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둘러싼 욕망 그리고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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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 The Black Dahli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블랙 달리아>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실패작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이러한 평가는 불가피합니다. 물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 영화가 정말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의도한 최종 편집본인지, 아니면 스튜디오의 강권에 밀려 편집한 버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편집본을 보고 원작자인 제임스 엘로이가 만족을 표했다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121분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최종 편집이 스튜디오의 강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것과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을 빼지 않은점으로 미루어봐서 감독의 최종 편집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후평가는 의미없는 일이지요. 영화감독은 언제나 결과물로만 평가받는 존재니까요.
영화의 화자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버키 블레이커트(조쉬 하트넷)입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잔혹하고, 끈적거리며, 복잡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 버키와 리 블랜처트(아론 에크하트)가 파트너가 된 경위부터, 리의 여자친구 케이(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흑인 유아 강간범 주니어 내시에 대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두동강이 난 여자 시체가 발견되는 범죄- 일명 '블랙 달리아' 사건 -가 발생합니다. 리는 (15살에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토막살해된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사건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버키는 수사를 하던 중 죽은 여자와 '거의 같은' 모습을 한 매들린(힐러리 스웽크)을 발견하고, 그녀의 혐의를 숨겨주고 그녀와 섹스를 합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주니어 내시가 범죄를 저지르고, 리는 케이와 관련된 일로 죽고 '블랙 달리아' 사건은 지지부진해집니다.
'사건은 왜 이리 많이 벌어지고, 등장인물들은 왜 이리 많은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기본 설정은 원작에서 가져온 것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소설은 더 많은 사건과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게다가 한 번 스쳐지나는 기능적인 사건/인물이 아니라,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연관이 있지요. 골치아픈 구성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수많은 가지들을 다 쳐내고, 주인공 세 사람과 희생자 엘리자베스 쇼트, 그리고 용의자 매들린의 이야기에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지를 쳐도, 워낙에 방대한 사건이라 이야기는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이 영화에 관심이 간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죽은 여자와 닮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존경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을 떠오르게 하는 설정이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블랙 달리아>를 자신만의 <현기증>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버키가 엘리자베스 쇼트에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는 장면은 원작과는 다르게 보여줍니다. 버키는 엘리자베스의 오디션 필름을 보면서 서서히 그녀에게 빠지기 시작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에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가 엘리자베스를 흉내낸 매들린을 만나게 되고, 그는 매들린에게 빠지게 됩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와 매들린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버키가 매들린에게 빠진다는 설정이 심정적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너무 억지스러워요.
아무리 실패작이라 하더라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답게 '명장면'이 있습니다. 전작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 명장면들은 철저하게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에 복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버키와 케이의 대화와, 매들린이 버키에게 가족들을 소개시키는 장면은 롱테이크로 찍었는데,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니어 내시 건으로 잠복하고 있는 버키와 리의 공간과 '블랙 달리아' 시체가 발견된 공간을 한 번에 보여주는 롱테이크 역시, 이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가장 명장면이라면, 리가 죽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 불과 얼음, 아버지와 딸, 친구와 연인, 삶과 죽음, 시간(屍姦)과 근친상간이 한데 어우러진 기막힌 씬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한 번에 느끼기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영화 자체로 느끼기에도 힘들 뿐더러, 반볷해서 감상했을 때, 그리고 적극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을 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영화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도저도 아닌 범작이 될 뿐이지요.
영화는 너무 많은 설명을 제거했습니다. 리가 왜 그렇게 블랙 달리아 사건에 집착하는지, 왜 그렇게 신경증적인 모습이 되었는지, 버키는 왜 매들린이 엘리자베스와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최소한 이 정도의 물음표만 제거했더라도 영화는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블랙 달리아'사건은 그 자체로 맥거핀입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수사하지만, 모두들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데 쓰지요. '블랙 달리아'를 이용해 돈을 요구하고, 섹스도 하며, 질투와 살인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몰락에 관한 드라마지요. 하지만, '블랙 달리아' 사건은 너무 강렬한 사건이지요. 이 끔찍한 사건은 영화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다르게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객이 궁금한 것은 "누가 어떻게 죽였냐"이지, "왜 그녀는 죽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죠.
<블랙 달리아>는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평범한 감독의 걸작보다 비범한 감독의 실패작이 더 흥미롭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영화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그렇기에 원래 붙어있던 살의 모양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