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세포 소녀>와 수위를 다투는 악명 높은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연출한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집 나온 남자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유쾌합니다. 물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마냥 킬킬거리며 웃을 수 없는,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었듯이, <집 나온 남자들> 역시 마냥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아쉬운 점은, <여교수...>에서는 그 불편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이 보였던 반면, <집 나온 남자들>에서는 너무 쉽게 대중과 타협한 점입니다.
멋진 외모와 지적인 모습의 음악평론가 성희(지진희)는 라디오 생방송 중 아내와의 이혼을 통보합니다. 방송이 끝나고 그는 친구(이자 아내의 옛 애인인) 동민(양익준)과 강릉으로 가출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보니, 자신이 생방송으로 이혼을 통보한 하루 전 날, 아내가 먼저 이혼을 통보하고 가출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분노한 성희는 아내를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아내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희는 자신이 아내를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 자체를 몰랐던 아내의 오빠(이문식)가 성희와 동민 앞에 등장합니다. 이들 셋은 합심해서 성희의 아내를 찾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성희의 모습은 지적이고 신사같습니다. 하지만, 친구 동민과 만나자마자 그는 입에 욕을 달고 다닙니다. 게다가 성격은 불같고, 자기 중심적이지요. 부자(1억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 아닌 돈입니다)이지만, 친구는 동민 혼자입니다. 그런 성격에 친구가 있을리 없지요. 성희가 아내를 찾는 이유도 자신의 자존심이 상해서입니다. <집 나온 남자들>은 이 미숙한 남자의 성장담입니다. 아내를 찾으러 다니면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희와 동민의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연상시킵니다. 『오뒷세이아』가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 것 처럼, <집 나온 남자들> 역시 아내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성희는 오뒷세우스처럼 아내를 찾기 전까진 집에 가지 못합니다. 성희와 오뒷세우스에게 아내는 집과 같으니까요. 오뒷세우스가 수많은 여정을 거치듯, 성희도 여러 여정을 거칩니다. 술집을 차린 예언자(점쟁이, 김여진)에게 신탁을 받기도 하고, 세이렌(김양숙, 옥지영)의 노래에 취해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내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내의 손목에 칼자국이 있었다는 것도, 아내가 돈이 필요해 다단계에 빠졌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이해심이 부족하고, 당신은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아내의 편지에 있는 말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이런식으로 성희는 조금씩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의 오빠인 유곽(이문식)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흔들립니다. 한국 영화의 고질적 병폐인 신파가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물론 신파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파'가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에 잘 부합하느냐지요.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의 갑작스런 신파는 지금까지의 유쾌한 소동을 무효로 만들었거든요.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신파는 '질질 짜는' 신파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반성은 영화의 방향이 너무 틀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내의 편지와 결말 그리고 에필로그는 사족에 가깝습니다. 굳이 아내의 가출에 대해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의 봉합은 '작가(writer)'적인 관점에서는 꼭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영화적인 리듬에서는 아닌 것 같아요. 결말부는 그냥 설명을 하지 않았으면, 영화적으로 더 괜찮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짧은 기간에 성희가 아내를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내의 말대로 "이해력의 향상"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성희 역의 지진희 씨의 연기는, 솔직히 많이 아쉽습니다. 아무리봐도 지진희 씨는 양아치 역할이 안어울리는 것 같아요. <여교수...>에서도 비슷한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그 역할은 자신을 점잖은 사람으로 포장한 역할이라 괜찮았는데, 양아치 역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같은 불편함이 있습니다. 동민 역의 양익준 씨와 유곽 역의 이문식 씨는 딱 그들에게서 기대할 만한 역할과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김여진 씨와 옥지영 씨의 과장된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성희의 아내 역은... 이 역은 연기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화의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으니까요.
수요일,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5명의 관객과 영화를 봤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내렸겠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아쉬운 영화입니다. 이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을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