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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 A Bittersweet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기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선문답같은 내레이션이 끝나면 고층 건물 스카이 라운지에 앉아있는 김선우(이병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달디 달은 쇼콜라 케이크를 막 먹으려 하는 참인데, 누군가가 그의 즐거움을 방해를 한다. 언뜻 보기에 그 누군가는 이런 고상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다. 명찰을 보니 나이트 클럽이나 단란주점의 웨이터 같다. 그는 선우에게 "밑에 일이 생겼으니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중이고, 선우는 귀찮은 일을 맡았다는 듯이 "알겠다"며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직원들에게 손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치우라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곳의 매니저로 보인다. 한참을 걸려 지하로 내려간 선우. 지하의 나이트 클럽은 스카이 라운지와는 반대로 더럽고 천박하게 보인다. 룸에 들어가 행패를 벌이는 양아치들에게 선우는 "영업이 끝났으니, 셋 샐 동안 나가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한다. 선우는 셋을 센 후, 룸의 문을 잠그고, 양아치들을 팬다. 일을 마친 후, 선우는 다시 그만의 우아한 공간으로 돌아온다. 쓰디 쓴 에스프레소에 각설탕 한 개를 집어넣고 맛을 음미한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선우는 자신의 인생은 이렇게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것(a bittersweet life)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굉장히 재미있는 '단선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다시 감상하고 나니, 이 영화가 단선적인 내용이 아니라, 계속 다시 시작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오프닝이 전부인 영화다. 이 말을 곡해해서 받아들이지 말아주시길. 오프닝만 볼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프닝만이 실제 벌어진 일이고, 나머지는 선우의 백일몽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텅 비어있다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선우의 캐릭터는 설명이 없다. 그는 강사장(김영철) 밑에서 "7년간 개처럼 일을 해"왔고 "경호원 출신"이라는 말을 제외하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냥 유추할 뿐이다. 이렇게 불친절한 캐릭터 설명은 오프닝 이후의 영화가 선우의 '꿈'이라 생각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자신이 꾸는 꿈에 자신에 대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가정하자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선우는 문득 자신의 멋진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이다.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지고 결국 죽고마는 나르시소스 신화처럼.
선우가 상상한 자신의 멋진 죽음의 발단은 이렇다. 강사장이 선우에게, 자기가 젊은 애인(희수=신민아)을 사귀는데, 요즘들어 그녀에게 남자가 생긴 것 같으니, 잘 감시하다가 확실하면 자신에게 전화를 하거나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선우가 희수를 감시하는 사이, 나이트 클럽에서 소란을 피웠던 백사장(황정민)이 문실장(김뢰하)과 스카이라운지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당장 꺼지라"고 한다. 희수를 감시하던 중, 그녀가 애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자 선우는 강사장에게 전화를 하려다 머뭇거린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두 사람 다 기억에서 지우는 거야." 그러자 희수가 울며 이야기한다. "그게, 지우라면 지우개 지우듯이 싹 지워지는 건가요?"
심란해하던 선우는 백사장이 보낸 오무성(이기영)에게 잡혀 산 채로 회를 뜨일 뻔 한다. 원래의 이야기라면, 선우는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은 감안할 수 있으나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저분한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선우에겐 상상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우아한 남자니까. 그래서 그는 강사장의 전화를 빌어 그의 죽음을 유예한다.
선우가 잡혀간 곳은 비오는 밤 어느 교외다. 강사장이 묻는다. "왜 그랬냐?" 선우가 답한다. "그렇게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강사장이 다시 묻는다. "진짜 이유를 대라. 그 애 때문이냐?" 선우는 답하지 않는다. 강사장이 떠나고 문석은 해머로 선우의 왼손을 부순다. 이 부분은 영화가 선우의 꿈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중 하나다.실제라면 오른손을 뭉개버렸을 테지만, 영화에서는 왼손을 단 한 번 때렸을 뿐이고 손가락도 무명지와 약지 두 개만 부러졌을 뿐이다. 그래야 그가 나중에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조직원들은 땅을 파고, 선우는 생매장당한다. 그리고 암전. 선우는 여기서 또 한 번 죽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살아난다. 충분히 장엄하고 극적인 죽음이지만,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 없이 그냥 죽는다는 것은 장엄하긴 해도 허무하다. 그래서 그는 더 멋진 죽음을 꿈꾼다. 거의 만신창이가 된 선우는 초인적인 힘과 기지를 발휘해 십여명의 조직원들을 때려눕히고 탈출을 한다. 그는 부산에가서 총을 구입하고 (그 과정에서 총기류 중계상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서울에 올라와 오무성을 협박해 백사장을 불러낸 후 죽인다. 백사장에게 송곳으로 복부를 수차례 가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잘 견딘다. 죽지 않을만큼의 상처는 자신의 복수를 더 멋지게 그려줄 테니까. 선우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문실장을 죽이고, 드디어 그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간다.
스카이 라운지에서 강사장과 대면한 선우. <la dolce vita(달콤한 인생)>라는 바의 간판 아래서 선우는 강사장을 쏜다. 그 때 백사장의 복수를 위해 들이닥친 오무성과 그 똘마니들이 총격전(?!!)을 벌이고 선우는 머리에 총을 맞는다. 자신을 배신(?)한 보스를 죽이고 이렇게 장렬히 맞이하는 극적인 죽음. 죽음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고작 저런 녀석들에게 죽기엔 폼이 안 난다. 선우는 다시 한 번 죽음을 유예하고 장렬한 총격전을 벌인다. 1대 4의 싸움. 권총과 기관총을 난사하며 선우는 하나 하나 적을 섬멸한다. 그 와중에 기관총을 맞고 쓰러지는 선우. 바로 그 때, 부산 총기 중계상 보스의 동생이자 킬러인 태구(문정혁)가 등장해 남은 적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선우에게 다가간다.
태구의 등장은 작위적인데, 그럴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살아있는 선우의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선 이런 억지 결말(deus ex machina)이 필요하니까. 선우는 자신의 장렬한 죽음을 장식할 사람으로 선우만큼 멋지고 실력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죽기 전, 선우는 희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마지막 장식을 수놓는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하나쯤은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기억.
이 모든 것은 선우가 꾼 '한여름밤의 꿈'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항상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웃음짓는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멋진 액션과 스타일은 선우의 나르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다. 자신의 모습에 완전히 빠진 사내. 달콤쌉사름한 죽음을 꿈꾸는 사내. 그가 꾼 죽음의 꿈은 달콤했지만, 그는 결코 그런 달콤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는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덧붙임:
1. 이기영 씨와 황정민 씨는 등장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합니다.
2. 정유미 씨가 단역으로 한 컷 나옵니다. ^.^;