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나잇 스탠드 - One Night Stan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다소 도발적인 제목과 포스터를 앞세운 영화 <원 나잇 스탠드>는 서울독립영화제와 KT & G 상상마당의 후원으로 기획된 독립영화입니다.  단, 보다 많은 감독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장편이 아닌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이와 비슷한 기획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매년 기획하고 있는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와 거의 흡사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는 '편당 30분 내외'라는 형식적인 틀만 제시하고, 주제나 내용은 간섭하지 않는 반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주관한 <원 나잇 스탠드>는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는 점입니다.  

   이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는 민감한 주제입니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모호한 바로미터이기도 하지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세 명의 감독들은 이 쉽지 않은 주제를 사용해서 자신만의 이야기까지 풀어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타쌍피'의 부담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감상을 이야기한다면, 에로티시즘 면에서는 '별로'입니다. 전혀 충격적이지 않고, 도발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에로영화 특유의 '달뜨고 끈적끈적한 분위기'조차 없습니다. 제가 '섹시하다'고 느낀 장면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어서 문을 여는 장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최희진 씨가「코끼리아저씨」노래를 부르는 장면',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비누칠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정사 장면보다는 이런 은유적인 장면에서 감흥을 느낀 것은, '영화적 표현의 뛰어남'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정사장면 연출에 꽤 미숙하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섹스가 아니라, '성(性)을 경유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홍보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포스터만 보면, 꽤 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애초 봉만대 감독처럼 단 한가지의 목표로 영화를 만들던가("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이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해피 엔드>와 같은 파격적인 장면이라도 들어있던가 해야 할 텐데,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영화적인 완성도로 본다면 다 적절한 정사씬에, 적절한 노출이 적재적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마케팅이죠. '선정성'이란 홍보와 영화 제목이 영화가 받아야 할 평가보다 더 낮게 받게 할 것입니다.   

 

   민용근 감독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스토커 이야기입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주승)은 오래 전부터 한 여학생(민세연)을 짝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이 조금씩 멀어져 가고, 결국엔 장님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장님이 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학생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그녀의 일상을 (청진기로) 듣고, 그녀의 쓰레기를 가져와 스타킹을 머리에 써보기도 하고, 그녀의 생리대 냄새를 맡으며 그녀를 느낍니다. 저한텐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녀 앞에 나서지는 못하는 자책감과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느끼고 싶어 하는 저 애절한 몸부림! 3자가 볼 때는 더러운 행위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다가가고 싶은 애절함입니다. 이런 그를 관찰하는 또 다른 여인(장리우)이 있습니다. 그녀는 큰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며, 집안에서도 벗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 빌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무슨 이유에선지, 결혼을 앞둔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고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아픔을 가진 사람입니다. 선글라스녀는 소년을 자기 집에 데려오고 그들이 서로 같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청년은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기고 얼굴을 만지며 이야기합니다. "닮았어요." 그가 닮았다고 얘기하는 대상은, 그가 쫓아다닌 그녀와 닮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아픔을 간직한 자신과 닮았다는 것일까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성장영화입니다. 눈 먼 소년은 자신이 눈을 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시력을 잃어가던 때 사랑하는 여인을 쳐다본 모습입니다. 아마도 소년은 자신이 장님이 된다면, 그 기억마저 잃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처절하게 그녀를 기억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같은 아픔을 지닌, 선글라스녀를 만나게 되면서, 소년은 성장합니다. 자신이 장님이라는 것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소년은 여인의 선글라스를 끼고, 폴대를 짚으며 집으로 갑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은 추억을 접고 현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이유림 감독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꽤 난해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시사회에서도 가장 ‘적대적’인 분위기를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 봤을 때, 너무나 자의식이 충만한 불친절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변호사인 남편(정만식)은 오랜만에 부인(최희진)과 산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려 하지만, 아내는 거부를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아내가 사라지고, 남편은 아내를 찾으러 다닙니다. 아내를 찾으면서, 남편은 아내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의 주위엔 계속『마담 보바리』책이 나타납니다. 남편은 점점 아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감독은 ‘데이빗 린치’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너무나 전형적인 데이빗 린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두 개의 자아를 가진 여인, 길을 잃은 남자. <로스트 하이웨이>의 로컬라이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너무나 노골적입니다. 이 뫼비우스의 띠는 영화의 결말에도 이어집니다. 남편의 꿈에서 이어져 아내의 꿈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더욱 더 오리무중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있는데, 결말이 새로운 시작이 되니 답답하지요. 이 난해한 영화의 열쇠는『마담 보바리』입니다. 영화 처음 남편이 든 책은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나온 영문 버전입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작가가 쓴 책을 영역한 책, 그 위에 아내가 한글로 일기를 적습니다.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 될수록 원래의 의미는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남편 앞에 계속 나타나는 『마담 보바리』는 ‘프랑스어 ⇒ 영어 ⇒ 한글’ 이렇게 세 개의 언어를 거쳐 나타납니다.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간자들에게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점점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아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꾼 꿈이 결국 아내가 꾼 꿈이 되지만, 그들은 그 난해한 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꿈을 매개로 이야기를 한 셈이니까요. 남과 여, 부부사이에 벌어지는 감정의 골을 이렇게 흥미롭게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장훈 감독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게이 포비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코미디 장르이며, 시사회 중, 관객들에게 가장 열렬한 반응을 이끈 영화입니다. 저명한 영화 평론가 로메르(달시 파켓,『씨네 21』에 글을 송고하는 바로 그 기자!)는 부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곳이 있으니, 바로 한국의 목욕탕입니다. 외국에선 느낄 수 없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저릿저릿함의 매력에 푹 빠진 셈이지요. 그는 진영(이수현)이라는 단골 때밀이를 알고 있습니다. 진영도 매년 자신을 찾아오는 로메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고요. 1년 만에 로메르를 만난 진영은 반가운 마음에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진영과 여자친구 소희(이지연)와 300일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본의 아니게 같이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의외로 로메르와 죽이 잘 맞는 소희를 보며 진영은 조금씩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소희와 로메르가 같이 잠을 자는 망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로메르는 답례로 부천국제영화제에 진영과 소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불안한 진영은 소희를 떼어놓고 홀로 로메르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진영은 영화제 숙소에서 로메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진영의 망상이 ‘격렬하게’ 시작됩니다. 

