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패러독스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4
이토 준지 글 그림 / 시공사(만화)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토 준지의 신작(이라기보다는 시공사에서 드디어 발간한) 『블랙 패러독스』는 연작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6편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기이한 역설로 가득 차있다. 내용은 이토 준지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박하게 시작한다.  

자살 사이트 "블랙 패러독스"에서 만난 네 명이 자살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들은 각기 사연이 있는데, 타블로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후,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편안해지고 싶어서 자살을 하려 한다. 오른쪽 얼굴에 끔찍한 상처 자국이 있는 바랏치는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죽어버려"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삶의 의욕을 잃어 자살을 택했다. 로봇 공학을 전공하는 피탄은 자신을 모델로 로봇(?!!)을 개발했으나, 자신보다 더 자신다운 로봇을 보고 자신이 사라지기를 택했다. 그리고 마르소는 현실세계에 닥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을 하려 한다. 이들과 함께 자살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마르소는 지나가는 옆 차에 타블로, 피탄, 바랏치가 있는 것을 본다. 저들은 누구일까? 저들이 진짜라면, 마르소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도플갱어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이제부터 원본과 가짜의 (끔찍한) 수수께끼가 벌어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 「집단 자살」은 여느 괴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다. 그런데 이 평범한 소재가 자기 증식을 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돼버린다. 죽음을 갈망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문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또 다른 자아(혹은 상처)를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받아들일 때 열리기 시작한다. 내부의 공포와 상처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 그것들을 스스로 받아들여 비로소 하나가 될 때 열리는 이 무시무시한 저승의 문!   

그러나 그들은 평안한 영면을 누리지 못한다. 이들이 저승에서 발견해오는 신비한 광물 패러드나이트 때문이다. 이 광물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담겨 있는 신비한 돌이다. 처음에는 이 돌을 보석으로 사용하려 하지만, 이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는 것을 깨닫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하기 시작한다. 패러드나이트는 대체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블랙 패러독스"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 네 명은 "블랙 패러독스"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패러드나이트를 채굴한다. 자살을 꿈꾸었던 자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활약하는 모습이라니!  

패러드나이트라는 광물 또한 이채롭다. 패러드나이트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있는 신비한 돌이다. 패러드나이트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으로 보인다. 이토 준지가 그리는 이 끔찍한 미래는 작가 개인의 망상이 아니라, 작금의 현재를 그리는 것 같아 더 무섭게 느껴진다.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영혼을 담보로 인류의 미래를 맡기는 것은 이 얼마나 역설(逆說)적인가!  

이전의 작품들보다 끔찍함과 역겨움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이토 준지는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말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역설들로 가득 찬 이토 준지의 세계는 세기말을 지나 더 광대무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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