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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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강의 퐁네프 파사주. 이곳의 가게는 왁자지껄 분주하지만, 유독 잡화상 한 곳만은 그렇지 않다. 잡화상의 물건들은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먼지와 습기로 썩어가고 있는 진열장 속에서 모두 빛깔 잃은 남루한 회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젊은 쪽의 이름은 '테레즈'고, 나이든 쪽은 '라캥 부인'으로 불렸다. 

   라캥 부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약해빠진 아들 '카미유' 때문이었다.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삶의 기쁨과 목적을 아들 카미유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특유의 허약함과 나약함으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맞이했다. 라캥 부인의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카미유는 진즉에 죽을 목숨이었던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은 "한없는 간섭"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그녀는 카미유를 정성껏 돌봐주는 간호사 역할을 테레즈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테레즈는 라캥 여사의 조카다. 군인인 아버지가 테레즈를 맡기고 전사한 후, 라캥 여사는 테레즈를 카미유와 같이 지내게 했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부터 "마치 허약한 애처럼 사촌오빠와 약을 나누어 먹고 어린 병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갇혀 지냈다." 그녀는 이런 부당함과 답답함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내면에서 타오르는 듯한 격정은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병자가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지닌, 가혹한 욕망을 지닌 젊은이였던 것이다. 라캥 부인의 욕심으로 자매지간 같이 지낸 테레즈와 카미유는 부부사이가 된다. 

   카미유는 작고 허약한 몸에 나약한 성격을 지녔다. 라캥 부인의 "한없는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런 어머니의 희생에 적당히 길들여져 있는 상태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부인인 테레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같은 존재다. 소년과 젊은이의 결혼은 애당초 무리였다. 

   목요일 저녁마다 라캥 부인은 손님들을 초대해 도미노 게임을 한다. 멤버는 노망기가 든 노인 모습의 경찰 간부 출신 '미쇼', 광대뼈가 불거져 나와 볼썽사나운 경찰서 보안계 주임 경관 '올리비에'와 그의 부인 '쉬잔', 그리고 카미유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철도국 서기 '그리베'다. 테레즈는 이들을 볼 때마다 "기계적인 시체들", "종이로 만든 인형 같은 인간들"같다는 생각이 들어 몸서리친다. 그가 살아온 10여년의 시간이 이런 생기 없는 분위기였으니 그럴만하다. 테레즈는 목요일 밤이면 "그냥 노곤히 잠들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만 했다. "그녀는 한탄이나 비난은 물론이고 내색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모든 의지는 자신을 극도의 친절과 극기의 수동적 도구로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어느날 목요일 모임에 카미유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창 '로랑'을 데려온다. 그는 "훤칠한 키에 건장하고 얼굴빛이 싱싱"한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로랑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똑바른 시선을 받자 테레즈는 좀 어색했다. 가슴이 몹시 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죽어있고 바래있는 무덤 같은 공간에 로랑의 등장은 테레즈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느끼는 이끌림에 당황했지만, 이내 "이 남자의 다혈질적인 천성과 큰 음성, 기름진 웃음, 그리고 몸에서 풍겨나오는 거칠고도 달콤한 냄새에 마음이 쏠려서 초조하고 괴로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로랑 역시 테레즈가 자신을 대하는 미묘한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성욕과 식욕이 왕성한 사내니까. 하지만 로랑은 신중한 사내다. 모든 욕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지만, 그 전까지 그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로랑은 테레즈에 대한 욕망과 카미유와의 관계, 라캥 부인과의 관계를 저울질 한 후 테레즈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로랑은 테레즈를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욕망한다. 그는 그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 

   "처음부터 두 연인은 서로의 관계를 필연적이고 숙명적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아 너무도 태연했고, 너무도 뻔뻔스러웠다." 로랑은 우악스러운 무모함과 대담함, 신중함을 지녔다. 테레즈와 불륜을 저지르기 직전까지 그는 관능적 호기심, 공포, 거북함, 의심으로 주저했었으나 그의 욕망이 이런 것들을 상쇄시켰다. 로랑과 달리 테레즈는 "정열이 이끄는 대로 주저하지 않고 몰두했다." 습기 찬 공간에서 시체와 다름없는 환자와 지낸 그녀는 처음으로 육체의 열락과 환희를 맛보았다. 산 채로 매장당해 끝난 인생인줄 알았던 그녀에게 로랑은 축복이다.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서 로랑과 정사를 벌인다. 그것이 자신의 청춘을 더럽게 만든 라캥 부인과 카미유에 대한 복수인양. 그녀는 로랑과의 불륜으로 성의 쾌락과 복수의 쾌락을 맛본다. 가혹한 희극, 인생의 기만, "흥분과 고요와 위안이 뒤섞인 이런 생활"이 8개월간 지속된다. 

   이런 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로랑의 지속적인 근무지 이탈로 그는 회사에 경고를 받게 된다. 애초 테레즈를 사랑하지 않고, 욕망의 대상으로만 봐왔던 로랑이었지만, 그 욕망의 정도는 그의 능력을 벗어났다. "그는 본능에 복종하고 몸의 요구대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테레즈 역시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로랑이야말로 이 무덤 같은 현실에서 잠시 숨 쉴 수 있는 도피처였던 셈이다. "이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의 죽음을 생각했다. 테레즈의 이런 생각은 로랑이 엉뚱한 생각에 미치게 했다. 테레즈의 육체와 라캥 부인의 유산,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유자적한 생활. "그의 모든 이해관계는 그를 범죄로 밀어붙였다." 

