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랜드 엠파이어 - Inland Emp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는 결국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실험영화처럼 내러티브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하더라도, 이미지와 사운드의 나열만으로 영화를 꾸민다 하더라도, 잘 짜인 단선적인 이야기의 편집 순서를 엉망으로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관객은 그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한 번에 감상해야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감상하는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작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불친절한 이야기의 잉여 부분을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넣어 관객들이 스스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그 잉여 자체가 내러티브의 한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얇게 펼쳐진 교집합과 여집합의 이야기였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꾹꾹 눌러 담은 다층으로 중첩되는 이야기입니다.

<인랜드 엠파이어>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데이빗 린치는 서로 상반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화면은 레코드가 플레이되는 장면인데, 소리는 라디오 방송의 DJ 멘트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연속되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흘러나옵니다. 폴란드어로 진행되는 창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호텔방에서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한 여자, 그리고 토끼들이 벌이는 시트콤, 입구에 들어가고 싶은 폴란드어를 하는 '악령'의 이야기들이 모두 나온 후에야 이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인 여배우 니키(로라 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키는 <슬픈 내일의 환희>라는 영화에 출연합니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슬픈 내일의 환희>는 폴란드 영화 <47>의 리메이크인데, 원작은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주연배우들이 살해당해서 공개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니키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속의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 섞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다분히 평면적인 내러티브를 취했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3차원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니키/수잔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면 해결하지 못하는 잉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이야기와 상관없는 부분으로 여겨지게 되어 영화 자체가 (의미 없는 쇼트들의 연속으로)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니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앞부분의 잉여들을 스스로 덧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구조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앞뒤로 짜 맞추는 게 아니라 앞뒤 위아래로 짜 맞춰야 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주연배우를 중심으로 한 역할 바꾸기 놀이였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이 역할 바꾸기 놀이에 (존재하지 않는) 원본과 리메이크의 관계까지 탐색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평면성이 아닌 이야기의 입체성. 데이빗 린치는 (보이는) 이미지로서의 3-D가 아닌, (이야기) 구조로서의 3-D영화를 만든 셈입니다.

물론 굳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볼 필요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 린치는 아무 생각(혹은 비판)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다른 이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이의 인생을 단지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화가 진행된 지 140분이 지나서 영화 속 영화의 수잔(로라 던)이 하는 말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내가 일어나자마자 보게 되는 건 어제 있었던 일이라는 거죠. 꼭 내일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이란 건 스쳐 지나가죠. 아들이 죽고 나서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내 주변의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나와 아무 상관없는 듯 지냈어요. 그냥 바라만 보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이... 영화가 끝나 불이 켜지기 전까지 말이죠. 난 멍하니 앉아 의아해 하는 거예요. 어쩌다 이렇게 됐지?"

데이빗 린치가 일반적인 극영화의 문법을 벗어나 거의 실험영화에 가깝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디지털 비디오(DV) 때문입니다. 그는 디지털 비디오를 접하고 나서 "다시는 필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름은 너무나 많은 인원이 필요하고 물리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이런 제약이 없습니다. 데이빗은 매일 시나리오를 써가며, 소수의 인원으로 퀼트를 완성해 나가듯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가면서.

그가 만든 <인랜드 엠파이어>는 분명 새로운 형식의 영화입니다. 너무나 한심한 단선적인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은 확실히 인상적입니다. 데이빗 린치는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라는 최신의 장비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21세기의 영화는 <아바타>가 아니라, 이미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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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요? 솔직히 전 아바타 별로였답니다.
데이빗 린치가 작품성은 앞서 간다고 보여집니다.
좀 끌리긴 하네요.^^

Tomek 2010-06-29 08:39   좋아요 0 | URL
제임스 카메론이 대중에게 보이기위한 영화를 만든다면, 데이빗 린치는 대중이 따라오길 바라는 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호불호가 너무나 확실히 갈리긴 하지만, 그 꿈같은 이미지와 사운드는 정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고유한 문체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