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여름날의 강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강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강가에서 떠내려 오는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그 무언가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시체입니다. 카메라는 알 수 없는 시체를 계속 주시합니다. 그리고 옆에 뜨는 타이틀 <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여학생의 시(屍)로 시작해 주인공 미자(윤정희)의 시(詩)로 끝납니다.
시(詩)는 많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문학 장르입니다. 소설이나 수필처럼 이야기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잔가지들을 제거한 언어의 정수만을 골라 시인이 바라본 세상 전반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감상하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시인이 바라본 시각에 심정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써야하니까요. 김용탁 시인(김용택)이 술자리에서 이야기 한, “시가 죽어버린 시대, 시를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는 바로 그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소통이 부재한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시(詩)를 쓴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see, watch)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는 것(look at)입니다. 김용탁 시인은 사과를 보여주며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보기도 하고, 그늘진 면은 어떤지, 얼마나 많은 햇살을 머금었는지 생각도 해보고, 한 입 베어 물어 먹어보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방법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이 아닌, 그 세상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5세, 아니 66세인 할머니 미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습니다. 치매라 알려진 그 병은 처음에는 명사를 잃어버리고 다음에는 동사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최근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거의 원체험의 기억만 남는 병입니다. 갈수록 어린애가 되어 가는 것이죠. 세상의 운동성을 개념이라는 틀로 한정시킨 명사의 부재, 그리고 오랜 생활로 묻어온 생활의 때가 서서히 벗겨지면서 미자는 거의 날것 순수한 시각으로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15세 소녀를 생각합니다. 미자는 순수함의 세계로 회귀해 순수한 아이들을 처음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순수함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나빠지고 있지만, 아직 윤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윤리는 절대적인 윤리가 아닌, 아주 작은 범위의 윤리입니다. 여학생의 죽음을 둘러싼 학교 측의 윤리, 자식들의 잘못을 감싸주는 부모들의 윤리, 남은 자식을 키워야하는 극빈층 부모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 윤리는 서로간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져 사건은 언뜻 잘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사건이 잘 ‘합의’된 날, 미자는 물어봅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죽은 여자아이의 억울함은 해결되지 않고 합의란 틀로 덮어버렸는데, 도대체 무엇이 해결된 것일까요? 어찌됐든, 미자는 자신의 윤리를 실천합니다. 그녀는 보호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윤리는 진정한 윤리가 아닙니다. 그녀의 손자는 짐승이 아닌, 사랑스런 손자니까요. 그렇기에 미자는 더 큰 결단을 내립니다. 미자가 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자는 학교에 찾아가 사건이 벌어진 과학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미자는 죽은 소녀가 투신한 남한강 다리 위에 가 봅니다. 그녀가 떨어진 강가에 가서 그녀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소녀의 눈물같은 비에 흠뻑 젖은 미자는 간병인(이자 파출부)일을 하는 강 노인(김희라)의 “죽기 전 한 번 소원”을 들어줍니다. 소녀의 죽음을 바라본 그녀는 죽음의 절실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의아했지만, 동시에 인상적인 장면인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수강생들은 각자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은 아름다움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복기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감정은 딱 나눠지지 않은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물며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복합적이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세상의 이면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만큼 순수해져야 한다는 것을 이창동 감독은 미자를 통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 역설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 여지를 주기 보다는 가르칩니다. 그의 영화에서 종종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그가 우리의 불편한 점을 들추어낸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화를 진행하는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은 소중합니다. 그의 교훈은 지금 이 세상에서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중시될수록 영화적인 진행은 그만큼 진부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 예상이 되니까요. 진지함 보다는 진부함.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진부함. 영화감상이 아닌 고등학교 윤리 수업을 보충시간을 포함해 연속 두 시간을 들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계속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윤리 선생님의 역할을 그만큼 더 중요해질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의 수업은 다른 어설픈 선생님 수업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그리고 저도 계속 그의 수업을 들을 생각입니다.
*덧붙임:
영화의 오프닝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 영화에서 시(詩)에 대한 이야기는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와 영화의 마지막 미자(와 희진)의 시낭송은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공기인형(空氣人形)>에서 노조미(배두나)의 시낭송과 비교해볼만합니다. 그러고보니 모두 2010년에 개봉한 영화들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