 그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영화의 마지막, 자식은 아버지를 저주하며 떠나고, 아버지는 자식을 붙잡는 대신 울리는 전화기를 듭니다.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그동안 신경 쓰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가 악(惡)의 실체라 생각했던 이와부치는 결국 악(惡)이라는 거대 시스템의 한 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 ‘나쁜 놈’인줄 압니다. 그리고 누가 숙면을 취할 것인지 압니다. 그리고 암전되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글씨. “悪い奴ほどよく眠る(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구로사와 감독은 누가 나쁜지, 무엇이 나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는 바로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덧붙임 

역시 만만찮은 주제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특히 화면이 '우수수 쏟아지는 듯한' 역동적인 미장센은 볼수록 감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결말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대부 1, 2>편에서 ‘거의 인용 수준으로’ 활용했습니다. 결혼식 장면은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 소개와 이야기의 배경을 영화적인 방법으로 친절히 설명해줍니다. <대부 1편>도 그랬지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을 지켰지만, 결국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홀로 남은 권력자의 모습에선 <대부 2편>의 결말부가 그대로 오버랩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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