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유독 사람 얼굴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특히 여배우들의 경우는 거의 최악입니다. 제 눈에는 다들 비슷하게 보여서 영화를 보다가 종종 사람을 놓쳐 이야기를 엉뚱하게 이해하곤 합니다. 거의 안면인식장애 수준이죠. 그래서 사람을 기억할 때는 어떤 특별한 분위기나 특징들로 인식을 하곤 합니다. 생김새는 다르더라도 그 사람의 특징을 구분하는 분위기는 개인마다 다르니까요. 곽지민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배우(의 연기)가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테마가 지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얼 씨와 한여름 씨가 워낙에 강렬한 연기를 했기 때문에 묻힌 느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곽지민 씨는 이 영화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볼 때면, 영화에 이상한 긴장감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 이 영화에 드리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두 번째로 그녀를 본 것은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에서였습니다. 황제슈퍼 사장님의 딸로 등장한 최비단.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춤바람에 빠진, 사랑에 굶주린 문제아. 드라마 초반, 황메리(이하나)와 강대구(지현우)의 포복절도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와중에서도 최비단이 등장하면 드라마는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코미디로 흐르던 드라마가 갑자기 자신의 장르를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 많지 않은 출연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등장하는 순간, 드라마를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비중이 원래 계획보다 더 컸었더라면, 아마도 <메리대구 공방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이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제가 과장해서 쓴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리즈 <다세포 소녀>를 보고 그런 생각을 철회했습니다. 그녀는 분명 작품을 장악하는 배우입니다.
<다세포 소녀> 시리즈에서 그녀는 외눈박이의 동생인 두눈박이 역을 맡았습니다. 두눈박이는 겉모습은 여자지만, 남자입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면 성전환수술을 받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무쓸모 고등학교의 초거대재벌 F4의 멤버인 명진(윤성훈)은 사랑을 느낍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애써 무시하려하지만, 두눈박이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B급 달궁의 원작에서 차용한 명진과 두눈박이의 이야기는 이재용 감독의 영화에서도 쓰였습니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인물들의 캐리커처를 다룰 뿐, 깊게 들어가지 않습니다. 원작은 순정변태명랑만화이고, 영화 역시 그 분위기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김주호 감독이 초반에 연출한 에피소드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터치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두눈박이, 그러니까 곽지민 씨가 등장하자마자 드라마는 갑자기 진지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대책 없던 원작이 갑자기 성과 계급을 다루는 진지한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곽지민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큽니다. 그녀는 두눈박이라는 인물을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두눈박이가 형 외눈박이에게 하는 말을 원작과 비교해보면 다가오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눈박이의 힘겨운 삶을 육화해서 보여줍니다. 그녀의 울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과 그와는 반대로 야무지게 앙다문 입은 지금까지 한눈팔며 드라마를 보던 저를 반듯하게 앉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두눈박이의 모습을 보면, 두눈박이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 모든 것에 냉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숨기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명진의 모습에 설렘을 느끼기도, 사랑을 느끼기도,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두눈박이의 입체성은 온전히 곽지민이라는 배우의 연기로 표현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아직은 가능성에 머물고 있는 배우지만, 저는 이 배우가 더 크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곽지민 씨는 배우라는 스케치북에 자신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완성해나갈 스케치북이 같은 그림으로 메워질지 아니면 다양한 그림으로 메워질지는 그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배우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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