   장훈 감독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한국의 때밀이와 안마라는 독특한 소재에서 에로티시즘을탐구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외국인과 한국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랑과 우정이라는 독특한 대비로 진행됩니다. 때로는 문화적 차이, 때로는 성 정체성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웃음을 넘어서 박장대소를 일으키게 합니다. 내레이션(독립영화 지킴이 권해효 씨가 맡았습니다)의 적극적인 활용은 짧은 러닝타임의 한계와 비전문배우의 약간은 어색한 연기를 감싸 안는 힘을 발휘합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여러 에피소드가 ‘게이’와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재미있게 맞물렸습니다. 앞의 두 에피소드들이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생각을 요한다면, 이 에피소드는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냅니다. 모든 장면이 다이너마이트인양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아마 이 에피소드 하나만으로도 본전 생각이 나지는 않을 걸출한 단편입니다. 

 

   조금 쓴소리도 했지만, <원 나잇 스탠드>는 이제까지 알려진 실험영화와 같은 독립영화가 아닌, 발랄하고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선정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주제로 영화를 만든 기성 감독들의 <오감도>보다는 훨씬 좋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선정성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 꽤 볼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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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영화 살리기 위해 경기도가 나섰다
    from 달콤한 나의 도시 경기도 2010-06-15 18:16 
    지난번 경기공연영상위원회 조재현 위원장을 만났을 때(ggholic.tistory.com/1154) 그가 한 말 중 유난히 인상깊은 말이 있습니다. 경기공연영상위원회가 워낙 다른 지역 영상위원회에 비해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경기영상위를 두고 "편의점에서 비빔밥 파는 꼴"이라고 설명했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경기영상위의 다양한 업적들을 살펴보며 "아... 정말 다양한 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치 양푼비빔밥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들처럼..
 
 
novio 2010-05-02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칼로 썰듯 하시는 예리한 분석이 여전하시네요. 오랜만에 왔는데 글의 매력은 결코 달리는 말 아래로 내려올 생각을 안 하시네요^^. 글 즐감했고, 자주 글을 올려 주세요^^

Tomek 2010-05-05 08:22   좋아요 0 | URL
알라딘 불통 때 며칠 워드에 글을 써버릇했더니 이제는 워드에 쓰는 게 편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블로그를 거의 방치했어요. 과분한 칭찬 고맙습니다.

달나시 2010-06-1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달콤시민 입니다 ^^
와~ 정말 novio님의 말씀처럼 너무 멋드러지게 글을 쓰셔서 꼭 영화를 봐야만 할것 같아요
우리 한국영화가 많이 발전하고 있는데~ 흥행만 중요시하는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도 많이
사랑을 받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많이많이 구경하고 갑니다~ ^^
더불어, '경기 영상전문펀드' 관련된 트랙백 하나 살포시 엮고 가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ㅇ^

Tomek 2010-06-16 07:4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