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탄족의 멸망 - Clash of the Titan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데스몬드 데이비스 감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진행한 레이 해리하우젠의 존재감이 더 큰)의 <타이탄족의 멸망(The Clash of the Titans)>은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시 이야기에서 기본 줄거리를 따왔습니다. 그렇다고 영화의 이야기를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라고 순진하게 믿어버리면, TV사극으로 국사를 공부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지지요. 이 영화는 페르세우스 이야기의 캐릭터와 기본 줄기만을 가져왔을 뿐, 그리스 신화와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심취하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밀려드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신화'부분과 가장 흡사한 부분을 꼽으라면, 오프닝에서 아크리시오스가 부인 다나에와 제우스의 씨를 받아 낳은 페르세우스를 바다에 버리는 장면뿐입니다. 그 이후는 거의 '신성모독' 수준입니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 

 

   재구성된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보호를 받아 세리포스 섬에 도착해 살아갑니다.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테티스의 아들 캘러보스가 실수를 저지르자 제우스는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아이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와 결혼할 사이였습니다.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부탁하지만, 제우스는 요지부동입니다. 자신의 아들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의 아들에겐 엄격한 제우스에게 화가 난 테티스는 세리포스 섬에서 잘 지내고 있는 페르세우스에게 고난의 저주를 내립니다. 페르세우스는 갑자기 아이티오피아에 오게 되고, 안드로메다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카시오페아의 실수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안드로메다 공주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르고스처럼 티탄족 크라켄을 내보내 아이티오피아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라고요. 대책회의를 하던 중신들은 '삼도천의 마녀들'에게 가면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얘기합니다. 페르세우스를 중심으로 원정대가 꾸려지고, 그들은 먼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삼도천의 마녀들은 크라켄을 죽이려면 같은 티탄족인 고르고 자매 중 한 명인 메두사의 머리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페르세우스와 원정대는 메두사의 머리를 베러 스튁스 강을 가로질러 갑니다. 

 

제우스 (로랜스 올리비에)

테티스 (매기 스미스) 

 

   이 모든 이야기의 원흉은 바람둥이 난봉꾼인 제우스 때문입니다. 그가 황금 소나기가 되어 다나에의 샅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페르세우스가 태어나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이미 태어날 운명이었으니까, 이 지적은 옳지 않다고 볼 수 있겠죠. 문제는 시도때도 없이 아들자랑을 하는 팔불출 성격 때문이었죠. 오죽했으면, 부인 헤라가 "그저 자기 아들이라면 어디서 나왔건 사족을 못쓰고"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큰 발단은 테티스의 아들에 대한 '무자비'입니다. 한 번쯤 용서해 줄법도 한데, 제우스는 너무 엄격하게 굴었어요. 그 이유는 제우스가 테티스에게 난봉꾼 기질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테티스에게 앙금이 남은 제우스는 이렇게 복수를 한 셈이지요. 최고의 신으로는 유치한 모습이지만, 제우스의 난봉꾼 기질을 생각해보면, 그런대로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의 신화에서는 테티스는 『일리아드』에서 활약하는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를 낳고, 아들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하지요. 영화에서 다루는 신화는 전체적으로 볼 때 엉터리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른 신화에서 차용한 것들입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우스와 테티스」 

 

크리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가장 강렬한 크리쳐는 다름아닌 마지막 티탄족인 메두사와 크라켄입니다. 스톱모션의 아날로그 효과로 이들은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입니다. 분명히 가짜인 게 티가 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어떤 독특한 '운동성'이 있습니다. 특히 메두사가 등장할 때,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기어오는 장면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입니다. 특히 고르고 세 자매 중 하나인 메두사의 사연은 가슴절절하지요. 아프로디테와 미를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메두사였지만,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흉칙한 모습으로 숨어 살게 되지요. 그녀는 자신의 흉칙함을 다른 존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무기는 활이거든요. 활은 먼 거리의 적을 섬멸할때만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온 존재들에게는 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녀는 외로이 숨어 지내는 슬픈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화에서는 아테나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얼마나 눈엣 가시였을까요?) 메두사를 없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운명은 참 덧없어 보입니다.  

 

페르세우스(해리 햄린)와 메두사 

 

   크라켄은 이 영화에 나오는 크리처 중 가장 뜬금없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데, 뜬금없이 그리스 신화에 티탄족으로 나타나니 좀 황당하지요(캐러비안의 해적에 나온 문어괴물이 바로 이친구입니다). 크라켄은 영화 초반 제우스의 명으로 자신을 기만한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는 아르고스를 멸망시키는 위력을 보여줍니다(물론 본 모습은 나오지 않았지요). 레이 헤리하우젠이 그린 크라켄은 북유럽 전설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굳이 비교하자면, 러브 크래프트의 '크툴루'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과 서스펜스는 클라이맥스답게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크라켄과 바위에 묶여있는 안드로메다 공주 

 

   영화는 신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냅니다. 거의 동화 수준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맺기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결말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제우스의 "신의 시대를 종언하고 인간의 시대를 연다"는 말 또한 낡긴 하지만 경철할만 하고요. 영화에서 언급한 신화를 다 믿지앟고, 선별해서 받아들인다면, 꽤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임: 

그래도 안드로메다(주디 보우커) 공주를 뺄 순 없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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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4-0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름이 좀 오래된 것처럼 보여요.
아, 81년도 작이네. 그럼 최근 개봉한 영화하곤 다른 건가 보군요.
실제 신화와는 별개라 해도 작가들의 상상력이 대단해요.
트로이도 꽤 볼만했었는데...^^

Tomek 2010-04-04 08:06   좋아요 0 | URL
신화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름 볼만한 내용이었어요. <트로이>는... 이동진 기자가 <트로이>를 보고 "호메로스가 살아있었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것"이라 언급했는데,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뭐 그러면서도 확장판 DVD를 날름 사버렸지만...
>,.<
영화는 나름 재미있었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