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유명한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던가, 아니면 모티프만을 가져와서 감독이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던가.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원작의 관점으로도, 독립적인 영화로 보더라도 선뜻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과 강우석 감독의 작품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작품입니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윤태호 작가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골에 내려가는 류해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이들 부자가 7년간이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는지, 이장과 마을 사람들은 왜 류목형의 시신을 그렇게 빨리 치우고 싶어 하는지, 류해국과 박민욱 검사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류해국이 도착한 그 마을의 이상한 기운을 느낄 뿐입니다. 윤태호 작가는 에둘러 설명을 하지 않고 곧바로 이야기를 향해 돌진합니다. 모호함과 불길함에 둘러싸인 인물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실체를 지니게 되고, 결국 이야기는 가장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서 대한민국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담론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윤태호 작가가 미스터리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이 살아있기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강우석 감독은 미스터리를 거세했습니다. 그는 이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영화 초반, 박민욱 검사(유준상)의 말을 빌려 영화 제목의 뜻마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책이야 독자 자신의 호흡에 맞추어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자리에서 한 번에 감상해야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화나는 것은 강우석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단순히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끼』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독자들이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매 회마다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럼으로써 텍스트는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은 '사건→설명→사건→설명'의 순으로 이야기를 연결해, 관객들은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만하면 됩니다. <이끼>는 관객이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캐릭터 역시 아쉽습니다. 굳이 원작과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은 모두 텅 비어있습니다. 유해국(박해일)이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집착하는지,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지 전 도통 모르겠습니다. 유목형(허준호)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장(타락천사)처럼 보이고,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 김덕천(유해진)의 폭주는 뜬금없이 보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원작과 실제 배우들의 이미지에 기대어 이 캐릭터들을 그려냈습니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면, <이끼>의 캐릭터들은 영화 안에서는 도저히 이해불가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원작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모두 담으려는 강우석 감독의 야심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상업영화로선 재앙인 3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이지만,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저 정신없이 허겁지겁 진행될 뿐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이끼』를 <공공의 적 2-1>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장(정재영)이라는 거대한 악(惡)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정의(正義)의 검찰 박민욱 검사와의 한 판 대결! 이건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원작과 비교하면 박민욱 검사의 비중이 굉장히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필요 이상으로 검찰청 직원들이 일하는 장면과 회의하는 장면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압권은 이장과의 만남이지요. 원작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강우석 감독은 이 장면을 참으로 오그라들게 찍었습니다. 주인공 유해국이 한 일은 사건의 전말을 박민욱 검사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가장 멋있게 극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박민욱 검사입니다. 영화가 6월에서 7월로 개봉한 이유가, 월드컵 때문이 아니라 '떡검파문'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괜스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공공의 적 2> 강철중 검사

<공공의 적 2-1> (혹은 <이끼>) 박민욱 검사

 

원작에서 '이끼'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축축하고 습기 찬 미끌미끌한 것이 손에 들러붙는 듯한, 그래서 불쾌한'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만화의 분위기도 이런 것들이 주인공 류해국에게 '들러붙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이끼>는 너무도 매끈합니다. <이끼>는 원작에 대한 오독이자 관객에 대한 모독입니다.  

 

 

*덧붙임:  

1.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화 자체는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한반도>도 그랬습니다.  

2.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명지(유선)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초반부터 그녀의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그에 반해 다른 캐릭터들은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전석만이 유해국을 뒤쫓는 장면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가 떠올라 혼자 박장대소했던 장면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고 느릿느릿 걷는 김상호 씨의 모습은 제이슨의 재림이었습니다. +,.+

4. 원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영화에서는 너무 허겁지겁 묘사했습니다. 과감한 각색이 아쉬운 장면입니다. 원작의 팬이라면 이런 장면이 너무 많다는 점이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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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끼moss, 2010 _비평 (심각한 스포일러 경고)
    from 예촌의 영화영상연예 블로그 II 2010-07-16 19:47 
    (심각한 스포일러 경고, 더불어 쓰지 않으면 평론을 제대로 완결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스릴러물임에도, 스포일러 유출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작 웹툰 자체가 이미 거대한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스포일러성이 강한 몇몇 문장은 흐린 회색 처리(나중에 복구 예정) 하였다. 영화 독특하고 전율적인 스릴러, 그러나 다소 이끼가 낀 감독 강우석은 다시 한번, 한국 영화의 여전한 주류 트렌디 요소인 '비주얼' 보다는 '내러티브',..
 
 
잉크냄새 2010-07-1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장역에는 변희봉 선생이 제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Tomek 2010-07-16 16:19   좋아요 0 | URL
아마 그랬으면 더 탄탄한 구조의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 같아요. 자신만의 비전이 없다면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