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이 더 잘 잔다 - A Good Night Sleep for the Ba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권영철 감독의 <나쁜놈이 더 잘잔다>에는 진짜 나쁜 놈들만 나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이 심정적으로 기댈만한 인물들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안타까움이나 동정 같은 감상은 이 영화에 개입 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그린 세상은 윤리가 개입할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니까요. 영화는 평범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텅 비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인간이 만들어낸 윤리의 잣대를 넘어선 초월성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권영철 감독은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에 대해 질문합니다.  

영화는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돈가방을 챙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플래시백. 감옥에 간 아버지의 빚을 떠안은 윤성(김흥수)은 어떻게든 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뜰 생각을 합니다. 윤성의 동생 혜경(조안)은 연예계에 데뷔할 요령으로 학교 일진들에게 계속 접근합니다. 윤성의 친구 종길(오태경)은 아마추어 포르노에 출연하며 근근이 해결사 노릇도 하는 양아치입니다. 그리고 종길의 친구 영조(서장원)는 연예 기획자를 사칭하며 멋모르는 여학생들에게 접근합니다. 그는 여자라면 엄마뻘부터 어린 동생뻘까지 가리지 않고 잡니다. 이들은 언제나 한탕을 꿈꾸며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성은 도박 사기로 갚아야 할 빚을 모두 날리자 종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윤성과 종길과 영조는 포르노 영화감독이자 장물애비인 이 감독에게 총을 구하고, 이들은 윤성이 사기를 당한 하우스를 털고 내친김에 시골 신협까지 텁니다. 각자 돈을 나눈 뒤, 윤성은 빚을 갚습니다. 그리고 은행 강도 사건 수사도 흐지부지 되어 모든 것이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윤성의 강도 행각이 들통 나면서, 혜경이 영조를 만나게 되면서 사건은 꼬여가기 시작합니다.   

 

오프닝을 제외한 도입부에서, 윤성은 그저 평범한 20대 청년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부채를 떠안고, 사채업자들의 협박 전화를 견뎌가며 동생들을 먹이며 살아갑니다. 취객을 상대로 한 강도짓이나, 포르노 출연과 같은 유혹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는 거부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이죠. 반면, 윤성과 종길은 영화에 등장할 때부터 나쁜 놈으로 나옵니다. 이들에게 윤리는 힘과 돈입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모태악인은 아니었을 겁니다. 세상이 그들을 조금씩 선을 넘게 했을 것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모를 뿐입니다. 

이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이 감독, 그리고 이 감독 위에 있는 영화 제작자(기주봉 씨의 특별 출연!)입니다. 이들은 어른으로써 조금의 주저함이나 양심도 없이 세 명, 아니 네 명의 젊은이들을 감자탕 등뼈 빨아대듯이 쪽쪽 빨아댑니다. 윤성 또한 아버지의 빛을 떠안은 경우고, 그런 그를 사기 치는 인물들은 모두 어른들입니다. 그가 정상적인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에게 나쁜 짓을 강요하고, 그는 점점 나빠집니다. 그는 자기는 망가지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만은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들도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쁜놈이 더 잘잔다>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쁜 일 밖에 남지 않아 결국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자멸극입니다. 

  

권영철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은 나쁜 놈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우린 이런 세상에 이렇게 삽니다. 뛰어난 영어 실력, 전문가 뺨치는 사진술, 월등한 체력, 기성세대들이 전문가라 칭하는 능력을 지금의 젊은이들은 (웬만큼)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구직난이라는 이유로) 이 세상에 편입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들은 이 뛰어난 인재들을 통솔하기 위해 모두들 늑대로 만들어 서로 싸우게 하고 상처 입힌 다음에야 아주 조금 썩은 고기를 생색내어 나누어 줍니다. 자기화 시키는 것이죠. 미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미쳐야 하듯이, 나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나빠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야죠. 이미 오래전에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가치는 돈과 힘이라는 절대 권력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나쁜 놈은, 바로 우리가 살고, 우리가 만든 이 세상입니다. 전체로서의 세상은 이렇게 사회의 끄트머리에 기대어 살고 있는 이런 후줄근한 인생들 몇 명 없어졌다고 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체로서의 나는 오늘 밤에도 내일 밤에도 어제와 같은 숙면을 취할 것입니다.  

  

 

*덧붙임:  

1. 영화의 착착 들러붙는 대사와 흥미로운 상황 설정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 할 것도 없고요. 게다가 총 한 자루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연출도 정말 뛰어났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초반에 쓰인 관습적인 음악이 좀 아쉽습니다.  

2. 가편집본이 3시간이 넘는다고 합니다. 감독판을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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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3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움추리고(?) 잔다는 말과 대립되는 제목일 수 있겠군요.
선과 악의 차이.
나쁜 놈을 양산하는 것은 결국 사회겠지요.
정의되지 않은 사회,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이용당하느냐 이용하느냐의 차이에 선과 악이 나누어지면 결국 이용당하는 입장에서는 험악하고 살아가기 고통스러운 사회가 되겠지요.
사람들이 만나서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는 유토피아같은 사회.
과연 가능할까요?

Seong 2010-06-24 09:05   좋아요 0 | URL
모두가 평등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서로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요즘들어 발생하는 강력범죄들을 보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선을 그어 지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생각이죠. 저도 나이가 들어가나봐요...

pjy 2010-06-2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워들은 말 있는데 느낌상 비슷한듯..
부패를 근절할 수 없다면 좀 더 부패의 기회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이래서 점점 다 나쁜 놈이 되는거겠죠ㅡㅡ;

Seong 2010-06-24 09:07   좋아요 0 | URL
결국 나쁜놈들만 남게 되면, 그 안에서 또 좋은놈과 나쁜놈이 갈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윤리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게 아닐런지...
:)

Mephistopheles 2010-06-2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제목 심하게 공감합니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잔다..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Seong 2010-06-24 15:4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윤리와 도덕, 법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나쁜 놈들은 저런 것 없이도 잘 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