   어느 소풍날, 로랑은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테레즈는 남편의 죽음을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약한 카미유는 물에 빠지기 전에, 로랑의 목을 물어 뜯었다. 물에 빠진 카미유는 테레즈의 이름을 외치며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죽기 전까지 친구와 부인을 믿고 있었던 카미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원한으로 가득 찼을까, 아니면,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로랑과 테레즈는 드디어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 욕망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이 범죄는 그들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들이 잊고 있던 게 있었다. 그들이 괴물의 탈을 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카미유의 죽음은 로랑과 테레즈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카미유를 살해함으로써, 서로를 꼭 껴안아도 채우지 못했던 극성스러운 육욕을 만족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살인 범죄는 그들의 포옹에 싫증과 구역질을 나게 하는 강력한 환락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카미유에 대한 죄의식이 유령이라는 실체로 나타나게 되었다. 공포는 모든 욕망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이들의 욕정은 살인으로 변했고 급기야 결혼으로 진행됐다. 

   목요일 모임 멤버들은 테레즈와 로랑을 결혼시키려고 라캥 부인을 설득했다. 그들이 테레즈와 로랑의 결혼에 그토록 매달린 것은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목요일의 모임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이 모임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라캥 부인 역시 나날이 말라가는 테레즈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은 며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에서였다. "테레즈를 잃고 파사주의 축축한 상점 구석에서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 늙은 부인은 자기를 아직 살아 있게 도와주는 그나마의 위안마저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며느리를 재혼시키고 싶었다." 

   결국 로랑과 테레즈는 결혼을 했지만, 그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란히 앉아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참으려 해도 무서운 생각이 스치며 그들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그들의 정욕은 시들고 모든 과거는 사라졌다. 난폭한 그들의 육욕은 없어지고 이제부터는 겁내지 않아도 좋으리라는 생각으로 기대하던 아침의 그 깊은 기쁨을 망각하기가지 이르렀다.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 끝장을 내려고 애썼던 미친 듯한 사랑의 발작 때문에 그들은 더 깊은 공포 속에 처박혔다." 

   아들을 잃었을 때 약간의 마비 증세를 겪었던 라캥 부인은 전신마비가 되었다. 거의 반쯤 살아있는 시체로 로랑과 테레즈는 두 구의 시체와 함께 사는 셈이 되었다. 죄의식과 자책감으로 반쯤 미친 그들은 라캥 부인 앞에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고 만다. 하지만 라캥 부인은 눈짓으로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분노와 고통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육체 속에서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요일 모임에서 그녀는 놀라운 의지력으로 손가락으로 글을 써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라캥 부인은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지낸다. 

   테레즈와 라캥"은 서로 죄가 없음을 주장하고, 악몽을 쫓아내고 스스로를 기만하려 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며, 과거를 지워버릴 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테레즈와 로랑의 결혼 생활은 물리적인 싸움으로 번져갔다. "라캥 부인은 로랑이 테레즈를 발길질하면서 마룻바닥에 끌고 다닐 때면 불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급기야 그들은 외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심한 염증을 느꼈으며, 방탕한 생활이 회한의 비극을 더욱 조장시킬 뿐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과 공포를 서로 느꼈으며, 이런 생각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계획을 알아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모습은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똑같은 죄의식에 시달린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결국 이들은 동반 자살을 택한다. 이들의 죽음은, 인간의 밑바닥을 봤다는 탄식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이들이 인간이었다는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이들이 죽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요일 도미노 모임은 물론이고, 심지어 라캥 여사조차도.

   
 

뒤틀려 엎어진 두 시체는 등피를 씌운 램프의 노란빛을 받으며 밤새도록 식당의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경까지 약 열두 시간 동안, 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 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두 발 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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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4-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메님 안녕~^^
그냥..토메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힛.
이거 말이죠. 이 리뷰 말이에요. 제목에 혹했어요. 오전에.
그래서 더욱 더 안 봤어요.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일게 뻔하거든요.
또 책을 지를게 뻔하거든요. 지금 읽어야 할 책이 박스채로 있는데도.늘 지름신이..-_-
그런데도 이렇게 읽고 앉아 있다니, 전 정말로 활자중독인가 봐요. ㅜ_ㅡ

Seong 2010-04-27 07:3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L.SHIN님~ 바쁘실텐데 이렇게 와주시고... ㅠㅠ
전 요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망상과 때마침 찾아온 알라딘 비접속으로 머리가 텅 비어있는 상황이에요. 정신을 차리려면 여행이 필요할 듯...

그래도 이 책 재미있으니 꼭 읽으세요. 히힛. 정말 19세기에 나온 소설인지 깜짝 놀랐습니다. ^.^;

프레이야 2010-04-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박쥐를 보고 이 책을 읽었어요.
정말 재미나게요. 박감독은 단지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지만
인간의 성격이 아닌 기질에 대한 연구,라는 면이 꽤 매혹적이었어요.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Seong 2010-04-27 07:36   좋아요 0 | URL
저도 <박쥐>를 보고 이 책을 읽었습니다. 뱀파이어 이야기와 『테레즈 라캥』이야기를 합친 게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려서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에밀 졸라가 <박쥐>를 봤다면 화냈을지도.. ㅎㅎㅎ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5-0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졸라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있는 편이 아닌데 읽으셨군요.이 양반의 소설에서는 성직자의 추한 모습이 꽤 나오는 편이죠? 그러고 보니 소설가들은 성직자와 기자를 좋게 묘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Seong 2010-05-05 08:19   좋아요 0 | URL
이름만 들어오다가 <박쥐>를 보고 읽은 경우입니다. 다른 소설들은 읽지 못했어요.
고맙습니다.

저절로 2010-05-1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밤을 꼴딱 새며 읽었답니다.
저는 읽으면서 파트리크 쥐스킨스 '향수'가 줄곧 생각났어요!

Seong 2010-05-14 14:35   좋아요 0 | URL
재미 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