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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ㅣ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꾼(절대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스티븐 킹의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때문은 아니더라도, 장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리처드 매드슨은 언젠가는 꼭 한 번 겪어야할 고전의 반열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스스로 전설이 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2010년의 시선으로 읽는 것은 솔직히 아주 맥 빠지는 일이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매체를 달리한 영화와 음악에서까지 원작의 영혼을 강탈한 수많은 아류들을 섭렵한 후에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말을 다 알고 보는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지루한 법이다. 하지만, 그런 지루함을 감수하고 원전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다른 아류에는 없는 태초의 아이디어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와 전설로만 존재했던 흡혈귀들의 이야기를 서로 한데 섞어 현실적인 이야기로 끌어나가는 작가의 실력은 책장의 첫 부분부터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보통 이런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사실적이지 못하고 어느 정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쉽게 몰입하기 어려운데, 리처드 매드슨은 환상적인 요소를 과학적인 분석으로 돌려놓아 생생한 분위기를 간직했다.
(핵전쟁 후라는) 묵시록적 배경에 (흡혈귀라는) 두려운 소재를 섞어 놓았지만, 소설의 정조는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쓸쓸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강아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읽는 이의 절창을 뜯어낼 정도로 가장 뭉클한 순간이다. 대화 없이 강아지에 대한 행동의 묘사만으로 이런 숭고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그가 천부적인 작가임을 방증하는 것임에 다름없다.
리처드 매드슨은 『나는 전설이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구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워낙에 많이 다루어 위력이 많이 줄었지만, 이 소설이 나온 1950년대에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나만이 정상이고 나와 다른 사람은 비정상"이란 기준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 서구사회의 오랜 정신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느 순간 역전당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란 구분은 무의미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리처드 매드슨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보다 20여년 앞서 이야기를 꺼낸 셈이다. (물론 비약이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나는 전설이다」말고도 다양한 단편들이 수록 되어 있다. 이 단편들 또한 흥미진진한데, 주인공의 망상을 다룬 작품부터 흑마술, 귀신 들린 인형, 귀신 들린 집, 무의식의 환영,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기괴한 장례식 등을 다룬 각각의 단편들은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에 수록된 중단편들은 이미 영혼을 강탈당한 작품들이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도 기시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작품들이지만, 아류들에는 없는 '그 무엇'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을 찾아 읽는 게 아닐까. 『나는 전설이다』는 충분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소설이다.
*덧붙임:
원문을 접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번역이 거칠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군요. 매끈한 문체가 좀 뭉개진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