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는 순간, 떠나고 싶게 했던 책을 추천해 주세요!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내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지역은 대부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미국에 가게 된다면 이상한 사람들과 악령들로 넘쳐나는 마을 트윈 픽스(드라마 <트윈 픽스>)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사람들이 가득한 스프링필드(<심슨 가족>이 사는 바로 그 마을)를 꼭 한 번 들러보고 싶고, 일본에 간다면 소용돌이로 가득 찬 쿠로우즈 마을(이토 준지 『소용돌이』)에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지만, 차라리 아틀란티스 제국이나 버뮤다 삼각지대로 가는 게 훨씬 더 실현가능성이 큰 것 같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있기는 하다. 파리의 퐁네프다리랄지(레오스 카락스 <퐁네프의 연인들>), 홍콩 중경 거리에 있는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왕가위 <중경삼림>) 같은 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지만, 지금은 영화에서 느꼈던 아우라는 모두 사라지고 생경한 모습만이 남아 있다. 이 잔인한 예술가들은 단순한 배경에서도 정수라 불리는 것들을 다 뽑아내고 껍데기만 남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있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감정을 이입하게 해서 바라보게 한 후, 일상은 사라지고 그 특별했던 느낌만이 남는 경험.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룬 공간은 함부로 찾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작품을 통해 쌓아온 나(와 작가)의 감정을 부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꼭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읽고, 그 배경이 된 곳을 가 보았더니 진짜로 그와 비슷한 감흥을 느꼈던 일이 있었으니까. 바로 신경숙 작가가 「깊은 숨을 쉴 때마다」에서 묘사한 제주도, 성산포가 그렇다.  

이 책을 읽었던 때는, 군대 시절, 아마 1999년 가을 혹은 겨울이라고 생각한다. 군대, 특히 소대에 있는 책장은 정말이지 별 희귀한 책들이 모여 있기 마련인데, 90% 이상은 쓰레기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가 이현세 작가의 『까치병장』과 같은 정훈만화였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 빈약한 책장 안에 보석 같은 작품이 있었으니,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과 신경숙 작가의 「깊은 숨을 쉴 때마다」가 그랬다. 특히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80여 페이지에 불과한 이 단편은 이상하게도 읽는 내내 울컥하는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제대할 때 무례하게도 이 두 권을 몰래 가져오는 범죄를 저질렀다. 미안하다, 전우들이여. 대신 그대들의 뜨거운 청춘을 식혀줄 도미시마 다께오의 불후의 명작 『여인추억』 시리즈를 대신 서가에 꽂아놓았으니 그렇게 불만은 없었으리라 본다.  

이 책을 들고 제주도에 간 것은 제대 후 그해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5년간의 지독하고도 일방적인 짝사랑을 해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닌 집착임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그 때,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그 때 생각으로는 멋진 결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다. S야, 네가 끝까지 날 상처 입히지 않게 배려한 것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끔은 네가 조금 일찍 내게 야멸치게 굴었다면 너에 대한 내 집착이 조금은 일찍 사그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해. 뭐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신경숙 작가의 자전 소설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소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처음은 제주 공항에서 시작한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는 성수기가 다 지난 초가을에 이곳 제주도에 왔다. 뚜렷한 목적은 없고, 추석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가족은 굴레, 희생, 사랑, 증오가 뒤섞인 존재들이다. 잠시 가족을 피하기 위해 온 이곳 제주도에서, 그녀는 가족은 물론이고 지금껏 흘려보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그녀가 먼저 간 곳은 협재다. 원래는 함덕에 가려 했으나, 택시 운전사의 만류로 협재에 간다. 그리고 그녀는 협재의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젓는다. 협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토록 고운 모래를 본 적이 없고, 바닷물은 남태평양의 보석 빛을 듬뿍 머금었다. 신경숙 작가도 그 풍경에 흠뻑 취했음에 틀림없다. “얼마나 상쾌했던지 멀리 해안식당에서 내놓은 흰 비치의자 등에 쓰여 있는 카스라는 맥주 이름까지 친구 이름 같았다.” 난 아직까지 풍경에 관한 이만한 상찬을 읽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녀가 성산에 머무는 이유는 그곳에 여자가 안전히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그 우연이 이끌어준 성산에서 그녀는 우연히 두 여자를 만난다. 한 명은 그녀와 같은 호텔에 머무는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호텔 맞은편의 집에 사는 말라깽이 소녀이다. 호텔에 투숙한 여인은 쌍둥이 동생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고, 말라깽이 소녀는 신장병으로 두 달에 한 번씩 피를 간다. 이들은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 나 역시 이런 우연을 바라며 성산에 갔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린 것은 그런 낭만적인 우연이 아닌, 쓸쓸한 적막뿐이었다. 봄과 여름의 성산은 활기차고, 가을의 성산은 고즈넉하지만, 겨울의 성산은 쓸쓸했다. 차가운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우중충함.  

소설의 그녀는 성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목초지와 군인들의 초소, 주민들만 이용하는 일출봉의 뒷길과 성산 초등학교, 호텔 뒤편의 당근 밭과 말라깽이 소녀의 집, 그리고 유도화가 핀 제성장과 피아노 교습소까지. 그곳은 저자가 묘사한 그대로 있었다. 감히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저자의 묘사는 마치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곳을 그대로 답사해 본 셈이다. 솔직히, 난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바이올렛』을 읽은 이후, 그 지독한 심리묘사에 지쳐 감히 다른 소설을 읽지 못한다. 마치 『식스티 나인』으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시작한 독자처럼. 하지만 그 지독했던 『바이올렛』에서도 내 마음을 흔든 부분은 세종문화회관 뒷길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신경숙 작가는 공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그 공간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서 위로 받고 있었다.  

“내가 잊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가끔 사람의 일이 물길같이 느껴진다. 산꼭대기에서 같이 흘러내려 오지만 굽이굽이마다의 샛길에서 헤어지고, 한번 헤어져 흐르기 시작하면, 다시 만나기는 어려운 곳으로, 서로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는 물길.” 소설의 그녀가 제주도 성산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해 보인다. 물길이 모여 흐르기 시작하면, 종국에 도착하는 곳은 바다다. 그녀는 일출봉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물길은 결국 이곳 바다에서 만난다. 피하고 상처 입었던 가족 간의 관계는 이곳 성산에서 봉합된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바다, 속죄와 관용의 바다. 혹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바다.  

그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쓴다. 깊은 숨을 한 번 머금고. 그녀의 깊은 숨은 생에 대한 의지다.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은 치유 받지는 못했지만,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살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 용기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녀는 오늘도 마음을 다잡고, 깊은 숨을 쉬며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치기 어렸던 기억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이 내 삶의 한 부분임을 기꺼이 인정하며, 힘들 때 마다 깊은 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고 살아갈 것이다. 부정하지 말고, 그 자체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이게 신경숙 작가가, 성산의 겨울 바다가 내게, 그해 겨울에 들려준 이야기였고, 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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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2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이벤트 잊고 있었네요.
이책 하도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안나는데
배경이 제주도 성산이었군요.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이 있듯이
이것에 가장 충실한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저도 만일 소설을 쓴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구요.흐흐

Seong 2010-06-29 14:04   좋아요 0 | URL
stella09 님의 소설을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